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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barnabak
예수 스타일로 사는 사람들
골로새서 3:12-17
2018년도 오늘로써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또한 내 옆에서 나와 함께 하고 나를 도와주고 기도해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은 ‘덕분네’가 되면 좋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누구누구 덕분에 잘 지냈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덕분네고 이 사람이 진정 자기를 알고 감사를 아는 사람인 줄 압니다.
이 시간 덕분네가 되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면 좋겠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하나님의 도우시고 인도하신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덕분네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고 기도해 주신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람은 각자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완도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 한 분은 새벽 2시 3시까지 잠을 자지 않고 말씀준비를 하고 글을 씁니다.
그리고 오전 시간은 내내 주무시고 그래서 성도들도 오전에는 어떠한 전화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이 그 목사님이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입니다.
며칠 전에 외평교회 목사님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들렸는데 충북노회 한 목사님이 빨간 베레모를 쓰고 오셨습니다.
장례식장에 빨간 베레모라니, 조금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그 목사님의 패션 스타일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살아가는 스타일이 있고 그 스타일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에 보면, 기독도와 충성이란 두 순례자가 허영의 도시에 이르렀을 때 허영의 성주는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조사하게 합니다.
두 가지 이유였는데 하나는, 자기들과 같지 아니한 흰 옷을 입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가나안 말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조사관이 묻습니다.
‘너희들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길이냐?’
‘너희들은 어째서 그런 이상한 옷을 입고 있느냐?’
두 순례자는 ‘우리는 천성을 향해 가는 사람들인데 다만 이 도시를 지나가고 있을 뿐입니다.’ 대답을 합니다.
조사관들이 기독도와 충성을 조사하지만 특별한 죄목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혼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흰 옷에 더러운 것을 묻혀 우리 안에 가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삼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어가 다르고 입는 옷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삶의 스타일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스타일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다고 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뭔가가 달라도 달라야 합니다.
그 다른 것 때문에 기독도와 충성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다른 스타일의 삶을 고집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서 ‘남보다 더 하는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삶, 남보다 더 하는 삶, 욕심을 더하고 욕망을 더하는 삶이 아니라 섬기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일에 더하는 삶이 되어야 그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의 스타일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제자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왕이 되려는 줄 알았습니다.
큰 기대를 가졌던 제자들 중에서 세베대의 어머니가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주의 나라에서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명하소서.”
다른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친척관계를 이용하여 저렇게 로비를 하다니.
그때 주님은 조용하게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높아지고 부리고 명령하며 살려고 하지만, 그것이 잘 사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너희는 그렇지 않아야 하리라.’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주님은 세상의 스타일과 다르게 종이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큰 자이고 으뜸이 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스타일은 그럴지라도 너희는 그런 삶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내가 제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2018년의 마지막 주일 송년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만 여러분이 살아왔던 2018년은 세상의 스타일과 얼마나 달랐습니까?
사람들이 보기에 확연히 구별될 만큼 다른 모습을 보이며 살아오셨습니까?
아니면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 외에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똑같이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스타일대로 우리의 삶의 스타일이 바뀌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주님께 칭찬받고 이 땅에서 행복을 창출하는 삶이 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스타일은 어떠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 삶을 본받아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스타일을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의 스타일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삶의 모습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신 삶을 말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것을 옷을 입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삶으로 사는 것을 옷을 입는 것으로 표현했을까요?
옷은 그 사람을 대변하고 그 사람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거지를 대변하는 옷은 절대 좋은 옷이 아닙니다.
좋은 옷을 입고 구걸하면 ‘멀쩡한 게 왜 구걸을 해’ 하면서 돈을 주지 않습니다.
거지 옷을 입어야 구걸이 되기 때문에 거지는 새 옷을 사주어도 입지 않습니다.
군인들을 대변하는 옷은 군복입니다.
군인들이 양복에다 넥타이를 매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해서는 전투의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옷을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교복을 보면 학생임을 알 수 있고 가운을 보면 간호사인 것을 알 수 있고 경찰복을 보면 경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대변하는 옷은 무엇입니까?
무슨 옷을 입어야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고 가장 잘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긍휼의 옷입니다.
자비의 옷입니다.
겸손의 옷입니다.
온유의 옷입니다.
오래 참음의 옷입니다.
이 옷들을 입어야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고 예수의 스타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교회의 신조어가운데 ‘권사스럽다.’는 말이 한 때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 내에서 ‘권사스럽다’는 말은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인데 일부에서는 그게 부정적인 의미로 보여 진 것 같습니다.
신문 기사에 의하면 ‘권사스럽다’는 말은 교회에 가서는 그렇게 친절하고 잘 웃고 예의바르면서 집에 와서는 식구들에게 난폭하고 신경질적이고 욕 잘하고 어떤 경우에는 폭력도 휘두르는 여자를 표현한 말입니다.
특히 시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표현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패션은 결코 교회에서만 나타나서는 안 되고 가정과 직장과 일터와 삶의 현장 구석구석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옷을 늘 입어야 하는 것처럼 이러한 삶의 스타일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삶이 되어야 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심판자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겸손한 삶이 되어야하고,
온유한 마음을 보이되 오래 참음으로 그 사람이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응원해 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 자신이 이렇게 새로운 옷을 입게 될 때 옛날에 입었던 옛사람의 옷은 자연히 벗어지게 되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두 번째, 예수 스타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용서하고 용납하면서 사랑으로 품어주는 삶입니다.
13절 14절 말씀을 보면,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우리가 옷을 입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가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신앙인격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나아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대인관계에서는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것처럼 도저히 우리 힘으로 능력으로 갚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하여 도망갈 때 므비보셋의 종인 시바가 먹을 것을 갖고 찾아옵니다.
다윗은 시바에게 네 주인 므비보셋은 왜 안 왔느냐? 고 묻습니다.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에게 다윗은 왕자중의 한 명처럼 극진하게 대접하였기에 자기와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조금 불쾌했던 것이지요.
시바는 반란이 일어나자 므비보셋이 백성이 다윗을 몰아내고 나에게 왕권을 돌린다고 하면서 좋아했다는 거짓을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준 밭을 다 시바에게 줍니다.
반란이 진압되어 다윗이 환궁하게 되었을 때 이번에는 므비보셋이 찾아옵니다.
예전에 시바에게 듣던 말이 있어서 그때 왜 나와 함께 가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므비보셋은 시바의 말과는 정반대의 말을 합니다.
왕을 좇아가려했지만 시바가 혼자 가 버리고 왕에게 나를 모함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다리를 쓰지 못하기에 갈 수가 없었다는 므비보셋의 말은 신빙성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누군가 한편은 왕 앞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거짓을 판단하려면 시비와 므비보셋을 불러놓고 양자 대면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거짓말한 자를 처벌하면 공의를 세울 수 있고 신하들의 자세를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윗은 양자 대질을 하지 않고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대신 시바와 므비보셋에게 밭을 똑같이 나누도록 합니다.
다윗이 우유부단하기 때문이었을까요?
다윗은 이 시점에서 시비를 가려 처벌하기 보다는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주는 일을 택합니다.
세상에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우리의 죄를 낱낱이 가려서 시시비비를 가린다고 하면 우리 중에 누가 설수 있겠습니까?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주었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설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우리가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줄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예배가 주님 앞에 상달하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 위대하신 사랑을 조금이나마 닮아가게 되고 예수 스타일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세 번째, 예수 스타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감사와 찬양의 삶입니다.
15절 하 반절에 보면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했고
16절 하 반절에서도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절에서도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스타일은 세 가지 분야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자신에게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찬양하고 감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중세 시대 때 수도원에서 중점적으로 교육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차이를 아십니까?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을, 감옥에 들어가는 것으로 여기실 분도 많으실 것입니다.
수도원이나 감옥이나 외부와 차단되어 있고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 어렵고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볼 때는 수도원이나 감옥이나 다 비슷합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수도원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감사가 있고 찬양이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입니다.
그러나 감옥은 원망과 탄식과 후회와 불평과 불만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옥입니다.
이 말을 적용해보면 아무리 수도원 같은 곳이라고 할지라도 감사가 없고 찬양이 없다면 감옥이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감옥 같은 곳이라도 하나님께 감사가 있고 찬양이 있다면 천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도 직장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불평하고 불만하고 탄식하고 원망하면 그곳이 곧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와 찬송과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면 그곳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스타일로 산다는 것은 감사와 찬양의 삶을 통하여 내가 있는 이곳을 천국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정말 감옥같이 느껴지신다면 감사와 찬양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꼭 환경이 나빠서가 아니라 감사가 빠져있기에 그런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보고 그리스도를 평가하고 교회를 평가하고 우리 때문에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우리 때문에 교회에 나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표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문을 닫는 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때문에 세상이 밝아지고, 세상이 주님께 돌아오고, 우리 때문에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일을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스타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 스타일로 산다는 것은 먼저, 내 자신이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세상의 옷을 입지 않고 유행의 옷을 입지 않고 그리스도의 옷,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웃과의 관계에는 서로 용납하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먼저 은혜를 받았기에 우리도 백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감사하는 자가 되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018년을 잘 마무리하시고 내년 새해에는 예수 스타일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