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63주년, 막을 수도 있었는데
“나는 역사의 패배자였지만 어떤 것이 더 옳은가를 증명하기 위해 나의 발전에 온 힘을 쏟았다” 이 말은 5.16 쿠데타 당시 유일하게 저항하다 투옥된 6군단장 김웅수 소장(1923~2018) 말이다.
1961년 당시 국군의 0.5% 미만에 불과한 반란군 (장교250명, 사병3500명) 의해 모든 권력이 반란 군인들에게 넘어갔다. 4.19의 민주투쟁이 물거품이 되었다.
나머지 99.5% 정부군 지휘부는 반란군이 서울로 진입할 때 한강철교에 50명의 헌병을 보내며 대포도 갖고 가지 못하게 하고 기껏 카빈소총 99발을 쏜 것이 전부였으니 그것도 바로 통행을 허락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가?
박정희를 중심으로 육사8기가 쿠데타가 모의 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케네디대통령과 백악관, 미국 중앙정보부, 주한미대사관. 미8군사령관까지 사전에 알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미국이야기를 한 것은 유사시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을 주한 미 사령관이 갖고 있었고 또 미 사령관은 케네디의 명령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1%의 조직도 안 되는 소수의 반란세력에 의해 군사정변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5월19일 일체의 군사정변에 대해 어떤 의견도 주한대사관과 미군이 발표하지 못하도록 하고 정변세력을 수용하고 서로 협력한다.
국군의 조직만 가동해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기에 1군사령관 이한림, 6군단장 김웅수, 8사단장 정강, 3군단장 최석은 즉각 군을 통한 제압을 주장하고 진압 명령을 기다린다.
그러나 윤보선대통령은 군 지휘관들에게 밀서를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보낸다. ‘이 중대한 사태를 수습하는데 불상사가 파생되거나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라는 내용이다.
윤보선에게는 쿠데타가 불상사가 아니라 쿠데타를 진압하는 것이 불상사였던 것이다. 군 최고 지휘권을 지닌 장도영 참모총장도 같은 태도를 취하지만 마지막까지 김웅수 소장은 간절히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일로 김웅수 장군은 바로 체포되고 투옥되었다가 군복을 벋는다.
나는 5.16은 미국이 후진국을 다루는 정치기술, 윤보선과 기회주의 군인들이 박정희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유지하려 했다가 박과 육사8기의 야심에 물렸다고 본다.
박정희는 오치성 차지철을 보내 육사생도 시가행진을 육사교장 강영훈에서 요구하지만 강영훈은 거절한다. 이것은 정부와 미국 군부가 이미지 작전을 위한 합의된 퍼포먼스였다.
김웅수 소장의 매부가 강영훈이다. 김웅수는 당시 정부와 군 지휘부가 최선을 다해 국민을 위해 군사 개입을 막아야 하는데 그들은 그러하지 않았고 나중에 윤보선 장도영 등이 자신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쿠데타를 막는 것은 불가항력이라고 말한 것은 책임회피와 거짓말이라고 주장한다.
김웅수 소장은 군사정부의 경제개발 공이 아무리 있어도 군사독재의 과를 덮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박정희 리더십으로 흉내 내며 정권을 잡고자 하는 것을 정당화 하는 것은 우리 국민의 수준이 처참히 낮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며 어느 누구도 경제와 안보란 이름으로 독재를 정당화 하거나 또 독재의 뿌리를 두고 집권하려는 자들은 배척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정변 후 워싱턴 주립대 대학1학년으로 입학해 나중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유신에 반대해 귀국을 하지 못하다가 후에 가톨릭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를 했고 2018년 사망했다.
김웅수 장군의 유언의 말이 가슴에 깊게 남는다. “지금 기억해선 안 될 불행한 과거사가 선망되고 있다. 치적이 불법을 합법화 할 수 없다”
김웅수 장군
조심스럽게 왜 미국은 정변이 있은지 이틀만에 지지했을까? 본 글을 쓰고나서 생각했다.
장면 정권은 결국 민중을 중심으로 가기에 미국은 언젠가 이런 정부는 미국의 국익에 반하고 반미가 되면 아시아시장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런 분석이 미국지도층의 일반적 생각이었던 것 같다.
미국은 이미 소위 후진국에서 일어나는 강력한 군사정변이 일어나기를 바랬고 이런 군 독재 정부가 농업을 포기하기에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수츨하고 저임금으로 한국 인력을 통해 수출입을 늘리고 대 중국 소련과 군사적 경쟁에 한국을 이용하려고 한 것 같다.
미국은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생각하며 한국이 농경사회에서 미국의 이익을 위한 산업사회로 바뀌기를 희망했고 그래서 이승만 정권을 대체할 군사독재모델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파트너를 먼 미래 육사 8기가 담당해주길 희망하고 있었다.
5.16 당시 미국은 한국정세에 대하여 두 가지 염려를 하고 있었다. 하나는 4.19 이후 국민들이 반미적 성향이 점점 크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과 둘은 한국의 산업구조는 미국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 농업중심 국가라는 것이었다.
미국의 이익에 부합되려면 한국은 장면 같은 정부가 아니라 강력한 경제 성장을 위한 독재가 필요하기에 군사정변을 통한 새 리더십을 원한다는 것을 육사8기들에게 사인을 보냈다. 육사8기는 미군정청이 종료되면서 군대의 초급장교가 많이 필요한 시점에 탄생된 기수로 입시 경쟁률이 무려 10대1이었고 비록 6개월 교육이지만 육사사관학교에서 하는 수업을 받은 1354명의 실력파 젊은이들이었다. 즉 한국에 이만한 에너지를 집단적으로 갖고 있는 곳은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또 우수한 생도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징병의무제가 시작된다는 것을 안 젊은이들은 이왕 군 생활을 한다면 장교로 복무하는 것이 좋았고 우수한 교육과 일정시간이 지나면 공직 등에 취업을 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또한 임관하자마자 6.25 전쟁을 치르며 8기동기 전사자가 367명이 나왔다. 그러기에 어느 기수와 비교할 수 없는 전우애로 뭉쳐있었다.
박정희 장군의 형 박상희는 대구지역의 핵심적인 사회주의 인물이었다. 박상희의 딸과 결혼한 김종필과의 연결로 박정희는 군 후배들에게 미래에 의지될 인물이 되었다. 수재이며 후배 잘 챙기고 군 상부와 권력에 대한 비판도 가감없이 하는 있는 박장군의 권력의지끼지 있기에 이 둘 그룹은 완전체로 결합되었던 것이다.
권력의지도 없고 포기상태에 빠진 장면 총리는 5.16이후 수도원에 숨었고 2일 만에 나와 사퇴를 한다. 미얀마 수치고문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장면은 촌부도 아닌 졸장부다.
윤보선대통령은 신파에 빼앗긴 권력을 군이 다시 줄 것으로 믿었고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은 자신이 정치권력 중심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쿠데타를 제압할 핵심들이 이런 인간들이었다. 난 정치인을 믿고 그들이 해 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음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5.16 당시 우리 군은 1군 사령부인 야전군과 2군 사령부인 후방 예비군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실제로 군 조직과 무기는 1군사령부가 다 갖고 있었다. 2군 사령부 부사령관에 불과한 박정희소장의 쿠데타군이 소수이고 군사력은 1군 사령부가 2군 사령부를 9대1로 앞서있었다.
1군 사령관 이한림 중장은 쿠데타 군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한림에게 윤보선은 친서를 보내 군 동원 명령을 하지 못하도록 권하고 매그루더 미 사령관도 자신의 동의없이 군동원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군에 참여하면서 군사력의 우위로 주도권을 가지라고 권한다.
이한림은 박정희와 통화를 하며 자신의 지휘 관할 군사력이 박정희 군사세력보다 9배 이상 많다고 하며 많이 양보한다고 하면서 군사혁명지휘부의 수를 반반씩 하자고 제안하다 쪽팔리게 박정희에게 체포된다.
이때 1군사령부 포천 포병부대인 6군단 김웅수 소장이 제압하자고 강하게 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 체포되고 또 6군단 소속 8연대장 정강 준장도 치밀하게 제압 작전을 세우지만 이한림과 장도영의 기회주의 처신으로 역시 체포된다. 김웅수 소장은 혁명재판에서 10년 구형을 받고 정강준장은 12년 구형을 받고 2년3개월 옥살이를 한다.
정강 준장은 박정희와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2기) 동기였다. 육사2기는 1946년 9월24일 입교하며 80일 교육을 받고 1946년 12월 14일 196명이 임관된 사람들이다.
전두환의 장인인 이규동도 육사2기이다 박정희는 내심 정강에 대하며 호기심과 열등감이 있었다. 정강은 신체가 크고 성격이 호탕하며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정강은 군지휘관 시절 ‘3보 이상 걷는 거리라면 뛰는 것이 나의 명령이다’ 라고 하였다. 가난한 한국 군인이 체력을 키우는 것은 뛰는 것밖에 없다고 하였고 특히 훈련 사병들 이름을 다 기억하는 천재적 능력을 갖고 있었다.
야! 임마! 이런 식으로 부르지 않고 김중하 이병, 박소직 이병 이런 식으로 한 사람 사 사람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우정은 상대가 힘들 때 무조건 같이 있어주는 것이란 그의 마음과 행동이 전우애를 말하지 않아도 전우애가 생겼던 것이었다.
정강은 이한림과 장도영에게 연락하지만 이들이 전화를 피하자 윤보선에게 전화를 직접 해 “각하, 제에게 쿠데타 진압명령을 내려주세요! 8사단으로도 쿠데타 세력을 즉각 진압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자 윤보선은 ‘군인들이 서로 총질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세하시고 명령계통을 따르세요!’ 라고 말한다. 이것이 5.16 당시 윤보선의 실체다.
정강이 조사를 받고 있다 우연히 김종필을 만나자 정강은 “김종필 너 까불지 말라”고 몰아세우자 불쾌한 김종필은 정강이 상급자 김응수 소장의 군 동원 준비명령을 수행한 하급 장군이기에 실제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웅수 소장 보다 더 많은 형량을 내리도록 한다.
이 일을 화병으로 고생하던 정강 장군은 군인은 어떤 경우도 정치에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마지막 암으로 69년 사망하는 순간에도 자신이 박정희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박정희를 죽이기 전에는 자신이 죽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결기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