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렙 수14:6~15절 2024.6.23. 주일 오전
* 하나님으로 사는 자
오늘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그 마음이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갈렙입니다.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고 이제 취한 가나안 땅을 각 지파에게 분배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기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유다 지파 중에서 갈렙이 나와서 기업을 분배하는 일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나에게 기업을 더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기업을 분배할 때 방법은 제비뽑기입니다. 14: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뽑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었으니"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제비를 뽑아서 기업을 분배하라고 하신 것은 분배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분배의 주관자가 하나님일 수밖에 없는 것은 가나안 땅을 얻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비를 뽑아라는 것은, 내 것을 내가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대로 받아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모두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좋은 땅이 있으면 좋지 않은 땅도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서로 좋은 땅을 차지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제비를 뽑는다면 좋은 땅이 걸린 지파는 좋아하겠지만 좋지 않은 땅이 걸린 지파는 투덜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땅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본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굳이 제비를 뽑아라고 하신 것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지파들간의 분쟁을 막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비를 뽑아서 각자의 소유를 결정한다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제비를 뽑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 것이라는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을 서로 나누어야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이 제비뽑기입니다. 결국 가나안 땅을 제비뽑아라고 하신 것은, 가나안 땅은 너희들 소유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 힘으로 취한 땅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 제비뽑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갈렙은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기업을 얻을 땅을 지목을 하는 것입니다. 제비를 뽑아서 분배해야 할 땅을 제비뽑기를 하지 않고 스스로 지목하여 취한다는 것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반발을 살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전혀 반발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갈렙이 지목한 땅이 이스라엘이 보기에 전혀 욕심을 일으킬만한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2절에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고 합니다. 갈렙이 요구한 땅은 헤브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헤브론 땅은 이스라엘이 정복한 땅이 아닙니다. 헤브론에는 아직 아낙 자손들이 있습니다. 아낙 자손은 체구가 거대한 족속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누가 과연 이 땅을 차지하고자 하겠습니까? 제비뽑기를 해도 그 땅이 자기들에게 걸릴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갈렙은 그 땅을 원한 것입니다.
*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자
그렇다면 갈렙이 왜 굳이 헤브론 땅을 원하는 것입니까? 아낙 자손과 싸우기를 좋아해서입니까? 이것은 과거 가나안 땅을 정탐했을 때의 사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갈렙은 바로 그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나와서 가데스바데아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합니다. 9절에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과거 열 두 명의 정탐꾼이 가나안을 정탐했을 때 열 명의 사람들은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에 어떤 사람들이 있든 상관없이 가나안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기 때문에 들어가면 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가나안 땅의 족속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고 가나안 족속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던 갈렙에 대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민14:24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고 합니다. 즉 갈렙은 이미 자신이 기업으로 얻을 땅을 약속 받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제비 뽑을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갈렙이 정탐한 땅은 헤브론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브론을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에 그 땅이 곧 내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대로 헤브론 땅에는 건장한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결국 헤브론 땅을 취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전쟁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만약 갈렙이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하나님이 자신에게 약속한 땅이라고 해도 가만히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차라리 제비를 뽑아서 저 땅을 기피하고 싶은 것이 인간 본연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나와서 아주 당당하게 하나님이 나에게 약속하신 땅을 내게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건장한 아낙 자손과 싸워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이 없습니다. 45년 전에 모든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모세를 원망하던 것과는 달리 민14: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고 외쳤던 갈렙의 믿음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가나안의 상황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갈렙의 믿음이 45년이 지나서 85세의 나이가 된 지금에서도 여전히 갈렙에 의해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10~11절에 갈렙이 가나안을 정탐한 때가 40세입니다. 그리고 45년이 지난 지금 그는 85세가 되어서 오늘 본문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85세면 이미 늙은 나이입니다. 기력이 다 떨어진 나이에 건장한 아낙자손들이 있는 헤브론을 달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렙에게는 아낙자손들이 건장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만 위대하게 보일 뿐입니다. 아낙자손들의 체구가 얼마나 크든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으면 저 땅은 우리 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갈렙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갈렙에 대해서 여호수아가 어떻게 합니까?
* 싸워야 하는 고난의 길
13절에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라고 합니다. 갈렙을 위해 축복했다는 것은 갈렙이 힘을 얻어서 아낙 자손을 이기기를 기원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갈렙과 같은 그런 믿음이 곧 축복 안에 살아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축복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은 보이는 것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살아가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늘의 것을 바라고 하늘의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복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의 복의 상태는 세상이 보기에는 복이 아니라 오히려 난처하고 어려운 상황에 빠진 것입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복이란 손쉽게 세상의 것이 자기의 손에 주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갈렙을 기다린 것은 건장한 아낙자손입니다. 더군다나 아낙 사람가운데서도 가장큰 아르바 사람들이 갈렙을 기다립니다. 갈렙은 그들과 전투를 해야 할 상황인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갈렙이 가고자 한 길은 자신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죽이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복이라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든 편한 길로 가기를 애를 쓰는 것이 사람인데, 오히려 고생이 되는 길로 가겠다고 나서는 갈렙이 정상으로 보여지겠습니까? 하나님이 갈렙에게 남겨 놓으신 길은 편한 길이 아니라 힘든 길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남겨 놓으신 신앙의 길이기도 합니다. 신앙의 길은 절대로 편한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 넣기도 하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할 때 하나님이 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산다는 것은 보이는 것을 힘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것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돈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러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 받는 자는 언제나 보이는 것과 싸우는 삶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고난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에 부러워하지 않고 세상 것에 기죽지 않고 약속된 하늘의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때 그것이 생명을 보여주는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