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는 임진왜란을 겪은 불행한 군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행복한 왕이었다.
조선시대 유명한 재상의 반 이상이 선조를 거쳐 갔다.
40년 이상의 긴 재위기간에 비하면 당파 싸움으로 인한 국정 혼란도 거의 없었다.
선조는 나약하고 책임감도 많이 부족한 군주였다.
그에 비하면 뛰어난 신하들이 많아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런 신하가 바로 서애 유성룡과 이순신이다.
선조 시기에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지냈던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발발 당시인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전황들을 기록한 수기다.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한 대표적인 저술 중 하나이다.
류성룡이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懲毖”는 의도에서 자신이 겪은 임진왜란의 원인과 7년간의 전황을 자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임진왜란 당시 그는 영의정과 도체찰사로 군무와 국정 운영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류성룡은 이 책에서 임진왜란을 일본이 조선과 중국을 모두 침략한 동아시아 전쟁으로 파악하였다.
특히 징비록은 근세 일본인들에게 임진왜란을 알려 주는 주요한 사료로 인식되어 많이 인용되었다.
'징비록'이라는 이름은 《시경》 소비편(小毖篇)에 적혀 있는 "내가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의 자서에 "난중의 일은 부끄러울 따름이다."라고 적었는데, 스스로 반성한다는 의미에서 이 책을 저술한 것이다.
내용은 전쟁의 배경, 전투 당시의 상황, 조선·일본과 명나라간의 외교 관계, 주요 맹장에 대한 묘사와 전투 성과, 이후의 백성들의 생활상 등의 임진왜란에 대한 총체적인 기록이다.
저자인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주요 직책을 역임한 덕분에 당시 보고된 문서들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징비록의 집필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 남인의 일원이었던 류성룡이지만, 징비록에서는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징비록은 이후 일본에 유출되어 큰 인기를 끌었는데 언제 처음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683년의 쓰시마 번주 서적 재물 조사 목록에 이미 '징비록'이 보이고, 1687년에 간행된 다른 책에서도 징비록이 인용된 흔적이 있다.
1693년에는 중국과 한국 문헌상의 일본 관련 기록을 모은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에 징비록의 내용이 일부 인용되었으며, 1695년에는 징비록 전체 내용에 조선의 행정 구역표, 조선 지도가 첨부된 '조선징비록'이 간행되었다.
19세기 말에는 일본판 조선징비록이 일본에 체류했던 중국 학자를 통해 청나라에도 전해져서 동아시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저자 자신이 쓴 『징비록』의 서문에, “매번 지난 난중(亂中)의 일을 생각하면 아닌 게 아니라 황송스러움과 부끄러움에 몸 둘 곳을 알지 못해왔다.
그래서 한가로운 가운데 듣고 본 바를 대략 서술했으니, 임진년에서 무술년까지의 것으로 모두 약간의 분량이다.
이에 따라 장계(狀啓)·소차(疏箚)·문이(文移) 및 잡록(雜錄)을 그 뒤에 부록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본 2권은 내용이나 체재가 결본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초간 『징비록』본에 자손들이 『근포집』과 『군문등록』을 빼놓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이 책자를 가리켜 “비록 볼만한 것은 없으나 역시 모두 당시의 사적(事蹟)이라 버릴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그의 위치나 책의 내용으로 보아, 이 책은 임진 전란사를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