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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평(文一平,1888.5.15~1939.4.3) 선생은 변방인 서북지방의 무관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마도 그 출신지역이나 신분적 배경이 전통적인 지배계층의 후예가 아니었다는 점은 선생의 생애나 활동, 그리고 학문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선생이 전통에만 얽매이지 않고 항상 새로운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자 하였음은, 바로 그러한 점에서도 가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888년(고종 25) 5월 15일, 압록강 가까운 평북 의주군 의주면 서부동에서 선생은 남평(南平)을 본관으로 하는 문천두(文天斗)와 해주 이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 집안은 선생의 선대 13대조 이래로 의주의 동북방인 창성(昌城)에서 세거해 온 무관가문이었다. 남평 문씨 세보에 의하면 선생의 선조 여럿이 무관직을 지냈던 것으로, 특히 증조부는 무과에 급제하여 종 4품의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 족보에는 선생의 이름이 항렬에 따라 명회(明會)로, 초명은 정곤(正坤), 자는 일평(一平), 호가 호암(湖巖)으로 기재되어 있다. 일평이란 이름은 본래 자였던 것이다.
상당한 재력을 지녔던 가문의 외아들이었던 선생은 18세가 되던 1905년까지 의주에서 한학자 최해산(崔海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 사이에 의주에 교회가 설립되고 서양사람들을 보게 되면서 서양문화를 접한 선생은 러일전쟁을 목도하고 시세에 대한 관심도 많아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을 것이다. 선생이 교회에도 출석하고 단발한 것은 미국유학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미국유학이 여의치 않자 일본에 유학하게 되었다. 도쿄에 간 선생은 1905년 가을 기독교계통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에 청강생으로 등록하였으나 일본어 능력이 부족하여 일본어를 배우고 나서, 1907년 9월에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로 편입하였다. 그 과정에서 선생은 부인 김사재(金思哉)에게도 신식교육을 받도록 하여, 부인도 서울의 정신여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선생은 교회에 출석하며 기독교계통의 학교를 다니는 등 기독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평안도 출신 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에 참여하여 학회의 임원을 역임하고, 기관지 태극학보에도 여러 차례 기고하였다. 이광수(李光洙)나 홍명희(洪命憙) 등과도 가깝게 지내며, 문학을 좋아하고 많은 독서를 하여 이 시기부터 한국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1910년 3월 명치학원을 마친 선생은 귀국하여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1908년 9월 평양에 설립된 대성학교(大成學校)의 교사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학기 뒤 의주의 양실학교(養實學校)를 거쳐 서울 경신학교(儆新學校)로 옮겼다. 모두 기독교계 학교들이었다. 의주의 양실학교에 재임하던 시기에 선생은 비밀결사로 조직된 국권회복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대체로 1910년 9월 중순의 신민회 회합에 그가 출석한 것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1907년 안창호․양기탁(梁起鐸) 등이 주도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 결성된 신민회는 관서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였는데, 의주지역은 양실학교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선생은 의주에 체재한 기간이 짧아서 신민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1911년 봄 재차 도일하지 않았다면 선생 또한 일제에 의해 날조된 이른바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신민회 의주 관계자로 ‘105인 사건’에 기소되었던 인물의 신문조서에서,
라는 신문내용으로도 알 수 있다. 신민회에 참여한 사실로 선생이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11년 봄 선생은 재차 도일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입학하였다. 1년 6개월 뒤 예과를 마친 선생은 학부의 정치경제과에 진학하며 재동경조선유학생친목회의 기관지인 학계보(學界報)의 편집을 맡아 창간호를 간행하고, 김성수(金性洙)․안재홍(安在鴻)․송진우(宋鎭禹) 등과 교유하였다.
1912년 말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하였는데, 그것은 국내에서 신민회 회원들이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고 있는 실정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생은 주로 상하이에 머무르며 신규식을 비롯하여 박은식․신채호․조소앙․홍명희․정인보․김규식 등과 가깝게 지냈다. 이들과 함께 선생은 1912년 7월 신규식의 주도로 설립되었던 동제사(同濟社)라는 독립운동단체에 참여하였으며, 1913년 12월에 동제사에서 설립한 박달학원(博達學院)의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다만 선생은 중국에서 오래 체류하지 않아 이 때의 활동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립운동에 많은 자금을 동원하였기 때문에 이후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고 한다.
1914년 귀국한 선생은 고향에서 생활을 하였는데, 선생의 경력으로 말미암아 1917년 1월부터 경찰의 갑종(甲種) 요시찰인물로 감시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선생은 2월 3일 동경 유학을 목적으로 상경하였다가 3․1운동을 목격하였으며, 3월 8일 오후 김백원(金百源) 목사를 만나 협의하고 새로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던 것이다. 3월 11일 오전 작성된 문서를 김백원에게 보내고, 3월 12일 오전 서린동의 영흥관(永興館)이라는 중국음식점에서 안동교회 김백원 목사, 승동교회 차상진(車相晋) 목사, 조형균(趙衡均)․문성호(文成鎬)․김극선(金極善)․백관형(白觀亨) 등과 함께 이 문제에 관해서 회합하였다.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총독에게 보내는 청원서 형식으로 된 이 선언서는 당일 오후 ‘김백원과 차상진 등 12인’의 명의로 발표되었으며, 선생은 보신각에서 선언서를 낭독하여 독립 만세 시위 운동에 앞장섰다. 이 선언서에 관여된 인물은 대부분 기독교 신자와 유생들이었고, 관련자 7명이 징역 8개월에 처해졌다. 선생도 즉각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 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출옥 이후 선생은 학교 교원생활을 하면서도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0년 5월에 창립된 노동운동 단체인 조선노동대회에 교육부장을 맡은 것을 비롯하여, 1927년 2월 국내 민족유일당 운동의 결과로 발기된 신간회(新幹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중앙위원과 간사에 선출되었다. 6․10만세운동을 기화로 국내의 민족주의․사회주의 진영이 타협하여 조직한 신간회는 정치ㆍ경제적 각성의 촉진․단결 공고․기회주의 배격을 내세웠는데, 1928년까지 전국에 140여 개의 지회와 3만 명의 회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발기인과 간부로 신간회에 참여한 것은 선생이 좌우진영의 합작에 관심을 가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선생과 절친한 홍명희와 이관용(李灌鎔) 등이 신간회의 핵심이기도 하였다. 이 무렵 일제의 조사에는 선생의 ‘주의사상’을 “배일사상을 가지고 민족주의를 품고 있다.”고 하였다.
선생은 1927년 8월 15일에 개최된 조선물산장려회 이사회에서 이사(선전부 상무이사)로 보선되었으며, 그 기관지 <자활(自活)>의 주필로도 선임되었다. 1920년 8월 평양에서 비롯된 조선물산장려회는 1923년 1월 전국적인 조직이 창립되어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였으나, 1924년부터 이 운동이 침체되자 재건을 위한 움직임이 계속되었고, 1927년에는 지식층과 상공인․기술자 층의 참여를 시도하여 ‘조선인 본위의 민족경제 자립’을 추구하였다. 선생은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있으며, 물산장려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한편, 생계안정을 도모하면서 한국사의 연구와 대중화 작업에도 열을 올렸다. 1922~3년경부터 선생은 중동학교를 거쳐,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의 역사교사로 재직하였다. 선생이 교직에 있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경제형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어려운 경제형편에서도 선생은 송도고보의 교사직을 사임하고 평안도 유지들의 지원으로, 1925년 8월경에 세 번째의 일본유학을 떠날 만큼 학구열에 불타고 있었다. 사실 3․1운동 직전에도 와세다대학 정치과에 재입학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선생은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 동양사부에 청강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선생의 면학의지와는 달리 막상 그 성과는 크지 않아 1년이 못되어 귀국하였다. 만학인데다가 동경제대의 관학적(官學的)인 분위기가 선생에게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 1933년 조선일보사에 편집고문으로 취직하기까지 선생은 신문사와 중등학교를 자주 옮기며 호구(糊口)를 삼고 있었다. 1927년에는 중외일보사(中外日報社) 논설부 기자로 있었고, 일시 경성여자상업학교에도 재직한 바 있었으며, 1928년 말부터 1931년 초까지 조선일보사에 재직하였다. 1929년 봄부터는 배재고등보통학교의 교사를 겸직하다가, 1932년 8월까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임하였다.
선생은 1933년 4월에 조선일보사의 편집고문으로 취임하여, 1939년 4월 별세할 때까지 만 6년을 재직하였다. 1932~3년에 걸쳐 조선일보사를 인수하였던 평북 정주(定州) 출신의 광산주 방응모(方應謨)는 서북 출신의 조만식(曺晩植)을 사장에, 선생을 편집고문으로 초빙하였던 것이다. 신문사에 재직하면서 선생은 비교적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찾고, 한국사에 관한 많은 글들을 쓸 수 있었다. 선생의 사후 호암전집(湖岩全集)에 수록된 글의 대부분이 바로 이 시기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들이었음에서도 짐작되는 일이다.
호암전집은 정치․외교사, 문화․풍속, 사담(史譚)․수필로 편집되었다. 선생의 글은 대체로 외교사와 정치사, 한국의 문화․사적․자연에 관한 것으로 나뉘어진다. 바로 선생은 정치와 문화를 기본적인 축으로 하여 한국사를 이해하고자 하였는데, 한국사에 있어 정치의 전개양상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부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도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지배계급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폐해가 대단하였던 것으로 이해하며,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한국사회의 정체성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정치에 비하여 한국문화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선생은 ‘조선심(朝鮮心)’과 ‘조선사상’, ‘조선학’ 등을 논의하였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의 독창성과 위대성을 강조한 바 있었다. 아울러 역사상의 사랑이나 풍속 등에 대하여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것은 단순히 문화에 대한 개별적 소개라기보다는 문화사적으로 한국사를 이해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선생의 역사학이 문화사적 역사발전의 측면에서 이해되는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선생은 사적과 자연에 관해서도 국토여행 형태의 많은 글을 써 한국의 자연과 역사에 애정을 표시하였다. 또 선생은 인물을 매우 중시하고 있었으며, 그 대상이 되었던 인물도 매우 다양하였다. 군주나 정치가․학자․장수․예술가 등 널리 알려진 인물들뿐 아니라, 역사상의 반역아로 알려진 인물이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던 승려, 그리고 역사에서 잊혀졌던 인물들도 선생에게는 중요하였다. 여성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운 것도 선생의 학풍을 보여주는 한 모습이다. 온달(溫達)보다 평강공주(平岡公主)를 내세운 것이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그 같은 관점은 지배계급 중심의 역사관을 극복하는 방편이기도 하였다. 한국의 역사와 자연에 대한 선생의 다양한 관심은 결국 한국의 국토와 그곳에서 생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선생은 사람들의 생활은 정치사로, 생각과 자연은 문화사로 드러내었다고 생각된다.
선생의 한국사 연구는 민족주의사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민족주의사학은 국가라는 외형은 없어졌으나 정신만 살아 있으면 민족은 살아있는 것으로 이해하여, ‘낭가사상’(郎家思想, 신채호)을 비롯하여 ‘혼’(박은식)이나 ‘얼’(정인보) 등 민족정신을 강조한 정신사관이었다. 선생 역시 1930년 전후 한국사의 전개를 ‘대조선정신’과 ‘소조선정신’의 대립과 갈등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대조선정신이란 대륙경략과 관련된 북진정책의 수행을 의미하고, 소조선정신은 한반도 내에 머무는 것이었다. 특히 선생은 고구려와 고려가 외침을 막아낸 사실을 여러 차례 서술하며, 삼국통일을 고구려의 대조선운동의 실패이며 신라의 소조선운동의 성공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신채호가 한국사의 전개를 낭가사상과 유학사상의 대립으로 설명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정신 역시 정신사관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선생은 조선정신과 아울러 ‘조선심’이나 ‘조선사상’도 내세웠는데,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민중 본위의 문자로 제정되었기 때문에 조선사상의 대표적인 것으로 언급하였으며, 세종대왕은 민중본위의 정치를 시행하고 훈민정음을 제정하였으므로 조선심의 대표자로 파악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조선심․조선사상의 핵심은 민중본위의 실제적인 민중문명이었다. 선생이 역사의 원동력을 민중에서 찾은 것은 특히 3․1운동에 대한 평가에서 잘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선생은 3․1운동을 동학농민전쟁 이래 최대의 민중운동이었음을 지적하였고, 그 결과로 민족과 여성의 각성이 이루어졌음을 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한국의 역사와 민족에 대한 자긍에서 조선심․조선정신․조선학을 강조하면서도, 역사에 있어서 국수주의적인 요소는 배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서술하고 엄정한 비판을 통하여, 그 장점에는 더욱 힘쓰고 단점은 제거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즉 국수주의를 비판하면서, 아울러 우리 역사에 대한 비하도 배격하였다. 사실 그대로를 밝히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선생의 또다른 관심은 역사학의 대중화였다. 선생은 한국사의 통속화․취미화․과학화․미문화(美文化)를 주장하며, 신문에 계몽적인 사론이나 사화를 쉬운 문체로 쓰고 어린이를 상대로도 연재한 것도 역사학 대중화의 실천이었다. 일부에서 선생이 전문적인 학술논문을 쓰지 않고 계몽적인 글로 일관하였음이 안타까운 일로 이야기하지만, 이윤재(李允宰)가 선생의 사학을 소개하며, “심오한 학설이나 번쇄한 고증은 일체 피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일반대중이 잘 이해할 수 있는 통속적 문장으로 쓰기를 힘썼”다고 지적한 것이 오히려 올바른 인식이었다. 바로 그것이 오랫동안 선생이 추구한 역사의 대중화였고, 그것은 동시에 문화운동의 형태로 드러난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선생은 1939년 4월 3일 오전 6시 30분, 향년 52세로 별세하였다. 사인은 급성단독(急性丹毒)이었다. 4월 7일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에 매장되었고, 그 해 12월 3일에 정인보의 글로 묘비가 세워졌다. 선생의 글은 유고집 형태로 1939년에 호암사화집(湖岩史話集)과 호암전집 3권, 그리고 1940년에 소년역사독본(少年歷史讀本)이 발간되었다. 선생은 학문도 출중하였으나, 인품이 뛰어나면서도 겸손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학자․언론인․종교인․문인 등과 폭넓게 교류하였는데, 선생을 추모하는 글에는 모두 학문뿐 아니라 인품에 감동되었음이 자주 언급되었다. 선생은 성격이 급하면서도 다정다감하였으며, 동시에 엄격하였던 같다. 그리고 5남매를 양육하면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으나, 가난한 사람이나 친구들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못하였다는 일화가 여럿 전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첫댓글 학창시절 읽었던 삼성문화재단에서 출간한 호암문집을 아직도 소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