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
최장순
계산대 입구 명함을 집어 들고서야 여인의 이름이 ‘춘화’ 라는 걸 알았다. 버젓한 식당 이름이 있었지만 나는 ‘춘화씨네 밥집’으로 불렀다.
큰길에서 조금 걸어 들어간 골목 안 실비식당, 꽃무늬 블라우스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입술 주변에 점 하나 찍은 콧소리가 연상되는 이름이지만 정작 본인은 콧소리를 내지도, 화사하게 꾸미지도 않았다. 적당한 키에 연륜이 묻어나는 튼실한 몸, 입술은 누운 일자로 닫혀 있을 때가 많았다. 무릇 장사란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줘야만 한다지. 저 봉해진 입이 오죽했으면 그럴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손님 상머리에서 얼쩡거리지 않는 모습이 내심 좋아 보이기도 했다. 막걸리집도 아니고 요릿집도 아닌 골목이 지키는 나름의 자존심이지 싶었다.
이끼 낀 바위처럼 모여 앉은 사내들이 꼬깃꼬깃 주머니에 접어두었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왁자한 웃음 속 육두문자가 오가고, 지갑 얇아도 손맛 좋은 춘화씨가 직접 띄운 청국장과 묵은 김치에 싸먹는 돼지목살. 모래바람 드나들던 목이 얼큰하게 씻겨나간다. 입에 짝짝 붙는 맛이 먼 객주에서 나눈 사랑만큼 걸지다고 술 몇 잔에 벌건 난로처럼 달궈진다. 맛깔나게 입담을 굽다가도, 흘끔 다녀가는 시선들.
"요즘 춘화씨 연애하나봐. 이뻐졌어.”
술안주 삼아 던지는 농담에도 이골이 났는지 입은 없고 귀만 달고 있다는 듯, 춘화씨는 웃음으로 받아넘긴다. 담배연기 절은 묵은 벽지 속 희미한 꽃무늬 같다.
요즘 춘화씨가 달라지긴 했다. 미장원에 다녀온 머리는 단정했고 못 보던 옷매무새하며 뽀얗게 분을 입힌 볼과 입술이 붉다. 까만 생머리가 등허리까지 닿는 앳된 처녀인 딸이 가끔 들러 엄마라 불러줄 때면 행복한 표정이던 춘 씨. 그것과는 다른 낌새, 그 나이 언저리쯤에서 느껴지는 뭔가가 있다. ‘저이도 여자였구나’ 싶다.
골목이 바빠졌다. 춘화씨가 남자와 매일 식당 문을 닫고 가더라고, 둘이 보통사이는 아닌 것 같다고, 심심한 입들이 부지런히 소문을 퍼 날랐다. 술빵처럼 부풀려진 소문 속의 남자는 어느 날은 오징어 배를 타던 사람이었고, 또 어느 날은 사업실패로 돈 한 푼 손에 쥐지 못한 룸펜이라던가. 소문은 삼류건달 같은 꼬리표를 달고 반복해 씹혔지만 그 두 사람에겐 의미 없는 말들. 식당 한쪽의 발효되고 있는 청국장처럼 연애는 익어갔다. 외로움 기댈 든든한 어깨를 만난 춘화씨는 전에 없이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사랑은 서로의 냄새에 이끌리는 것이라고 한다. 어느 향수나 꽃향기보다 진한 그만의 살가운 냄새. 쿰쿰한 청국장 냄새 속에서 둘의 사랑은 숙성되었을까. 왁자한 농담과 욕지거리가 침을 뱉으며 골목을 돌아나가고 썰물로 하루가 빠지면, 시계처럼 조용히 벽에 걸렸던 남자와 늦은 저녁상을 맞는 춘화씨. 언뜻 들여다본 유리창 안, 벗어놓은 신발이 사이좋게 옆구리를 비비고, 불빛들 한 발짝 비껴선 밤. 둘은 고단한 하루의 셔터를 내리고 함께 돌아갔다.
신발을 소재로 한 그림을 본 적 있다. 짝의 중요성을 표현하는 듯 보였다. 한 짝은 신랑, 한 짝은 신부, 갓 출발하는 화사한 한 켤레가 있는가하면, 허름하지만 한 짝 한 짝 편안해 보이는 늙은 신발도 있었다. 또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신발끼리의 조합도 있었다.
짝이 맞지 않는 신발은 신을 수 없다. 설혹 신었다고 해도 채 몇 발짝 가지 못한다. 조이거나 헐렁해도 그렇다. 제대로 된 켤레라면 편안해야 한다. 편안하다는 건 적당하다는 것. 적당하다는 말처럼 모호한 조건도 없다. 가격도, 모양도 적당해야 한다. 발 크기에도 적당해야 오래 도록 함께 할 수 있다.
신발을 고를 때처럼 사람도 까다롭게 선택해야하지만, 막상 누가 내 진정한 짝이 될 것인지는 미리 내다볼 수 없는 것이 한계다. 끈적끈적 진물 나는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위로해주는 나이. 허물은 모른 체 덮어주는 춘화씨가 다시 사랑을 시작한 것일까. 한때의 어긋난 걸음을 잊고 이제야 편안한 짝을 만난 것일까.
움츠린 목 위로 내민 얼굴이 유난히 추워 보인 날, 바람이 얼얼하게 뺨을 핥는 정류장에서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헐거워진 자존심을 여며주듯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남자의 목에 둘러주는 여인. 추위쯤이야 대수냐는 듯 연신 웃음을 쏟는 입술이 잘 익은 봄, 춘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