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자유의 가치
유옹 송창재
자유스럽다는 것은 어디까지를 말하는 걸까?
자유의 반대개념은 구속일까? 강제일까? 방임일까?
우리는 자유스러워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유스러워진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의미 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한마디 말로 정의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자유”, “자유스럽고 싶다.”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뱉어 낸다.
물론 자기가 처해있는 환경과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그것을 “자유”라 표현하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자유스러워 진다고 말들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발적 의사에 의한 객관적 구속 상황에서 벗어 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은 확신일 수 있을까?
그러면 그것을 벗어나면 또 다른 굴레는 없나?
거기에서 벗어나고 또 벗어나고.... 그렇다면 자유라는 말에도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가장 힘든 구속은 육체적인가 아니면 정신적인가?
육체적 굴레에서 힘이 들 때 그것을 벗어나고 나면 거기에서 오는 또 다른 마음의 갈등이 생겨 새로운 구속이 또 나를 옭아맬 것 이다.
자유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여야 할 상대가 느끼는 자유의 질이 상대적일 때는 어느 자유를 용인하여야 하나?
내 “자유”에 비하여 그 자유를 폄하하거나 경시할 수가 있을까?
나의 자유의 가치와 상대의 자유의 가치는 서로 본인들에게는 절대적 개념이고 그것이 전부라면 그“자유”는 질의 고급스러움을 따질 필요가 없는 자유일 것이다.
그저 원하는 상태의 그것이 자유일 것이니까.
원하는 데로 그냥 두어주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냥 두면 될 것이다.
그 뒤에 오는 새로운 위험성과 또 그것에의 다른 속박에 대한 우려는,
내가 내 자유의 의미와 가치를 절대적 가치인양
상대적 자유의 질적 가치를 폄훼하려고 하는 나의 이기일 것이다.
장애자인 나는 성숙해지기 시작하면서 비혼을 고집하였다.
내 주위에서 보는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곤궁 때문에 인간 기본가치와 그에 부수하는 일반적인 사랑마저도 버리는 것을 보고...
그것도 나중에는 철저히 남이 되어 남겨진 다른 이들에게 마저 영원한 상처를 주며, 사랑에 대한 다른 종류를 핑계삼아 이야기하며 등을 돌리는 것을 보고...
일찍 악착같은 현실에 적응할수 없는 나의 가치관으로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기에는 벅찰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현실에서 더구나 가장 기본적인 가치라 규정되는 것조차 해결할 수 없을 때에는 상대에게 미안하여 나 또한 견디어 내기 힘이 들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 책임으로부터 일찍 도망갔었다.
배금주의가 최고의 덕목이 되고
돈이 최고 가치인 물질적 자본주의 세상에서
이 만큼이나 살면서
내 결정이 옳았다고 긍정한다.
하지만 그래도 한 쪽이 허전하고 빈 것은 한겨울의 옆구리 문제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런 사고로 여태껏 살면서 먹고 마시는 데 연연하여 악착같이 찾아 먹으려고도 하지않고 찾아 마시지도 않으며 그저 내 성실과 주어진 능력으로 살았다.
그것이 과연 무욕의 자유로움이었을까?
나이가 들고 이제 반추해 볼 시간이 미래의 시간보다는 길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내가 옳다고 고집할 수 있는 사고가 있을 때 나를 정리하고 싶어서 나는 등단을 했다고 해도 아주 허무맹랑한 거짓은 아닐 것이다.
이제 다 늙은 나이에 무슨 명예나 허명을 탐내 귀한 문단을 기웃거리며 위선적인 글을 쓰겠는가?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또 다른 나는 좀 더 젊었을 때부터 욕심을 내어 갈고 닦아 볼 것을 하는 생각도 해 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후회와는 다른 의미이다.
많은 필부들이 자기를 말하지 못하며, 자기의 진심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지도 못하고 그냥들 갔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게는 시인묵객이고 수필가라는 라벨이 생겼으니 그것을 이용이 아닌 사용하여서 나를 조금이라도, 내 심정을, 그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정말 조금이라도 말 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글도 아닌 짧은 글이며 작품의 가치가 없는 글이나마 조금씩 나를 나타내고자 욕심을 하는 것이다.
이것도 나를 자유스럽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믿으며 감히 독자들에게 건방을 떠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실로 소원이 있다면 시인으로 정말 세상에 놔두고 갈 수 있는 한 작품만 있으면 되고, 수필로도 역시 그렇다.
하지만 文才가 없는 장삼이사인 나는 그저 진실하고 정직하게 나를 두고 가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가끔은 나도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늘 거짓말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거의 늘 상대를 고려한다.
그것도 가끔은 거짓말을 섞어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안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내가 자유스러운 가였고,
편협한 이기에서 저를 포장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하기도 한다.
어떨 때는 그 생각조차 거짓으로 하기도 한다.
늘 살아오는 과정에서 배운 언어로, 언어가 아닌 상투적 말로 상대를 상처주고 구속 한다면 나도 싫은데 상대야?
그런데 그러면서도 무의식적으로 툭툭 내 뱉는다.
그것이 몸에 배어있는 편하게 사는 방법이니까.
항상 생각하며 모든 언행을 달아서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그것은 너무 힘들고 어려우니까.
그것도 자유영역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