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애가(無碍歌)란 신라시대 원효(元曉, 617~686)가 지었다고 하는 불교가요로 제작연대는 미상이고, 가사도 현전하지 않는다.
다만 노래의 유래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원효불기조(元曉不羈條)와 파한집(破閑集) 권하(下)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애(無碍)’란 화엄경(華嚴經)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에서 유래한 말이다.
一切無碍人(일체무애인) 모든 것에 거리낌 없는 사람만이
一道出生死(일도출생사) 한길로 생사의 번뇌를 벗어날 수 있으리
원효가 파계하고 한 때 속인 행세를 하며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일컬을 때, 광대들이 큰 바가지를 들고 춤추며 노는 것을 보고 그 모습을 본떠 무애(無碍)라 이름하고 이 노래를 지어 부르며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으며, 불교를 민중에게 널리 전파할 수 있었다고 한다.
원효는 당시의 승려들이 대개 성내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지방의 촌락, 길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무애호(無碍瓠)를 두드리고 화엄경(華嚴經)의 "모든 것에 거리낌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도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는 구절로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가무와 잡담 중에 불법을 널리 알려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움막속의 거지나 더벅머리 아이들까지도 불법을 알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가 이런 방법으로 서민의 교화에 나선 것은 학문적인 구법(求法)을 위한 입당을 포기한 후 심법을 깨달은 뒤이며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실계(失戒)로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자칭하던 때 이후로 보여진다.
그는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후일 대학자가 된 아들 설총(薛聰)을 두었다.
그가 스스로 소성거사라 부른 것은 실계로 인한 속죄의 한 방법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대중교화의 방편으로 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대중교화의 선구자인 혜공(惠空)이 등에 삼태기를 지고 길거리에서 대취하여 노래하고 춤추었던 것이나 대안(大安)이 특이한 옷차림으로 장판에서 동발(銅鉢)을 치면서 "대안 대안"을 외친 것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중교화의 행적을 마친 뒤에는 다시 소성거사 아닌 원효화상으로 돌아가 혈사(穴寺)에서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한편, 파한집의 기록에는 원효가 파계했을 때 호리병박을 어루만지면서 저자(市)에서 노래부르며 춤추니, 이것을 무애라 하였고, 뒤에 호사자(好事者)들이 호리병박에 금으로 만든 방울을 달고 채색 비단을 장식하여 두드리며 음절에 맞게 춤 동작을 하고 여기에다 경론(經論)에서 가려 뽑은 게송(偈頌)을 지어 이것을 「무애가(無碍歌)」라 했다.
밭가는 늙은이들까지도 이것을 본받아 놀았다고 한다.
고려 때 이 노래는「무애무(無碍舞)」로 바뀌어져서 궁중의 정재(呈才) 춤의 하나로 되면서 기녀가 창하였고, 조선말까지「무애희(無碍戱)」라 하여 무악(舞樂)으로 전승되었다.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무애가(無㝵歌)
원효의 생존기간에 비추어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가사는 전하지 않으며, 〈삼국유사〉 권4 의해(義解) 원효불기(元曉不羈), 〈파한집 破閑集〉 권하 등의 문헌에 그 유래만 전한다.
① <삼국유사>의 기록 :
원효가 파계하여 설총을 낳은 후 속인 행세를 하며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자칭할 때,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바가지를 얻었는데 그 모양이 이상했다.
원효는 〈화엄경 華嚴經〉의 "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일체 구속됨이 없는 사람은 죽고 사는 것을 한길로 벗어남)의 문구를 따서 그 바가지의 이름을 '무애'라 했다.
이 바가지를 들고 이 노래를 부르며 수많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불교를 널리 전했다.
그래서 몽매하고 가난한 많은 백성들이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니, 원효보다 큰 교화를 이룬 사람은 이전에도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② <파한집>의 기록 :
원효가 파계했을 때 표주박 모양의 이상한 그릇을 들고 저자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니, 이를 '무애'라 했다. 뒤에 호사자(好事者)들이 호리병박에 금으로 만든 방울을 달고 채색비단을 장식해 두드리며 음절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경론에서 가려 뽑은 게송을 지어 부르니, 이것을 〈무애가〉라 했다. 밭 가는 늙은이들까지도 이것을 본받아 놀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효가 당시 귀족불교를 반대하고 민중들에게도 어려운 불교 경전을 쉽게 알리기 위한 의도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뒤 고려(일설에는 신라) 때는 '무애무'라는 궁중무용으로 바뀌었고, 조선시대에는 왕가의 번영을 송축하는 데 불리거나 무악으로 전승되었다.

원효대사의 초상
출처 :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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