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2014년 첫날 지리산 해돋이 산행기
어쩌다 보니 올해도 어느덧 가는구나 연초의 결심 이루지도 못했는데
한 해를 그냥 보내기가 허전하여 새해를 맞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술 한잔은 해야지 어쩌고 하다 보면 TV는 제야의 종소리를 중계한다
그 기쁨의 종소리에 맞춰 새해의 결심을 되뇌다가 어느새 잠이 든다
그리고는 연말이 되면 같은 일상의 반복이 그간 나의 송구영신이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이 패턴을 바꾸었다 바꾸어야만 될 것 같기에
어제보다 나아진 오늘을 만들기 위해 바뀐 생각과 행동의 송구영신이
새해 첫날은 명산에 올라 뜨는 해를 맞이하며 호연지기를 채워보리라
계사년의 끝날 밤 10시50분 경부하행선 죽전 간이역에서 버스를 탔다
잠을 청하다 보니 금산 못 미쳐 버스 안에서 새 해 갑오년을 맞는다
시골길 접어들어 지리산국립공원 중산리분소에 도착하니 새벽 3시다
칠흑의 밤 등산로 입구 차단기 앞에는 벌써 수십 명이 도착해 있다
나도 그들과 같이 헤드랜턴을 켜고 스패츠를 착용하며 등산준비를 한다
3시반이 넘어도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는 차단기 앞에 그사이 불어난
등산객들의 볼멘 소리에도 관리소 직원은 안전을 이유로 요지부동이다
미리미리 보내주면 오히려 더 안전할 텐데 그들만의 이유가 글쎄요 다
등산객들의 웅성거림 속에 누군가를 부르는 호칭이 양계장 님이었다
여기저기서 쿡쿡 거리는 소리에 진짜예요 사실은 육계장 님도 있어요
관리소 직원의 한마디에 사람들이 빵 터졌으니 불만 진통제 역할이다
정각 4시 차단기가 올라가며 안전상 뒤를 따르라고 안내원이 외친다
어쩌랴 이미 마라톤 출발점으로 변한 그곳의 등산객들 통제불능이다
한국인들의 안전불감증이 공사 현장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통감한다
심산의 밤을 밝힌 랜턴의 행렬을 음미할 겨를도 없이 뛰듯이 오른다
칼바위 망바위를 지나며 간식에 따끈한 커피 타임 극락이 따로 없다
간간이 나무 사이로 보이는 별이 초롱초롱한 것을 보니 날씨는 쾌청
구름이 끼겠다는 예보에 해돋이 걱정을 했었는데 이제부턴 해방이다
생각보다 춥지 않은 날씨에 상쾌함이 더해진다 기대만큼 눈이 없어
겨울 산의 운치는 모자라지만 다 좋기를 바라는 게 지나친 욕심이리라
어두운 밤 위아래로 길게 늘어선 헤드랜턴의 행렬이 참으로 아름답다
옥에도 티가 있다 했던가 틈만 보이면 툭툭 쳐가며 쉴새 없이 옆으로
추월해 오르는 사람들 결국에는 얼마 못 가 병목에 막혀 끼어드는 데
한마디로 민폐다 그런데도 빨리 못 가면 옆으로 비켜서라며 당당하다
문창대 이르러 눈 길이 시작되니 발걸음 조심조심 때론 아슬아슬하다
법계사가 어렴풋한 윤곽을 드러내고 불빛이 옹기종기 모여 웅성거린다
눈길을 마지막까지 버티던 사람들 틈에 끼어 나도 아이젠을 착용한다
군밤에 마지막 남은 커피로 목을 추기고 눈 덮인 가파른 길을 오른다
얼마를 오르니 동이 트기 시작하고 조바심에 앞지르기를 하는 사람들
자신의 위험이야 본인 몫이지만 타인의 위험은 어찌되던 아랑곳 없다
랜턴 없이도 오를 만해지며 남강의 발원이라는 작은 샘을 지나치려니
그 옛날 진주에서 직장생활 하던 총각 때 생각이 스친다 방황이었던가
병목의 계단에 이르니 앞 쪽에는 최고봉의 웅장함이 눈 돌린 동녘에는
붉게 물든 하늘이 곧 해를 토해 놓을 것 같다 이미 늦은걸 어쩌겠는가
지리산 정상에서의 해돋이를 코 앞에서 포기해야 하다니 그러고 보니
민폐를 무릅쓰며 추월하던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한다
좁고 눈 덮인 경사로에서 예정에는 못 미친 떠 오르는 새해를 맞는다
이왕 이렇게 된 걸 천왕봉 턱밑의 해돋이도 장관이기는 마찬가지인데
너나 없이 해돋이 감상은 뒷전이고 셔터를 눌러대며 탄성을 지른다
사진을 찍어 달래랴 찍어주랴 위험마저 잊으니 무아지경이 따로 없다
최고봉 능선 위로 엷은 구름이 쏜살같이 지난다 어찌 저리도 빠를 수가
마치 느리게 찍어 빨리 돌리는 다큐멘터리 동영상을 보는 듯 생생하다
드디어 천왕봉에 올라 떠오른 해를 맞는다 아아 무언가 가슴을 울린다
감명도 잠시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에 밀려 인증샷 한 장이 쉽지가 않다
이토록 비좁은 장소에 인파가 몰리니 등돌리는 사람들의 배낭이 공포다
언 눈싸래기가 칼바람에 휘날리며 볼을 때리니 위험도 잊을 수 밖에 없다
와중에도 아우성치며 사진 찍는 사람들 제정신이 아니다 전쟁터가 이럴까
질서 잘 지키는 나라가 선진국이라면 오름 길 이곳 모두 선진국은 아니다
호연지기를 가슴에 품어보겠다고 올랐는데 이다지도 혼잡스런 상황 앞에
아연실색하다 보니 출발점에서 4시에 차단기를 열어준 그 사람들의 안전은
도대체 무슨 기준이었을까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감정이 이렇다 보니
엉뚱한 화풀이인지 작은애 한 키도 안 되는 표지석마저도 초라해 보인다
앞쪽 [지리산 천왕봉 1915m] 한라산 다음으로 높다 보니 전망이 시원하다
뒤쪽에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정말일까 그렇다고 생각해 둔다
눈만 좀더 쌓였으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그래도 오르길 잘했다는 뿌듯함이다
다만 이삼십 분도 머무를 수 없음에 짧은 시간 온몸에 기를 채우기 바쁘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좀 돌더라도 1808m 제석봉을 거쳐 하산을 시작한다
오른쪽에서 볼을 찌르는 칼바람을 피해 얼굴을 왼쪽으로 게처럼 내려온다
바람막이 큰 바위 아래 아늑한 곳에서 간식에 생강차로 허기진 배를 달랜다
천왕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잠시 쉬는데 따듯해진 느낌이 천국 같다
젊은 부부가 옆에 다가와 사진을 찍어 달라기에 잘 안 나오면 물러주겠다고
너스레를 떨며 정성을 들여 두 컷을 찍었는데 그 사진에 부인이 흡족해한다
부인의 환해진 얼굴을 본 남편이 보온병 마개를 돌려 한 컵 딸아 주길래
그냥 받아 마신 차가 따끈한 청주일 줄이야 겨울 산의 그 맛을 누가 알랴
인생사 행복이 뭐 따로 있겠는가 이렇게 오는 정 가는 정 나누며 사는 거지
길고 가파른 하산 길에 대비하여 장터목대피소에서 좌회전 하기 전 인증샷
그리고 약간의 간식에 물을 마시는데 날카로운 것이 입안을 예리하게 찌른다
칼바람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사이 물이 얼은 것이다 무슨 대수 그냥 마시자
눈이 두텁게 덮인 가파른 하산 길 아이젠도 때론 아슬아슬 미끄럼을 탄다
얼마인가 내려오니 눈과 얼음으로 덮인 계곡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반달곰 보호 안내판도 보인다 먹거리가 풍부한 어머니의 큰 품과 같은 산
얼어붙은 유암폭포 홈바위 법천폭포 중산리계곡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한다
무거운 다리를 추스르며 시작점에 도착하니 출발 시간이 다된 오후 2시다
짧지 않은 10시간의 지리산 천왕봉 해돋이 등산을 마치고 버스에 오른다
무질서하게 주차된 좁은 길을 빠져 나오느라 버스가 이리저리 애를 먹는다
맥주에 군밤 잠이 온다 모두가 고맙다 갑오년의 첫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014. 1. 1 갑오년 초하루 -자유인-
첫댓글 이사장님 산행후기 한편의 시나리오 입니다.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산 지리산 일출~
너무도 감동적이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