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각자가 다른 종교를 믿으면서 자기 부족의 시조를 천강족(天降族)으로 섬기면 장차 왕권과 신분사회에 도전하는 세력이 생겨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왕위 세습, 관료 제도와 신분 제도 정비, 율령 반포 이후 삼국의 왕들은 국민 사상 통일 작업에 착수한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 신라는 527년(법흥왕 14) 각각 불교를 공인하고, 백제도 384년(침류왕 1) 불교를 공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생에서 어떻게 살았는지가 후생의 삶을 결정한다는 불교의 업(業) 사상은 뒤집으면 전생의 삶이 현생을 결정했다는 논리였으므로 국민들에게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전파하는 데 적격이었던 것이다.
구미 도개면 도개리 360-4번지에 모례정(문화재자료 296호)이라는 유적이 있다. 모례정은 신라 최초의 불교 신자인 모례가 사용한 우물이라는 뜻이다. 물론 눌지왕(417∼458) 때의 우물이 아직도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모례정에는 전(傳)모례정이라는 공식 이름이 따로 정해져 있다. '모례의 우물로 전해진다'는 뜻이다.
모례정 다음으로는 구미 해평면 송곡리 403번지에 도리사라는 사찰이 있다. 도리사에서 가장 볼 만한 것은 아도화상 사적비(경북 유형문화재 291호)와 극락전(유형문화재 466호), 그리고 고려 석탑(보물 476호)이 있다. 다행히 이 셋은 도리사 경내에서도 한 곳에 몰려 있다. 이 사찰은 눌지왕 때 고구려 승려 아도가 일선군 모례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파한 후 세운 절로 전한다.
김유신 집터 인근인 경주시 사정동 285-6번지도 불교 전래 유적지다. 이곳은 법흥왕이 오랫동안 신성시되어 오던 숲(천경림)의 나무들을 베어내고 사상 최초의 공인사찰인 흥륜사를 지은 역사의 현장이다. 물론 법흥왕의 불교 공인 정책에 귀족들이 크게 반발했다. 왕권을 신권(神權)으로 끌어올려 귀족들의 권력을 압도하려는 불교 공인 정책이 그들의 정치적 이해와 상반되었기 때문이다.
불교 공인을 주장하던 이차돈이 처형될 때 목에서 흰 피가 솟는 이적(異蹟)이 일어난다. 그러자 귀족들은 반대를 멈춘다. 이차돈의 목은 소금강산 백률사 터로 날아가 떨어졌다. 뒷날 백률사 터에서는 신라 때(817∼818, 헌덕왕 9∼10년) 작품인 이차돈 순교비가 발견되었다.
왕을 암살하려던 승려와 궁녀가 처형되는 492년(소지왕 14)의 서출지(書出池) 사건은 신라 왕실이 이차돈 순교(527년) 이전부터 불교를 신봉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렇지 않다면 승려가 궁궐 안에서 '왕의 여자'인 궁녀와 사랑을 속삭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