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드덟은 탑정호에 600m 길이의 출렁다리가 개통되어 논산 11경 중 하나에 꼽혔다.
지자체에선 ‘탑정호 소풍길’, 또는 ‘탑정호 수변 생태길’이란 이름으로 정비를 해놓았다.
거기다 이 탑정호를 아우르는 나즈막한 봉우리도 있어 ‘봉따묵기’ 산꾼들마저 불러 모으기에 부족함이 없다.
‘탑정호 소풍길’은 1코스~6코스로 나뉘어져 있으며, 종주코스는 전체 19km(8시간)이다.
여기에다 산봉우리들과 유적지 답사를 겸한다면 거리와 시간이 늘어날 터이니 아무래도 개인 취향과 체력에 맞게 나누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돈암서원에서 출발하여 수변생태공원으로 내려서는 ‘3코스(세계문화유산 탐방길)’를 시작으로 ‘2코스(대명산 일출길)’, 다시 ‘1코스(하늘호수길)’를 걸었으니 역순인 셈이다.
이 코스에는 4개의 나지막한 봉우리가 있어 어렵지 않게 4봉을 오르기도 했다.
우리 버스는 ‘돈암서원’입구인 ‘논산 한옥마을’ 앞에 멈추었다.
여기서 ‘돈암서원’까지는 300여m의 가까운 거리.
우리는 이곳으로 오를 것이지만 다른 회원들은 모두(A·B) 제각각의 곳으로 이동할 것이다.
‘돈암서원(遯巖書院 사적 제383호)’은 1634년에 창건되었으며 기호학파의 거두인 김장생의 위패를 모셨다.
1660년(헌종 1년) 사액을 받았으며, 김장생의 아들 김집을 비롯, 송시열과 송준길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충청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돈암서원을 바삐 둘러본 후 바로 산길로 접어들면 얼마안가 수락산에 오르게 된다.
‘수락산(首落山 167.2)’은 예전에 이칭·별칭으로 충혼산(忠魂山)·충훈산(忠勳山)으로도 불렸고, 이 산에서 백제 ‘계백 장군’의 머리가 떨어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남쪽에는 ‘계백 장군 묘’와 ‘충장사’, ‘백제군사박물관’이 있고, 서쪽에는 ‘충곡서원지’가 있다.
‘고정산(高井山 145.8)’은 아랫마을 ‘고정리(高井里)’에서 옮겨온 이름인 듯하다.
예전, 고정리에 큰절이 있어 ‘붉절골’ 또는 ‘적사곡(赤寺谷)’이라 하던 것이 ‘거절터 또는 ’거정터·거정치·거정대‘로 변한 데서 유래되었다.
그래도그렇지, 이름을 그대로 직역하면 산꼭대기에 물이 나는 샘터라도 있었음직한데.
고정산을 내려서면 고려시대 마애불인 ‘신풍리마애불(論山新豊里磨崖佛 충남 유형문화재)’이 있고 그 아래 ‘영사암(永思庵)’이 있다.
영사암은 광산김씨의 사우로 쓰이고 있으며, 1875년(고종 12) 다시 고쳐 지었다고 한다.
‘휴정서원(休亭書院)’은 조선후기에 건립된 서원으로 김장생의 친족과 그의 학통을 받은 문인들만을 제향한 서원이다.
‘돈암서원’과 별도로 다시 그의 친족 문인들로 구성된 휴정서원이 세워진 것은 돈암서원에 대한 수호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대명산(大明山 181.2)’ 이름의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탑정호 위로 휘엉청 달이 밝았거나 산위에 오르면 탑정호 주위 풍광이 막힘없이 잘 보여 불려지는 이름인 듯하다.
그래선지 지금도 ‘해맞이’를 하는 산으로 알려져 있다.
‘봉황산(鳳凰山 128.4)’은 산 모양이 봉황과 같이 생겼다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이 산에는 봉황산 산신령 덕으로 출세한 아들과 그 홀아비에 관한 전설이 전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봉황산을 찾아 기도를 하고 있다한다.
산행코스: 1)+2)=총 14km(4시간 30분) * 사진 분량이 많아 1),2)로 나누어 올렸다.
1) 돈암서원-수락산-충곡서원갈림길-계백장군묘-충장사-황산루-고정산-신풍리마애불-영사암-휴정서원(5km, 2h)
2) 휴정서원-탑정호 수변공원-공동묘지-대명산-출렁다리-봉황산-음악분수주차장-제방길-부도탑-데크-북문2주차장(9km,2.5h)
궤적.
약 14km에 4시간 30분.
고도표.
탑정호 소풍길.
안내판. 탑정호소풍길 1~6코스(종주 19km, 약 8시간)
계백혼이 살아 숨쉬는 '솔바람길'.
미리 준비한 표지기.
세계유산에 오른 '한국의 서원'은 모두 9개.
논산 한옥마을 앞에...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돈암서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부감법으로 그린 돈암서원 <이호신 화백>
홍살문을 지나...
2층 누각인 '산앙루(山仰樓)' 앞에 섰다. '山'자가 '坐'자를 닮아 잠시 머엉~
'山仰樓' 맞넹. 누각에 오르면 '산이 우러러 보인다'는 뜻이리라.
외삼문인 입덕문(入德門) 현판은 송시열의 글씨라고 알려져 있다.
담장 아래엔 비석과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들여다 보았다.
연산돈암서원지비.
'황강김선생정회당사적비명(黃岡金先生靜會堂事蹟碑銘)'.
'헌성금록(獻誠金錄)'.
외삼문을 들어서자 좌측에 정면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에다 누마루가 깔린 '응도당(凝道堂, 보물 제1569호)'이 있어...
가까이 다가가 대청에 걸린 '돈암서원'현판을 올려다 보았다.
돈암서원 응도당은 유생들이 공부하던 곳이다.
1880년(고종 17년) 서원을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 옛터에 남아 있던 것을 1971년에 옮겨서 지었다.
기와에 씌어 있는 명문으로 보아 1633년(인조 11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자료인용>
'정회당(靜會堂)'은 김장생의 아버지 '황강 김계휘'가 천호산 고운사에서 수학하던 건물로 1954년 돈암서원으로 옮겨졌다.
정회당 현판. 낙관엔 ‘의성김예산팔세경서(義城金禮山八歲敬書)’라고 새겨져 있다.
여덟 살 아이가 쓴 글씨라니...
'정회(靜會)'는 유생들이 수행하는 방법 중 하나로 고요하게 몸소 실천하며 수행한다는 뜻.
‘장판각(藏板閣)’은 조선시대에 목판본 인쇄를 위해 제작하였던 목판이나 책판을 보관하기 위해 별도로 지었던 건물.
돈암서원 장판각엔 김장생의 '사계전서', 그의 부친 김계휘의 '황강실기', 그의 아들 김집의 '신독재전서' 등이 보관되어 오고 있다.
담너머 까치발을 하고 숭례문 현판을 잡았다.내삼문 담벼락엔 꽃담이 가꾸어져 있다.
전서체 '서일화풍(瑞日和風)'은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단비, 즉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
우측 붉은 글씨 '약례(約禮)'는 예의에 맞게 행동하라.
돈암서원 꽃담 안내판.
양성당(養性堂)은 김장생이 서재로 사용했던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에다 장대석으로 2단의 기단을 쌓고 홑처마 팔작지붕을 올렸다.
5칸 모두 방을 들이고 가운데 3칸 앞면에는 전퇴를 두었다.
원래 연산면 임리 숲말에 있던 것을 사계천이 홍수로 범람하는 바람에 1880년(고종17)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양성당(養性堂) 현판.
김장생은 본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다.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계휘(繼輝)의 아들이며 집(集)의 아버지이다.
김장생은 창릉참봉(昌陵參奉)과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 등을 거쳐 정산현감(定山縣監), 안성군수, 익산군수, 철원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형조참판(刑曹參判)의 자리에 올랐다.
인조(仁祖) 때 정원군(定遠君)의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고 북인(北人)이 득세하자 연산(連山)으로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아들 집과 함께 예학(禮學)의 기본적 체계를 완성하였다.<자료>
광산 김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63명(문과 갑과 장원급제자 12명), 정승 5명, 대제학 7명, 청백리 4명, 왕비 1명을 배출했다.
양간공파 대사간 김극뉴(金克忸)의 현손인 김장생(金長生)이 문묘에 종사되었고, 그의 아들 김집(金集)은 문묘와 종묘에 배향되었다.
김장생 후손 중에 대제학이 7명이나 배출되었으며, 증손자인 김만기(金萬基)와 김만중(金萬重) 형제가 대제학에 올랐다.
김만기의 아들 김진규(金鎭圭)도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고, 그의 아들 김양택(金陽澤)도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냈다.<광산김씨 족보>
‘돈암서원 원정비(遯岩書院院庭碑)’는 돈암서원을 세우게 된 배경과 서원의 구조를 남기기 위해 건립한 비석이다.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의 학문과 성품을 칭송하는 글도 새겨 놓았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서 ‘연산돈암서원지비(連山遯岩書院之碑)’라 새겨져 있다.
서재인 정의재(精義齋).
정의재의 현판.
'정의(精義)'란 자세한 의의라는 뜻으로 유생들이 경전의 의의를 자세히 강론하던 곳.
동재인 거경재(居敬齋).
거경재 현판.
거경재는 유생들의 학습공간으로 '거경(居敬)'은 성리학의 수양방법 중 하나로서 우러르고 받들며 삼가 조심하는 태도를 말한다.
돈암서원 답사는 정해진 시간에 계획한 코스를 완주하기 위해선 주마간산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수락산을 오르기 위해 돈암정사 좌측 담벼락을 꺾어 오른다.
곧 만나는 이정표의 백제군사박물관을 따른다.
잘 가꿔진 무덤 아래로...
우람한 산세가 눈에 들어온다.
진행하면서...
좌측 잘 가꿔진 가족묘지 위로 자꾸만 빼앗기는 눈길.
충곡서원 갈림길 이정표. 충곡서원 충곡사에는 계백장군과 상삼문 등 사육신과 충절인 18위가 배향되어 있다한다.
낮은 구릉형 산지는 걷기에 수월하다.
솔바람길은 '돈암서원-충곡서원-계백장군묘,백제군사박물관-휴정서원(6.2km,2시간)'이다.
수락산에 올랐다. <by 치술령>
표지기를 달고...
내려서니 팔각정자.
백제군사박물관정문 갈림길이다. 우리는 휴정서원 방향이지만...
이곳에서 간단 요기를 하기로 했다. 양지바른 광산김씨 할머니 묘 앞.
임도에 내려서서...
우측 정자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자...
걷쥬 스템프 투어는 돈암서원~휴정서원.
정자에서 바라보는 널따란 골짜기를 ‘가장(假葬)골’이라 부른다. 이는 계백장군의 시신을 가매장한 곳이라 불리는 이름.
계백장군묘 앞에서 안내판을 훑어본다.
554년 성왕(聖王)이 관산성(管山城)에서 전사한 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641년 의자왕(義慈王)이 즉위한 뒤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여 신라를 자주 공격했다.
그러나 의자왕의 실정과 고구려의 국내 문제로 인해 두 나라의 동맹이 소극적으로 변하자 백제의 위기는 점차 현실화되었다.
결국 660년(의자왕20) 소정방(蘇定方)과 김유신(金庾信)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과 백강(白江)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의자왕은 계백에게 5천 명의 결사대를 주어 김유신이 거느리는 5만 신라군을 막게 했다.
일당백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4번을 싸워 이겼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대패하여 계백과 수많은 백제군이 전사했다.
이 황산벌전투로 백제는 비운의 종말을 맞았으며, 계백장군은 통한을 품고 이곳에 묻혔다.
백제계백장군지묘.
충장사(忠壯祠)는...
계백장군과 5천 결사대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중앙은 신도(神道)로서 귀신(神)이 다니는 길이고, 중앙 좌우로 난 길이 참배객들이 우입좌출(右入左出)하는 길.
그러니까 들어갈 때는 우측길, 나올 때는 좌측길이라는 말씀. 열심히 설명하는 한덤 님. "단디단디, 가로 나오이소~"
사당의 문도 중앙은 신이 드나드는 문.
장군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백제군사박물관은 시간의 제약상 패스다.
돌계단의...
이정표 뒤로 오르면...
2층 누각인 황산루.
현판은 2010년 4월 8일 논산시장 일화(一和) 임성규(林聲奎).
황산루에서 내려다 보는 곳. 황산벌인가?
20m 위에 황산벌전적지 전망장소가 있다.
황산벌 전적지 안내판.
휴정서원 방향.
솔바람길을 따르면...
고정산터널 위.
솔바람길 안내판.
곧 이정표가 있는 지형도상 고정산에 오른다.
이정표는 0.3km 방향에 고정산(하산로 없음.돌아오세요)이라고 되어 있지만...
나는 지형도상의 고정산에 준비해간 표지기를 걸었다. 사람도 호적이 중요하듯 지명은 지형도가 중요한 법.
조금 내려서자 봉수사 마애불 점안법회를 연다는 현수막이 붙어있다.
마애불은 자연암반에 새겨진 불상이다.
이 곳은 원래 영사암(永思庵)이 있었던 곳.
불상의 얼굴은 사각형이지만 친근감 넘치는 소박한 모습이다.
‘논산 신풍리 마애불(論山新豊里磨崖佛,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54호)’은 높이 3.5m의 고려시대의 불상이다.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肉髻)가 높이 솟아 있고, 미간에는 백호(白毫)의 흔적이 남아 있다.
눈은 반타원형으로 길게 반개하였으며 코가 넓적하고 입은 얼굴에 비해 매우 작은 편이다.
귀는 어깨까지 늘어지고 비대한 목에는 삼도(三道)가 가늘게 음각되었다.
이목구비는 선각으로 얕게 표현하였고, 다소 서투른 조각 수준이나 친밀감이 느껴지는 불상이다.
두 손은 앞가슴에서 모아 마주 잡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어깨가 유달리 좁고 일직선에 가까운 체구를 이루고 있다.
착의 형식은 통견(通肩)으로 암면이 고르지 못해 군데군데 탈락되어 명확하지는 않다.
옆면에는 기도를 드리는 곳인 듯 반석이 놓여져 있다.
바로 밑에 4칸 팔작지붕의 영사암이 있어...
안내판을 훑어본다.
‘논산 영사암(論山永思庵,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9호)’은 조선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과 김겸광 형제가 3년간 부모님 무덤을 지키던 자리에 세운 암자로 현재는 광산 김씨의 사당으로 쓰이고 있다.
성종 6년(1475)년에 세웠으며 그 당시에는 26칸의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4칸만 남아있다.
영사암은 암자를 겸한 집으로 세웠으며, 승려를 두고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성종 6년(1475)년에 세웠으며 처음 26칸이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고종 12년(1875)에 지은 조선 후기의 건물이다.
영사암을 내려서자 드넓은 탑정호가 바다처럼 펼쳐진다. 마을 좌측에 휴정서원이 있어...
홍살문과 솟을 삼문을 들여다 본다.
휴정서원은 1700년(숙종 26)에 창건, 1705년(숙종 31)에 준공하였으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1919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그러다가 1944년 탑정저수지 완공으로 수몰될 처지에 몰려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단제를 지내왔고 1984년에 사우를 복원하였다.
전체적인 건물은 4동으로 사우·도현각·내삼문·외삼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삼문 안에는 1944년 설치된 단소가 있다.
휴정서원의 문은 잠겨있어...
담너머로 카메라를 밀어 넣었더니 도현각과...
내삼문이 잡힌다.
안내판엔 숙종 26년(1,700년)에 창건한 뒤 숙종 31년(1,705년) 준공하여 '휴계 유무선생'을 주향으로 봉안하였다.
그후 1985년 현재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1534∼1599)’ 선생을 주향으로 8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한다.
휴정서원 원장 공적비.
'솔바람길'의 유적지.
이어지는 ☞ 2) 탑정호 수변공원·탑정호 출렁다리,대명산,봉황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