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대통령의 사망을 공식 확인한 곳은 국군서울지구병원이다.
경황없이 일을 치르고 난 병원장 김병수는 고용원 김희순 여인에게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업고 예비군 훈련장에서 도시락을 팔던 김여인이 세인의 눈에 띈 것은 1977년 11월이다. 등에 업은 10개월짜리 여자아이가 항문이 없어 생식기로 배설을 해야 하는 기형아였다. 벽돌 찍는 공장에서 만나 결혼식도 못하고 그냥 사는 남편은 폐결핵으로 누워 있었다.
지방순시를 마치고 귀경 열차에서 신문보도를 읽은 박정희는 기사쪽지를 오려 주머니에 넣었다.
국군서울지구병원장 김병수를 불러 도와줄 수 있는가를 알아보라고 했다.
김병수는 경기도 고양으로, 대전으로 김여인의 정처없는 삶을 뒤밟아 사실을 확인했다.
“수술부터 하시오. 어떻게든 고쳐 내시오.”
원장을 비롯한 군병원 의료팀은 3차에 걸친 대수술을 감행했다. 그 결과 선천 기형을 완전히 정상의 기능으로 돌려놓은 것이 12월31일이었다. 김희순 여인의 아기로 해서 한해가 흐뭇하게 마무리되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청와대를 알리지 말라고 지시하는 일이 많았다. 김여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김병수를 부를 때마다 돈봉투를 주면서 국군서울지구병원에서 알아서 하는 일로 하라고 일렀다.
병원장 김병수는 김여인의 남편을 시립병원에 장기입원토록 했다. 그리고 김여인은 국군서울지구병원 고용원으로 채용되어 어린 딸과 함께 간호장교 숙소에서 생활해 왔던 것이다.
1979년 10월31일, 병원장 김병수는 김여인 앞에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하는 얘기니까 조용히만 속에 새겨두세오. 아주머니를 도와드린 건 내가 아니라 돌아가신 어른이십니다.”
느닷없이 대통령이라는 말을 듣고 김여인은 넋잃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어요!”
병원장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김여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했다.
“뭘 보고 이 못난 사람을 그토록 도와 주셨는지요!”
김여인은 1979년 11월1일 청와대 빈소 앞 추모 행렬 속에 상복 차림으로 엎드렸다. 혼자 엎드려 오래도록 일어나지 못했다. ◎
첫댓글 이날저는 군대입대했는데요
가슴이 뭉클해짐니다.말을하려면 한도~끝도~없습니다.만....朴대통령님의 혜안(慧眼)의 경지(鏡智)에 고개가 숙여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