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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성모당
대구 성모당은 1917년 7월 착공하여 1918년 8월 15일 완공되었고, 10월 13일 축성되었다.
1911년 조선대목구에서 남방 지역을 관할할 대구대목구가 분리 · 설치되면서 부임한
초대 감목 안세화 드망즈(安世華, Florian Demange) 주교의 허원이 계기가 됐다.
안 주교는 수많은 치유의 기적을 보인 성모님께 소세 신부를 낫게 해주면
주교좌성당 증축 전에 성모동굴을 봉헌하겠다고 새로 약속했다.
소세 신부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자 1917년 7월 31일부터 성모동굴 공사를 시작,
1918년 8월 15일 공사를 마쳤고, 10월 13일에 성모당을 축성했다.
“회개하라”고 하신 루르드 성모님을 모셔 1918년 성모승천 대축일에 완성된
대구 성모당은 프랑스 피레네 산맥 북쪽 기슭 가브(Gave) 강가에 있는
루르드의 성모동굴과 크기는 물론 바위 모양까지 똑같다.
32. 성유스티노신학원
1914년 10월 3일 대구에서 개교한 신학교.
개교 이래 67명의 사제를 배출하면서 교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45년 3월 19일에 폐교되었다.
드망즈 주교의 노력으로 1914년 10월 3일 개교한 신학교는
기부자의 요청대로 학교 이름을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정하고,
첫 신입생으로 주재용 등 용산 성심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7명의
대구 대목구 소속 신학생들을 포함하여 57명을 받아들였다.
신학교의 학제는 용산 신학교와 같이 라틴어 교육 중심의
보통 교육 과정(소신학교 6년)과 철학 및 신학 과정(대신학과 6년)이었으며,
대신학과의 소신학과는 각각 2학급으로 구성되었고,
신입생은 3년마다 50명 내외를 선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18년 2월 23일에 주재용이
성 유스티노 신학교 출신의 첫 번째 사제로 서품되었다.
33. 성직자묘지
1915년 대구 교구청 내에 조성된 성직자 묘지이며,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이셨던 드망즈(안세화) 주교님이
교구 내 프랑스 선교사들을 위한 묘지로 쓰기 위해 조성한 곳으로,
이곳에는 초대 교구장인 드망즈 주교를 비롯한 7명의 주교와 6명의 몬시뇰,
63명의 사제와 2명의 차부제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묘지 입구에는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이는 ”그의 운명을 돌이켜 보며 네 운명도 같다는 것을 기억하라,
어제는 그의 차례요 내일은 네 차례다.“(집회 38.22)에서 따온 라틴어이다.
이곳에서 만난 순례객 중에는 전국 성지 순례 2번을 완주하고
3번 째 하고 있다는 순례자도 만났고
할아버지, 아들, 손자 3대가 함께 순례하는 모습도 보았다.
산티아고에서 만난 외국인 순례자 중에는 10번 이상 순례하는 사람도 있었고
장애인도 많이 보았다. 순례를 하면서 성령의 이끄심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 순례를 마친 사람들은 다시 순례하고싶은 마음이 드는 모양이다.
34. 새방골성당
대구 최초의 성당이자 대구대교구 순례지 성당
새방골은 와룡산기슭에 자리 잡은 작은 부락으로서
전설에 의하면 달성군 신당리 금호강하류에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돌풍이 불어 집이 날아와 떨어져
살고 있는 곳이 지금의 새방골이라 한다.
처음 함양조씨(1가구)가 개척하고 살았으나
임진왜란 때 왜란을 피해 진주강씨가 정착하게 되어
그로 인해 새로 집이 생겼다고 해서 새방골이라 한다.
그 후 함안조씨, 옥산전씨가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해서
경주이씨, 경주김씨 등이 모여들어 부락을 형성하고 ‘새방골’이라 칭했다.
오늘 2번째 순례지 신앙고백비에서 만난 김 루시아 부부는 천사였다.
초면인데도 오랜친구같이 친근한 모습이었는데,
당신들은 매주 토요일마다 성지순례를 한다고 했다.
집이 새방골성지 옆이라며 새방골에서는 숙소를 제공한다고 했다.
대구에 마땅한 숙소를 정하지 못했기에 새방골 성당에서 숙박하려고
순례를 하면서 몇 번 새방골에 전화를 해도 통화가 되지않아
루시아 자매에게 연락을 하니 4시경 집에 도착해서 알아보겠다고 했다.
4시경 전화가 왔는데 현재 성당 리모델링 공사로 자재가 들어가 있어
숙소제공이 당분간 안되니 자신의 집에서 묵으라는 것이다.
예수님(우리)을 만났으니 기꺼이 당신집에 모시고 싶다고해서 고맙다고 했다.
마지막 코스로 새방골로 정하고 그곳에서 주일미사(토)를 참례했다.
신부님이 미사 전 직접 성가지도를 하시는데, 70대 이상 되신 교우들이
성가를 잘 불렀다. 템포도 빠르고 힘차게~
루시아 자매께 물어보니 신부님이 교우들에게 잘 한다고 격려하며
열정적으로 사목을 잘 이끌어 가신다고 했다.
미사 후 공지사항 시간에 우리 부부를 소개하고 박수를 받았다.
공사때문에 숙소를 제공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씀과 함께~
루시아 자매(73세)집에 가니 방에 금침 이불을 펴놓았다.
서로 피곤하니 일찍 쉬자고 하여 잠시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방에 있는 책장을 보니 온통 영성서적과 성경필사노트였다.
그분들은 우리들이 예수님이라고 했지만, 우리가 임마누엘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아내의 말이 '그 동안 코로나라는 핑계로 우리집에 손님 잠자리 제공에 인색했는데
앞으로는 루시아부부처럼 기꺼이 제공해야겠다' 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방문 앞에 사과 20여개와 간식으로 먹으라고 떡을 싸 놓으셨다.
모범적인 신앙인 아니 천사를 만난 날이다.
책장 빈 공간에 5만원을 넣은 봉투와 감사의 편지를 남겼다.
2시간 후 순례중 전화가 왔다.
당신들은 지나가는 천사들을 모신 것인데 받을 수 없다며 돌려줄테니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강력히 요청하셨다.
정 그러시면 성당 리모델링하는데 쓰시라고 했더니
우리들 이름으로 봉헌하겠다고 하셨다.
제주에 도착해 밀감을 1상자를 보내드렸는데
맛있다고 하시며 감사의 표시로 순례책자를 보내주셨다.
새 책을 구입하여 보내려고 했는데 책방에 책이 없어서
당신이 보시던 책(견출지가 붙어있음)을 보내셨다.
정말 천사같은 분으로서 이웃 사랑이 넘치는 분이다.
김수환 추기경 생가에서는 신부님으로부터 책 선물도 받고,
신나무골 성지에서 점심을 먹는 중에는
신앙체험수기 소망상을 받게되었다는 연락을 교구청으로부터 받았다.
산티아고 순례 31일 여정 중에도 수 많은 천사들을 만난 기억이 있다.
특히 천사 개(엔젤)의 길 안내를 받은 일까지~
어려움이 있을 때는 항상 도움을 받고, 또 주기도 하면서
길고 힘든 순례길을 걸었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
분주한 순례길이었지만 단풍길과 억새꽃을 즐기며
천사들을 만난 은총의 하루였다.
35. 구룡공소
첩첩산중인 깊은 산골 구룡산 산정에 위치한 박해 시대 교우촌이다.
아마 1815년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 등지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처음에는 구룡산 바로 아래서 교우촌을 이루고 살다가 다시 박해를 만나자
이곳 구룡산 정상으로 올라와 교우촌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구룡 공소는 청도군 운문면 마일리, 정상리와
경상군 용성면 매남리 및 영천군 대창면 용호리와 경계 지점에 있는
구룡산(675m)의 산정에 위치한 깊은 산골의 교우촌이다.
진목정 공소와는 불과 15∼20km의 거리에 있다.
구룡공소의 특이한 점 2가지
첫째, 박해시대 교우촌이지만 단 한 명의 순교자도 없었다.
보통 배교자에 의해 교우촌이 발각되는데, 이곳은 배교자가 없어
발각되지 않고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둘째, 교우촌은 보통 옹기를 구워 팔거나 짚신등을 엮어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지만
이곳 구룡 교우촌은 천수답을 일구어 쌀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했고
인근 마을 주민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신앙생활을 했다.
한국 천주교 순례지 167곳 중에서 다녀오기 힘든 곳 중에 하나이다.
구룡공소는 들어가는 입구가 겨우 차 한 대만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좁아서
1.8km 거리를 반대편 차량과 마주치면 피할 수가 없다.
후진으로 한참 동안 절벽길을 운전하기가 쉽지않기 때문이다.
들어갈 때는 주일 아침 7시 20분 경으로 초행길이라 그냥 들어갔는데,
순례를 마치고 나올 때는 3분여 동안
들어오는 차와 마주치면 어쩌나 걱정이 많이 되어
마주치지 않게 해 달라고 둘이서 간절히 기도를 하면서 운전했다.
거의 입구에 왔을 때 마침 차 한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여서 걱정하는데
바로 옆에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유일한 공간이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공소에 도착해보니 공소에 오는 길이 2개 있었다.
우리가 들어간 길과 공소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다.
조금 우회하더라도 이암지와 구룡농원을 거쳐서 매남 4리 쪽으로
돌아오는 길이 도로 상태도 훨씬 양호하고 상호 교행간에
옆으로 피해줄 만한 공간이 곳곳에 빈번하게 있다고 한다.
36. 경주관아와 옥터
경주 관아와 옥터는 1815년 을해박해와 1860년 경신박해, 1868년 무진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천주교 신자들이 사학죄인으로 몰려
관장 앞에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던 곳이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허인백(許仁伯,1822∼1868,야고보), 김종륜(金宗倫,1819∼1868,루카),
이양등(李陽登, ?∼1868, 베드로)이 울산 장대벌에서 군문효수되기 전 체포되어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고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던 곳이다.
성건성당
방문한 시간이 9시 30분 경으로 주일 미사(10시 30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주에서 성지순례 왔다고 하자 한 자매가 신부님이 아래층 휴게실에 계시니
만나보라고 안내를 하여 신부님을 뵙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부님은 아프리카 선교를 다녀오셨다고 하며 당신이 쓰신 책에
직접 서명을 하여 우리에게 주셨다. 파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우리는 제주에 도착해 신부님께 귤 한 상자를 보내드렸다.
성당 입구에서 여러가지 식품을 팔고 있어서 젓갈류를 구입했다.
오늘 일정이 여유가 있어서 20년 만에 석굴암을 가고 싶었다.
불국사 근처에 가자 차량이 정체가 되었고 석굴암 오르는 길은
마치 주차장처럼 차들이 밀려 거의 움직이지를 않았다.
20여분을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U턴을 하여 진목정으로 향했다.
일요일이라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많았다.
석굴암 가다가 되돌아 오는데 1시간 이상 시간을 허비했다.
37. 진목정 성지
경주 건천읍을 지나 청도로 넘어가는 단석산 자락에
발이 닿으면 진목정 성지가 있다.
이곳은 125위 시복시성 대상자이기도 한 허인백(야고보), 이양등(베드로),
김종륜(루카) 세 순교자들이 박해를 피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바위굴(범굴)에 숨어 살았던 옛 신앙의 터전이며,
처형된 이들의 시신을 허인백의 아내 박조이가 옮겨 묻어
그들의 피로써 은총의 성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마치 그때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 듯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진목 공소에서 약 3.6km 떨어진 단석산(소태리 단수골)에는
세 순교자가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았다는 범굴이 있다.
내일 1리 마을을 지나 소태골 피정의 집에서부터 시작되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범굴에 이르게 된다.
이제는 무너져 내려 그 원형을 가늠하기 힘들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세 순교자와 그 가족들은 함께 기도하며
서로의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며 살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동굴은 본래 호랑이가 살던 굴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동굴에서 생활한 지 며칠 후
큰 호랑이가 나타나 위협했을 때 허인백 야고보가 나서서 성호를 그은 뒤,
“우리는 지나가는 길손인데 체면 불구하고 너희 집에 들어왔다.
매우 미안하지만 너는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고 동정하는 뜻으로
너희 집을 다른 데로 정해 가 있으면
박해가 끝나는 대로 너희에게 돌려주겠다.” 하자
호랑이가 물러갔다고 한다.
그리고 동굴 맞은편 산 중턱에 있는 큰 바위 위에서
밤중에 이따금 ‘어흥 어흥’ 하고 소리를 냄으로써
근처 다른 짐승들이 이들이 머무는 동굴에 침입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38. 살티공소 (김영제 묘와 김아가다 묘)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를 거치면서
간월, 죽림굴로 숨어들었던 시자들이 경상도 지역에 본격적으로 행해진
경신박해(1860년)와 병인박해(1866년)를 피해 더욱 안전한 곳을 찾다가
모여든 곳이 안살티(현재 청수골 주변)이다.
살티공소에서 500여미터 떨어진 김영제와 김 아가다 묘를 찾지 못해 30분을 헤맸다.
살티공소와 묘소의 화살표는 있는데 살티공소 화살표는 계속 있지만
묘소의 화살표는 도중에 없어진 것이다.
다른 순례객 2팀도 있었지만 우리처럼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주민에게 겨우 물어서 자동차길로 나가 겨우 묘소를 찾았다.
묘소에서 살티공소로 표시된 화살표를 보고 걸으니 살티공소가 나왔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집 담벼락에 화살표를 표시했던 안내판이
떨어져나간 흔적이 보였다.
그 표지판이 없어서 결국은 묘소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계속되는 길찾기의 시행착오를 겪는 오늘이다.
산들바람(점심)
아내가 오래 전부터 즐겨시청하던 유튜브 채널 산들바람 주방장을 만나고
직접 음식을 먹고 싶어 1시에 예약을 했지만,
일요일 단풍나들이 인파를 예상하지 못해 도로에서 시간을 까먹어
예약시간을 계속 미루었다.(1시 → 2시 →3시)
늦어도 3시까지는 와야한다는 업소측의 요구(3시부터 종업원 휴식)에도
부응하지 못해 사정을 해서 겨우 3시 30분 경에 업소에 도착했다.
통도사를 100미터 남겨두고는 아예 차가 움직이지를 않아
아내는 차에서 내려 뛰다시피 업소에 간 것이다.
허기도 지고 차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식욕도 나지 않았다.
막걸리를 한 잔 하고 나니 조금 안정이 되어 민어조기 정식을 시켰다.
밥을 먹고나서 오늘 일정 중 죽림굴을 내일로 미루고
아내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주방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도 함께 찍었다.
39. 언양성당
부산교구 유일한 석조고딕성당
언양 성당은 교구 내 가장 오래된 성당이며 인근 울산 장대를 비롯하여
순교 선열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순교자 후손들의 본거지다.
전국적 성소의 온상지로 7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
20여 명의 동정녀를 배출시켰으며 교구 내 가장 많은 공소를 둔 본당이다.
오늘 5일차 여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제 천사 루시아 자매를 만나 숙소를 해결하여 130,000원 짜리 호텔을 취소하고
2일 예정이던 대구 성지를 하루에 끝낼 수 있었다.
전주에서 하루를 벌고, 대구에서 하루를 벌어 이틀의 여유가 생겼다.
이제부터는 중간에 관광도 할 요량으로 오늘은 20여년 만에 석굴암을 가기로 했다.
경주관아와 옥터를 순례한 후 석굴암으로 향했는데 이것이 첫번째 실수였다.
일요일 관광객이 너무 많아 불국사 입구부터 석굴암 올라가는 길이
흡사 주차장같아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30여분 지체하다 포기하고 중앙선을 침범하며 U턴하여 내려왔다.
경주관아에서 출발한 것보다 1시간을 길에서 까먹은 것이다.
아내는 요리 유튜브 채널에서 본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시간상으로 1시경에 도착할 것 같아 예약을 했다.
그런데 진목정을 거쳐 살티공소를 가는 도중 석남사를 거치는 길에서
또 암초를 만났다. 단풍으로 유명한 석남사를 1Km를 앞두고 차들이
거의 움직이지를 않아 그곳을 지나는데 1시간이 지체되었다.
그 이후에도 길 양옆으로 차를 주차시켜 놓아 길이 온통 주차장이었다.
아내는 예약시간인 오후 1시를 전화로 계속 변경했다.
통도사 앞에 있는 산들바람은 오후 3시면 휴식시간이라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며 3시까지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런데 2시에서 3시로 변경하면서 제주도에서 왔는데 배려해 달라며
통사정을 하였는데 또 통도사를 500미터 앞두고는 아예 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3시가 넘자 아내는 통도사 100미터를 앞두고 내려서 걸어갔고
나는 역주행을 하면서 겨우 식당앞에 차를 주차했다.
교통경찰의 통제가 되지않아 통도사 앞 도로는 5방향에서 오는 차들이
뒤엉켜 흡사 실타래가 엉킨듯 풀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주에서 한적한 길을 운전하다가 오늘 겪는 도로상황은
서로 교통지옥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그 무리의 한 인간이 되고 만 순간이었다.
겨우 3시 반에 도착해 배가 고프다 못해 허기진 몸으로
주방장(유튜브 채널 운영자)이자 실제 간판스타인
김숙희 주방장(아내 이름과 같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차려내 온 점심겸 저녁을 먹었다.
종업원들이 쉬는 시간이라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주방장을 불러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기념사진을 찍고 판매하는 몇 가지(된장,젓갈 )를 구입했다.
죽림굴은 내일로 순례를 미루고 숙소가 있는 언양성당을 둘러보고
숙소로 향했다. 너무나 피곤한 하루였지만 언양에 온 이상
언양불고기는 맛 보아야 할 것같아 음식점으로 가서
안주삼아 술 한 잔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숙소 SS모텔(6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