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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08월 23일 '청와대로 가자!'…
1971년 실미도 사건
▲ 당시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 선 버스 모습
1971년 8월 23일 ‘오늘’, 서울 한복판에서
백주대낮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월요병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을 오후 3시 10분께, 대간첩대책본부는 북괴 무장공비 21명이 서울에 침투했다고 발표해 수도권 일원에 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당시 정래혁 국방장관은 군 특수범 23명이 무장 탈출해 난동을 부린 것이라고 정정했다.
‘무장공비·군특수범’ 오락가락 발표 속에서 서울시민들은 쏟아지는 총격 소리에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날 수도 서울로 쳐들어 온 범인들의 정체는 대한민국 공군 684부대 북파공작원들로, 일명 ‘실미도 사건’의 주인공들이었다.
이 사건은 2003년 영화 실미도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684부대는 ‘김일성 암살’을 목적으로 창설됐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가 청와대를 습격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하려 한 것에 대한 복수로 대북 특수 부대 요원들을 구성, 실미도에서 극비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7.4 남북공동성명 등 남북관계가 급변하면서 이들의 존재도 서서히 잊혔고, 대우 또한 열악해졌다.
쌓였던 불만이 폭발한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동안 동고동락한 교관들과 기간 병력들까지 처참하게 죽이며 실미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청와대를 향해
뭍으로 돌진했다. '군관리특수범 무장난동'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공포 속의 23일 오후' 제목의 기사가 게재됐다.
인천에 상륙한 이들은 육군 해안경계부대의 저지선을 뚫고 시내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로 향했고, 경인가도를 타고 영등포 대방동 유한양행 앞 건물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지나간 거리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지역으로 변했다.
유한양행 앞 가로수를 들이받으면서 멈춰 선 버스에서 군경과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던 이들은, 더 이상 달아날
길이 보이지 않자 수류탄 4발을 연달아 터뜨리며 자폭해 19명이 사망하고 4명이 생포됐다. 이들 4명도 이후 군사재판에 회부돼 1972년 사형이 집행됐다.
군 특수범으로 발표됐던 이들은 영화 ‘실미도’에서 전원 죄수로 구성된 것처럼 묘사됐지만, 사실 모두 범죄자들은 아니었다. 그러면 그들은 어디서 온 사람들이었을까?
어떻게 실미도 부대원이 됐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2004년 국방부는 이들 중 7명이 1968년 3월 충북 옥천의 한 마을에서 실종된 청년들이었다고 확인해주기도 했지만, 결국 나머지 부대원들에 대한 신원이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한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면서 ‘김일성 모가지를 가지러 가겠다’라며 지옥훈련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들은, 북쪽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애꿎은 사람들의 목숨만 앗아간 채 죽음을 맞이했다.
▶2010년필리핀 마닐라 '홍콩관광객'
버스납치 인질극, 8명 사망
▶2009년이명박 대통령 북한 조문단 면담
▶2005년가수 조용필, 평양 류경정주영 체육관에서
`광복 60주년 기념 조용필 평양 공연`
▶2005년 청계천 광통교 95년만에 복원
▶2004년 유승민, 아테네올림픽 탁구 남자단식서 금메달, 88서울올림픽 이후 16년만의 쾌거
“10000 대 1의 승부에서 이겼다. ” 2004년 8월 23일 유승민(22·삼성생명)이 아테네올림픽에서 만리장성을 넘었다. 탁구 세계랭킹 3위의 유승민은 이날 그리스 아테네 갈라치올림픽홀에서 열린 남자단식 결승에서 중국의 왕하오(4위)를 강력한 드라이브로 몰아붙여 4대2로 완승,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이 올림픽 탁구 남자단식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1988년 서울대회의 유남규 이후 16년 만의 일이었다. 중국의 등록 탁구선수는 2000만명이고 한국은 2000여명. 저변으로 볼 때 유승민은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중국의 벽을 넘은 것이다. 중국은 92바르셀로나대회부터 2000시드니대회까지 탁구에 걸린 12개의 금메달 중 11개를 독식한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 88서울올림픽 이후 중국세에 밀려오던 한국 탁구는 유승민의 금메달을 시작으로 로 금 1, 은 1, 동 1개를 수확해 ‘제2의 탁구 전성기’를 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유승민은 전형상 백핸드 공격·수비력이 모두 약한 큰 ‘결함’이 있는 선수였다. 그러나 그는 어설프게 백핸드 약점을 보완하는 대신 포핸드 파워 드라이브 공격력을 극한까지 키우는 방향을 택했다. 99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 때 왕하오를 꺾은 후 성인대회에선 2004코리아오픈까지 6전 전패를 기록했던 그이지만, 전문가들은 그가 유남규 같은 담대함과 김택수 같은 파워를 겸비한 선수였기에 이 같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2003년아프가니스탄 육상선수 아지미, 파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100m서 18초37 로 최저 신기록 달성, 아프간의 내란 등 국제적 관심 호소 차원 차 출전
▶2002년김정일과 푸친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보스톡에서 정상회담
▶ 2001년 오늘,
#국제통화기금 구제 액 195억 달러 전액 상환 IMF 관리 체제 종료.
▶1999년한-중 첫 국방회담이 베이징에서 개최
▶1999년국회 법사위, 고위공직자부인 옷값대납 의혹사건으로 청문회 개최
▶1994년고전음악 감상실 `르네상스` 설립자 박용찬씨 별세
▶1991년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연립정부 구성에 합의.
소련 공산당 일당 통치시대에 종지부
▶ 1989년 오늘,
발트 3국 600Km 의 #인간사슬시위 벌임
▶1988년레이건대통령,
포괄무역법안(수퍼301조 포함) 서명
▶1982년바시르 제마옐 레바논 대통령 당선
▶1977년불가리아, 한국외교관 입국 허용
▶1974년긴급조치 1,4호 해제
▶1973년천마총서 천마도 발굴
황남빵으로 유명한 경상북도 경주 황남동에는 왕릉을 비롯해 많은 신라시대 무덤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것이 98호 고분(황남대총)이다. 1970년대 초 ‘경주 관광개발 10개년 계획’을 세운 정부는 98호 고분을 발굴해 주요 관광자원으로 삼고자 했다. 그런데 큰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당시까지 한국 고고학계는 단 한 차례도 신라시대 고분을 발굴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학계와 당국은 고민 끝에 ‘모의 발굴’을 통해 노하우를 얻자는 결론을 내렸다. 규모가 작은 155호 고분이 시험용 발굴장소로 낙점됐다.
73년 4월 초순 문화재관리국 지휘 아래 155호 고분 발굴이 시작됐다. 155호 고분은 내부를 드러낼수록 세상을 놀라게 했다. 신라 조형미술의 극치라는 찬사를 얻은 금관 등 귀중한 유물 수백점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다 발굴 막바지 무렵인 8월23일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옷에 흙이 묻지 않도록 말에 단 장식품)가 출토되자 세상은 다시 놀랐다. 말다래는 1500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으면서도 썩지 않았고, 하늘로 비상하는 말을 형상화한 천마도는 어제 그린 듯 선명했다.
천마도 말다래는 햇빛과 공기가 닿지 않도록 응급처치를 받은 후 조심스럽게 서울로 옮겨졌다. 자칫 햇빛에 노출되면 천마도의 색이 바래는 등 손상될 소지가 컸기 때문이다. 국립박물관으로 이송된 천마도는 보존작업을 거쳐 햇빛이 들지 않는 수장고에 보관됐다. 천마도는 발굴 이튿날 발굴 소식과 함께 그 사진이 각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신라 미술을 접한 사람들은 흥분과 감탄을 가누지 못했다. 신라시대 회화로는 천마도가 유일했다. 천마도는 누가 보더라도 국보감이었다.
155호 고분 발굴이 끝나도 누구의 무덤인지 말해줄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155호 고분은 결국 천마도를 좇아 천마총이라 이름 붙여졌다. 하지만 ‘경주 김씨들’은 김씨 성을 가진 왕의 무덤일지 모르는데 말의 무덤으로 부르는 게 말이 되느냐며 항변했다. 이들은 81년 국회에 개명 청원서까지 냈지만 원하는 바를 이루지는 못했다.
천마총은 80년대 이후 불국사, 첨성대, 석굴암 등과 함께 경주 수학여행의 필수 코스로 굳어졌고 신라 고분의 대명사 격이 됐다. 최근에는 천마도의 그림이 기린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주목을 끌었다. 2009년 적외선 사진촬영으로 머리에 달린 뿔이 선명히 포착되면서 기린 논쟁이 다시 불붙기도 했다.
▶1971년 실미도 공군특수대원 24명, 경비원 등 12명 사살하고 탈출,
서울 노량진에서 군ㆍ경과 교전 끝에 전원 사살
1968년 4월에 창설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684부대’. 그해 1월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했던 1ㆍ21사태가 창설 계기였다. 분노한 박정희는 보복조치로 특수부대 창설을 명령했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명을 따랐다. 인원은 남파 무장공비와 똑같은 31명으로 구성했고, 인천에서 20km 떨어진 실미도가 훈련장소였다. 훈련 목적은 북한 주석궁 침투. 독도법ㆍ산악훈련ㆍ폭파기술 등을 익혔고 체포되면 죽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훈련중 7명이나 숨질 정도로 혹독한 훈련이었다.
▶1960년장면 내각 탄생
▶1958년중공군, 금문도에 대한 대규모 폭격
▶1954년살인-강도 일삼은 이종희 검거
▶1944년일제, 여자정신대 근무령 공포 시행
▶1927년사코-반제티 사형집행
▶1926년영화배우 발렌시아노 사망
▶1914년일본의 대(對)독일 선전포고로 서울의 독일 영사관 및 인천의 세창양행 폐쇄
▶1910년토지조사법 반포
▶1910년경무총감부, 집회취체에 관한 건 공포
▶1892년브라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폰세카 사망
▶1884년프람스 함대, 청나라의 복건(福建)함대를 전멸시킴
▶1806년프랑스 물리학자 샤를 오귀스탱 드 쿨롱 사망
▶1769년프랑스의 동물학자 퀴비에 출생
▶1754년프랑스의 왕 루이16세 출생
▶1421년전라도·충청도, 수재(水災)로 전답 10분의 4 손실
▶1397년조선시대 서민의료기관 제생원(濟生院) 설치
1397년 8월 23일 (태조 6년)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의 건의로 서민의료기관인 제생원이 설치됐다. 제생원은 백성의 질병 치료, 의녀 육성, 향약에 관한 의학서 편찬 등 의료 전반에 걸친 일을 수행했다. 특히 빈민치료와 미아보호에도 힘썼다. 1398년 향약방서에 경험방을 모아 향약제생집성방 30권을 편찬했고, 1406년 제생원의 일을 돕는 수십명의 동녀를 모아 맥경과 침구법을 가르쳐 부인병을 전문적으로 치료하기도 했다. 제생원은 전의감, 혜민국과 함께 약을 지어 병자를 치료하기도 했다. 설치 당시 지사(知事) ·영(令) ·승(丞) ·주부(注簿) ·녹사(錄事) 등의 관원이 있었고, 1414년에는 지사 ·승 ·부승(副丞) ·녹사 ·부녹사(副錄事)의 관원이 있었다. 1460년 제생원은 혜민국에 병합됐다.
▶ 1305년 오늘,
스코틀랜드의 독립운동 지도자인 윌리엄 월리스(William Wallace) 영국 London Smithfield 에서 처형되다.(1270년 4월 3일 영국 엘더스리 에서출생~)
▶234년 8월 23일,
中 ‘삼국지 스타’ #제갈량 타계
지금 조조(曹操)와 다투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손권(孫權) 역시 삼대의 통치로 안정돼 있는 데다 능력 있는 이들을 등용하고 있어 연합 세력이 될 뿐이지 공략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고 있는 이는 이를 지킬 능력이 없으니 시급히 여기를 취해야 합니다. 이곳을 차지한 뒤 서·남쪽의 각 민족을 어루만지며 손권과 연합한 뒤 천하의 형세 변화가 있을 때 북벌을 감행한다면 통일의 패업은 달성될 것입니다.”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 말 그대로 천하를 셋으로 나눠 힘을 기른 다음 궁극적으로 천 하통일을 달성하자는 원대한 전략이다.
동양 5000년 역사상 최고의 참모로 꼽히는 제갈량(諸葛亮)의 천하 데뷔는 207년 세 번이나 자신을 방문한 유비(劉備:玄德)와의 만남에서 제안한 천하삼분지계로 시작된다. 제갈량의 나이 26세, 유비의 나이 47세 때의 일이다.
조조와 원소에 쫓겨 그야말로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던 ‘망명 장군’ 유비가 20세 연하의 천재를 얻음으로써 새롭게 날개를 다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당시로서는 한 뼘의 영토도 가지지 못했던 유비는 이후 천하의 한 축을 장악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참모 하나의 능력으로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이다.
제갈량은 신상필벌의 엄격한 법치를 끝까지 관철했다. 인재가 부족한 촉나라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군령을 어긴 인재 마속을 벤 일(읍참마속·泣斬馬謖)은 이런 고뇌의 표현이다.
그는 또 국력 양성을 위해 앞장서 근검절약했고 234년 오늘 53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군신 관계를 멸사봉공의 자세로 지켜 나간다. 유비는 이런 제갈량에게 자신의 아들이 능력이 안되면 아들 대신 즉위하라는 놀라운 유언을 남긴다.
▶ BC 30년 오늘,
로마 군인 #마르쿠스_안토니우스 (Marcus Antonius Antyllus)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에서사망(BC 83년 경 이탈리아 로마에서 출생~)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충실한 부하로 카이사르 군대 지휘관이자 행정가였고, 카이사르의 사후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하였다.
▶ BC 30년 오늘,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_15세
(Caesarion)이집트에서사망
(BC 47년 6월 23일 이집트에서 출생~) 기원전 44년 9월 2일부터 기원전 30년 8월까지 이집트를 지배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왕이다.
어린아이 때부터 자신의 어머니인 클레오파트라 7세와 함께 공동으로통치했다. 별칭인 #카이사리온은 "작은 카이사르"라는 뜻으로 로마 공화정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로 알려 져 있다.
출처 20년째 학부모 ,네이버 지식백과 ,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 hi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