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바람
요한복음 3:6~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한복음 3:8)
찬송가 580장(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182장(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성령은 바람과 비유되고 있습니다. 본래 성령의 단어가 히브리 말로는 ‘르아흐’요 헬라어로는 ‘프뉴마’인데, 이 두 단어 모두 동일하게 성령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바람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우연치고는 그 일치성이 묘합니다. 성경을 기록한 이 두 단어가 동일하게 바람과 성령을 한 가지로 연상시키고 관련시키는 것이 독특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예 성령에 의하여 거듭난 사람의 삶의 방식이 아예 바람과 같은 면이 있다고 설명함으로써 이러한 연관이 단지 우연한 일치가 아니라 본질적인 면에서 일치성이 있다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면 성령과 바람은 어떤 점에서 일치점이 있습니까?
첫째로, 그 신비성이 일치합니다.
바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존재성은 분명히 있습니다. 활동성도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도 눈에 보이지 않고 감각적으로 성령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 역시 바람처럼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활동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바람이나 성령이나 신비한 면이 있습니다. 그 정체를 다 알 수 없고 완전히 장악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토네이도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토네이도를 평생 따라다니면서 그 발생한 장소를 기록하고 토네이도의 궤적을 추적하고 토네이도를 실제로 추적하는 차를 타고 따라가기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토네이도를 추적해온 사람들도 여전히 완전하게 예측력을 가지고 토네이도의 발생을 예고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령의 활동은 아무리 오랫동안 연구하고 추적하고 알아온다 해도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도 그 누구도 절대로 다 알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바람처럼 예측 불가능하고 그의 활동 역시 신비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주권성이 일치합니다.
바람이 불고자 하는 방향이 있다면 바람이 그렇게 부는 것입니다. 남으로 불고 싶으면 남으로 불고, 북으로 불고 싶으면 북으로 불고, 서로 동으로 부는 것은 다 바람 자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누가 바람을 명하여 서쪽으로 불어라, 누가 바람을 명하여 남쪽으로 불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람은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습니다. 그 스스로의 뜻을 따라 바람이 자기 원하는 대로 불고, 자기 스스로의 뜻에 따라 바람이 그치고 숨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 역시 하고자 하는 대로 일하십니다. 성령께서 그 원하는 사람을 택하여 그 원하는 사역으로 부르시고 그 뜻한 바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 사람에게는 이러한 은사를 주고, 저 사람에게는 저러한 은사를 주어 일하게 하십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에게는 다리를 고치는 은사를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암을 고치는 은사를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우울증을 고치는 은사를 주어서 그 병을 고치는 일에 큰 효력을 나타나게 합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를 따질 수 없습니다. 성령이 그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그렇게 하셨으니까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방인에게 선교하는 일을 맡기고 베드로에게는 유대인에게 선교하는 일을 맡기는 것이 성령의 주권에 달린 일입니다. 빌립 집사님이 사마리아에서 한창 복음을 증거하며 병을 고치며 사역할 때인데 갑자기 성령께서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명하여 순종하였더니 거기에 에디오피아 국고를 맡은 내시가 가마를 타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지시를 따라 가까이 가서 전도하여 세례를 주었더니 그 일을 계기로 하여 에디오피아가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독교 국가로 남아 있습니다.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에 순종하였기에 그 열매가 지금까지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바람과 속성과 같은 이 성령의 주권성을 명심하고 항상 순종하는 자가 될 때 성령의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 그 생명성이 일치합니다.
식물을 기를 때에 통풍이 중요합니다. 바람이 통하지 않으면 식물이 건강하게 자라지 않습니다. 바다도 바람이 불어 파도가 치고 해류가 움직이지 않으면 바닷물에 산소가 고갈되어 바다가 썩습니다. 바람이 불어서 논밭의 벼나 옥수수 등을 흔들어 주어야 병충해를 이기고 뿌리가 견고해져서 결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람은 생명을 진작시키고 살리는 일을 합니다. 이처럼 성령도 역시 영혼을 깨우고 살리며 생명성을 진작시키는 일을 합니다. 성령은 사람의 죽은 영혼을 깨우고 거듭나게 합니다. 완전히 세상에 빠져서 소생할 기미가 없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도 성령이 불어와서 흔들어놓으면 완전히 살아나고 힘있는 영혼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영으로 에스겔 선지자를 이끌고 마른 뼈가 가득히 누워 있는 골짜기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이 뼈들이 살겠느냐고 묻습니다. 보니까 전쟁하다가 칼에 맞아 죽어서 무덤에 묻어주지도 아니하여 그냥 햇볓에 다 삭아버려서 뼈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상태인데 그 뼈들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 뼈들에게 생기가 들어가 살아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선지자를 통하여 바람을 명하여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고 하였더니 놀랍게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도저히 소망 없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성령이 임하시면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죽은 자가 펄쩍 펄쩍 뛰는 사람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은 그 안에 생명이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예루살렘 마가 다락방이 성령이 강림하실 때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 집에 가득했던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실제로 성령이 강림하실 때에 그 방안에는 영적인 하늘 문이 활짝 열리고 강력한 태풍과 같은 바람을 몰고 성령께서 강림하셨음이 분명합니다. 그 성령님은 바람처럼 강력한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다 죽은 것 같았던 갈릴리 제자 공동체를 완전히 살려내서 세상을 뒤집어 엎는 생명의 폭풍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신비하여 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고 분명히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주권자 하나님이시기에 그의 뜻에 대하여 누구도 반박할 수 없고 다만 겸손히 순종할 따름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능력으로 충만하신 분이라서 그 성령 바람에 휩쓸리면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무력증이 사라지고 완전히 살아 움직이는 활력이 충만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령의 바람에 사로잡히는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급하고 강한 바람을 타고 다시 한번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기를 사모합시다.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그 주권적인 뜻을 가지고 그의 임의로 우리를 인도해가시기를 갈망합시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가는 곳마다 일으켜 모든 이들을 영적으로 살리며 세우며 육적으로도 번성케 하는 복된 역사가 우리를 통하여 일어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