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가 있다 / 이정록
매끄러운 길인데
핸들이 덜컹할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눈물로 제 발등을 찍을 때다.
탁자에 놓인 소주잔이
저 혼자 떨릴 때가 있다.
총소리 잦아든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노을을 바라보던 젖은 눈망울이
어린 입술을 깨물며 가슴을 칠 때다.
그럴 때가 있다.
한숨 주머니를 터트리려고
가슴을 치다가, 가만 돌주먹을 내려놓는다.
어딘가에서 사나흘 만에 젖을 빨다가
막 잠이 든 아기가 깨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촛불이 깜박,
까만 심지를 보여주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가 있다.
순간, 아득히 먼 곳에
불씨를 건네주고 온 거다
- 시집 『그럴 때가 있다』 (창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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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록 시인
충남 홍성 출생, 공주사범대 한문교육과 및 고려대 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및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동심언어사전』 『그럴 때가 있다』 등
청소년시집 『까짓것』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
동시집 『콧구멍만 바쁘다』 『저 많이 컸죠』 『지구의 맛』
동화책 『십 원짜리 똥탑』 『미술왕』 『대단한 단추들』 『아들과 아버지』
그림책 『똥방패』 『달팽이 학교』 『황소바람』 『나무 고아원』 『아니야!』 『어서 오세요 만리장성입니다』
2002년 김달진문학상, 2013년 윤동주문학대상, 2017년 박재삼문학상, 2021년 한성기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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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정록 시인의 시집 『그럴 때가 있다』의 표제시를 띄웁니다.
- 그럴 때가 있다
이정록 형의 시집은(청소년 시집이 아니더라도)
어른보다는 청년들이, 청년보다는 청소년들이, 청소년보다는 조금 더 어린아이들이 읽어도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시인이 전하는 파동에 공명하기에는
대개의 어른은 자신만의 주파수가 이미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렵사리 공명한다 해도 생각의 변화, 삶의 변화로 이어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시에 공명하는 어른이 많다면
그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지금 이 시를 읽고,
마음에 어떤 울림이 없다 해도, 공명하지 못한다 해도 그다지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실망할 일도 아닙니다.
이런 시를 꾸준히 읽다보면
언젠가 내 안에 불씨 하나 문득 되살아날지도 모르니까요.
문득 그럴 때가 정말로 올지도 모르니까요.
그런데 정작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에게도 정말 그럴 때가 있긴 했을까요?
나에게도 그럴 때가 오긴 올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출근길 흐린 가을 하늘에서
노란 별 하나가
툭
어깨에 내려앉더군요.
이성선 시인은 그걸 우주가 손을 얹었다 했지요.
2024. 11. 11.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