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을 둘러 본 우리들은 비봉로에 위치한 돼지고기김치찌개와 두부전골을 전문으로 하는 '전주식당'으로 이동해 점심을 먹었다. 전골이 생각보다 매워서 배탈이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식사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지역에서 나는 산나물로 만든 정갈한 반찬을 곁들여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한 다음, 커피를 한잔 하고는 인근 자작나무 숲이 유명한 인제군 남면 수산리로 갔다. 추운 곳에서 잘 자라는 자작나무는 한반도에서는 개마고원 일대에 많이 자생한다. 그곳에서는 자작나무 집을 짓고, 기와대신 나무껍질로 지붕을 인다. 또한 자작나무 장작으로 난방을 하고 밥도 해먹었다.
어두운 밤 자작나무 기름을 이용하여 길을 밝히고, 야생 삼을 캐면 나무껍질에 싸서 소중하게 보관한다. 더운 여름날이면 밥이 상하지 않도록 나무껍질로 감싸 보관하기도 한다. 인생을 마감할 때도 자작나무로 관을 만들어 땅에 묻는다. 껍질로 시신을 감싸 미이라를 만드는 풍습도 있었다고 한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그림의 재료가 자작나무껍질이며, 팔만대장경도 일부는 이 나무로 만들어졌다. 하얀 나무껍질과 특이한 수형, 버릴 것 하나 없는 다양한 쓰임 덕분에 숲 속의 귀족 또는 여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도도하고 기품이 있는 귀족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자작'의 품계를 받은 나무라는 뜻에서 자작나무라고 불린다고도 있다.
하얀 껍질을 얇게 벗겨내어 불을 붙이면 껍질의 기름성분 때문에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잘 탄다고 자작나무라고 불린다는 이도 있다. 또한 자작나무 숲 속을 거닐면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소리가 자작자작 거린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아무튼 종이가 귀하던 시절에는 새하얀 껍질을 잘 벗겨서 아름다운 사랑의 편지를 써 보내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사랑나무로 알려져 있다. 수액은 식용하거나 술로 만들어 먹는다. 곡우 때 줄기에 상처를 내어 수액을 마시면 무병장수한다고 하여 봄이면 수액을 모으고자 사람들이 몰린다.
최근 우리가 자작나무를 주목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작나무, 떡갈나무, 옥수수, 벚나무, 채소 등에서 추출한 천연 소재의 감미료를 자일리톨이라고 하는데, 그 중 자작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자일리톨을 최고로 치고 이를 이용한 껌이 만들어져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부터다.
자일리톨이 충치예방에 탁월한 성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작나무에 기생하는 상황버섯과 말굽버섯은 폐암에 효과가 큰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동유럽과 북아시아의 슬라브족은 자작나무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신이 준 최상의 선물로 여겨 울타리용으로 자작나무를 심어 나쁜 기운을 막기도 했다.
추운 지방에 크기 산불 낫던 곳이나 사방지, 붕괴지, 비옥하고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라는 자작나무는 내한성이 강하고 햇볕을 좋아하며 생장이 빠른 편이다. 자작나무 숲을 주요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인제군은 최근 원대리 원대봉 자락 25만㎡에 숲속교실, 목교, 안내판, 탐방로, 화장실 등 시설을 갖춘 자작나무 명품 숲 조성을 완료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우리가 간 남면 응봉산 수산리의 자작나무 숲길은 임도를 따라 걷는 길이다. 당일은 무척 눈이 많아 와서 눈길을 걷고 자작나무 숲을 보는 것만으로도 대 만족이었다. 길을 따라 가로수로 심어진 살결 하얀 자작나무들이 힘차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자작나무는 껍질이 흰색이라 무척 깔끔하고 정순한 귀부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추운 겨울 날 회색코드를 입은 여인처럼 기품 있고 고결하다. 여기에 희고 긴 종아리를 드러낸 모습이 안쓰러움까지 느껴지게 하는 묘미가 있다. 흰 목덜미는 학처럼 고고하지만 애틋하기도 하다.
수산리의 자작나무들은 산비탈 높은 등성이에 조림수로 심어져서 줄을 지어 나란하게 일자로 박혀 있다. 흐린 날이었지만 나무 틈새로 간간히 청명한 햇살이 비켜지나간다. 카메라를 들면 이내 햇빛은 도망가고 가녀린 은빛속살만 보여주고 만다. 이어 바람이 불어오면 잔가지들은 어린아이처럼 여리게 몸을 떤다. 겨울바람에 내 몸도 자작나무의 가녀린 가지들도 추위에 몸을 떤다.
자작나무는 껍질은 연약하지만 속은 무척 강하다. 숲 속에서는 바람과 함께 자작자작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수산리의 자작나무는 180만 그루가 넘는다. 제지회사가 1986년부터 1995년까지 600ha에 달하는 응봉산 12골짜기에 180만 그루를 심었다. 아직 성목은 아니지만 제법 자리를 잡은 큰 놈은 밑동 지름 20cm, 키 15m쯤 되어 당당하다.
자작나무 숲을 걸으면 연한 나무향기가 코를 살짝 건드리며 스쳐간다. 감기에 걸린 사람도 박하사탕을 입에 문 듯 코와 목까지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작나무 껍질에서 자일리톨 향이 나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들은 인제자연학교에서 출발하여 수산리 전망대를 돌아 참막골을 거쳐서 자연학교로 돌아오는 3시간 정도의 눈길을 걸었다. 자작나무 숲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 전망대가 있는 해발 580미터 고지까지 올라갔다.
산이 깊고 숲의 규모가 큰 탓에 숲 안으로 들어가서 숲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도 방법이지만, 높이 올라 숲 전체의 풍광을 내려다보는 것이 훨씬 보기에 좋다. 응봉산 둘레를 크게 돌면서 조성된 임도를 따라 한 시간 넘게 올라가며 좌우의 자작나무들을 보면서 오르면 이내 전망대에 다다른다.
1996년에 조성된 응봉산의 임도는 산허리를 끼고 8부 능선까지 돌면서 올라간다. 눈이 많이 와서 미끄럽다는 것을 제외하면 예전 시골의 신작로를 걷는 것처럼 편안한 길이라 산악 트레킹코스로 그만이다. 임도 정상부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자작나무 숲은 보는 것만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신비하고 경이로운 모습이다.
추위와 찬바람에 나뭇잎은 전부 지고 하얀 속살을 드러낸 자작나무줄기가 겨울의 눈빛과 만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절묘한 풍광을 만들었다. 설악산 자락까지 첩첩히 이어진 산세가 보기에도 시원스레 펼쳐진다. 저 멀리 한반도의 지형을 닮은 자작나무 숲이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산을 내려오면서 눈길을 신나게 걷고 멋진 장관을 보아 기분이 좋았다. 수산리 입구에는 오토캠핑장이 있어 자동차를 가지고 가족단위 캠핑도 가능하다. 펜션도 곳곳에 있어 겨울 눈 구경을 겸한 트레킹도 가능할 것 같다. 아울러 인근에 '산촌민속박물관'과 '박인환문학관' 등이 있어 볼거리도 많다고 한다.
당일치기로 짧게 양구와 인제를 방문했지만, 박수근미술관과 자작나무 숲의 모습은 오랫동안 가슴 속에 남을 듯이 좋았다. 연우가 방학 중인 1월 중순경 가족여행으로 한 번 더 가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