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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인 이천이십년 봄호 50(2021.10.18.)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이 계절의 언어_문효치: 꽃은 시 속에서 어떻게 피고 있는가
우리는 꽃을 좋아한다. 그 빛깔, 모양, 향기 등 꽃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
과거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사군자라 해서 숭상하기도 했다. 그 사군자 주 대나무를 빼고는 모두 꽃이다. 퇴계 이황 선생이 타계하기 전에 맨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저 매화나무에 물 줘라 였다고 한다.
꽃은 식물학적으로 보면 나무나 풀의 생식기관이지만 일반 사람들은 그보다도 심미적 대상으로 완성한다. 시나 그림에 등장하는 꽃들은 거의가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존재하고 있음이다.
나는 6.25전쟁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 전쟁이란 말 그래도 참혹과 살벌, 그리고 인간의 내적 외적 파괴 행위다. 그 결과는 죽음과 가난과 불행이다. 우리나라가 전쟁의 한 가운데 놓여 있던 그 시절 나는 어머니를 따라 벽촌의 어느 농가에서 피난살이를 하고 있었다. 공포와 극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던 마을, 그러나 옹기종기 모여있는 몇 안 되는 작고 허름한 초가집 앞뒤뜰에는 모두 화초를 심어 기르고 있었다. 분꽃, 봉숭아, 채송화, 접시꽃, 해바라기 등이 전쟁과는 아무 상관없이 피어 있었다.
그들은 왜 전쟁과 기아의 황망함 속에서도 돈이 되는 것도 아니요 밥이 되는 것도 아닌 꽃을 심고 가꾸었을까? 왜 그 꽃들에 바가지로 물을 퍼다 부어 주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한다는 그 한마디 외에 무슨 이유를 댈 수 있겠는가.
송강 정철은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라고 했다. 아마도 자원방래한 유붕과 반갑게 술을 마시고 있었을 터이다. 그때에 꽃을 참여시키는 심미안이 대단하다. 하기야 이백도 양인대작 산화개라 하지 않았는가. 두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는데 마침 산꽃이 피어 아는 체하는 장면이다.
시인들은 그 시 속에 꽃을 들여 피우기 마련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누님 같이 본 서정주나 난초 잎에 꿈이 온다고 노해한 정지용, 코스모스를 모자 쓴 소녀 같다고 한 김형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민들이 그들의 시 속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꽃들을 많이 들여놓고 있다.
그런데 위에 쓴 시인들은 꽃의 마음을 들여다보거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꽃, 그것도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작품이다. 그렇다면 그 생명이 매우 소중하고 무슨 뜻이 있을 것이다. 뜻이 있다면 생각도 있을 것이고 생각이 있으면 할 말도 있을 것이다.
시인은 그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꽃의 겉모습이 아닌 속에 내장된 비의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지훈의 낙화2는 음미해 볼 만한 시다.
피었다 몰래 지는/고운 마음을/흰 무리 쓴 촛불이/홀로 아노니/꽃지는 소리/하도 가늘어/귀 기울여 듣기에도/조심스러라/두견이도 한목청/울고 지친 밤/나 혼자만 잠들기/못내 설어라
조지훈은 꽃의 마음을 알아보고 있다. 꽃 지는 소리는 하도 가늘어서 잘 들리지 않겠지만 시인은 그 의미까지도 알아내고 있다. 꽃은 왁자하게 또는 시끄럽게 피는 꽃도 있지만 남몰래 가만히 피었다 다소곳이 지는 꽃도 있다. 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뜻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어느 해던가 공주 공산성에 간 일이 있다. 그곳은 옛 백제의 궁궐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이 거의 없다. 어쩌면 의미가 사라져 버린 허무한 공간이다. 거기에 피는 들꽃은 왜 하필 거기에 자리 잡고 피어 있을까. 허무를 말하고자 함이었을까. 권력의 무상함을 말하고자 했을까.
그 꽃의 속내가 매우 궁금했다. 신은 왜 하필 이 시절에 이 꽃을 여기에 있게 했을까. 꽃의 말을 들어 보고 싶었다. 하공중에 흩어진 날아다니고 있는 꽃의 말을 듣기 위해서는 안테나를 뻗어 날아다니는 음파를 잡아야 한다. 희미하게 겨우 들어 볼 수 있는 소리, 나에게 의미 부여 하지 말아라 그냥 자유롭게 있다가 다시 먼지가 되어 흩어질 것인 즉 나는 이 말을 시로 만들기 위해 낑낑대다가 공산성의 들꽃이라는 시를 쓴 일이 있다.
장미, 백합, 난, 국화 이런 유명한 꽃만이 아니다. 개망초, 좁쌀냉이, 땅빈대, 쇠비름, 며느리밑씻개, 방동사니 같은 들풀의 꽃도 꽃이다. 그들도 똑같은 신의 작품들이다. 공원의 시멘트 계단을 오르다가 갈라진 틈새에 연약하게 피어난 들꽃을 보았다. 그의 처지에서 보면 최악의 환경에 살고 있는 것이다. 다른 풀들은 넓은 들에서 혹은 물 맑고 공기 좋은 산기슭에서 살고 있는데 유독 이 풀은 이렇게도 비좁은 틈바구니에서 살고 있을까. 얼마나 고통스럽과 불만이 클까. 자주 오르내리는 이들의 신발에 밟히지나 않을까 두렵기도 할 텐데, 거기에서 잎피고 꽃도 피워 올리고 또 씨앗도 맺어 후손도 퍼뜨리고 있었다. 묵묵히 제 할 바를 다하고 있었다.
그 풀 속에서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아름다운 생명을 간직하 채 뜨거운 낮에는 씨앗을 키우고 밤이 되면 먼 우주의 별들을 바라보며 무언가 이야기도 나누며 생애를 엮어 가고 있었다.
문득 박양균의 꽃이라는 제목의 시가 생각난다.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망한 이 황량한 전장에서 이름도 모를 꽃 한 송이 뉘의 위촉으로 피어났기에 상냥함을 발돋움하여 하늘과 맞섬이뇨 그 무지한 포성과 폭음과 고함과 마지막 살육의 피에 젖어 그렇게 육중한 지축이 흔들리었거늘 너는 오히려 정밀속 끝없는 부드러움으로 자랐기에 가늘은 모가지를 하고 푸르른 천심에의 길 위에서 한 점 웃음으로 지우려는가.
시의 분위기를 봐서 이 꽃은 전쟁터에 핀 작은 풀꽃으로 보인다. 그러나 꽃은 상냥하다. 그리고 포성, 폭음, 고함, 살육의 피에 젖은 하늘과 맞서고 있다. 꽃도 분명히 생각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시인은 이 풀꽃의 생각을 만나고 있다.
고대의 시에서는 대체로 꽃의 외형적 아름다움과 향기에 화자의 시선이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시인들은 내면으로 시선을 옮겨 그 비의를 찾아내고 있다.
꽃 속에는 별의별 세계가 다 들어 있다. 김광균은 해바리기 꽃 속에서 늙은 어머니가 물레를 돌리고 있는 낡은 집을 찾아내고(해바라가 감상), 강민은 순색을 잃은 피가 꽃 속을 흐르고 있음을 보고 있다(꽃 속에 들어가), 어디 꽃뿐이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그것들의 껍질 속 내면에는 무궁무진한 비의가 숨어 있다.
이 계절의 쟁점
김운향: 시의 길
시의 길은 요원하다. 멀지만 가야 할 시인의 길이다.
시는 언어를 통해 우주를 표현하고 인간의 경험을 확장시키며, 세상에 대한 정서를 표현한다.
사전에 시란 마음 속에 떠오르는 느낌을 운율이 있는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한 글이다 라고 명시되어 있다.
시속에는 시인의 기질과 경험이 정서적으로 순화된 미적 형식으로 형상화하여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그 진실성과 호소력, 현실 인식의 언어 구사 등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게 된다.
시의 가장 큰 특징인 상징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미지가 많은 부분을 찾지하고 있다.
시에서의 이미지는 언어로 표현된 것이 사람의 감각에 의하여 마음속에 나타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의 이미지를 통하여 언어로 표현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의미를 보다 구체화하고 선명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적 상황을 그림처럼 마음속에 그리게 한다.
이미지는 과거에 지각적으,로 감지된 체험을 정신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이러헌 재현능력은 사람이 가지는 상상력에서 나온다. 예컨대 저녁노을 이라는 시적 표현을 두고 어떤 이는 삶을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장례식을 나타낸다고 하는 가 하면 또 다른 이는 자연이 그려주는 더 없는 아름다움 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상상력에서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예술론에 따르면 예술작품이란 진리를 은폐하는 자기폐쇄적인 대지에 대항하여 세계를 개진하는 싸움의 결과물이다.
아울러 이러한 세계의 개진은 지상에서 시인으로 거주하는 인간이 은폐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한 사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시는 예술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것, 언어를 가장 순수하게 말하는 것이 시라고 했고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시란 힘찬 감정의 발로이며 고요로움 속에 회상되는 정서에 그 바탕을 둔다 라고 했다.
오늘의 한국시는 너무 쉽게 쓰여졌거나 혹은 난해성에 매몰되어 독자층이 차츰 줄어들고 있다.
4년 전에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가 전 세계 바둑랭킹 2위였던 이세돌 9단을 이기는 바람에 고도로 발전한 인공지능의 수준이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
이와 같이 인공지능이 앞으로 인간의 삶을 더욱 편하게 바꿔줄 것이라는 기대도 있지만, 인간의 자리를 모두 대체할 수도 있는 인공지능의 능력에 씁쓸함과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도 많다.그러면 문학창작도 인공지능이 대신 작성해줄 날이 다가올지 모르므로 문인은 본인의 고유한 목소리가 잘 전달되도록 개성을 강화해야겠다.
시도 때론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지만, 시심이 민심이고, 천심이므로 속 깊은 정서와 사랑으로 시의 본령을 지키며 날카로운 필봉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은 시어로 시를 쓰지만 그 시 속에는 글로 표현된 영상이 담겨 있다. 독자가 시를 읽는 것은 이 영상을 찾아내는 퍼즐게임이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 영상시대에는 시도 마음속에 선명한 영상을 그려내는 시가 독자로부터 환영받고 있다. 이처럼 이미지라는 심상은 영상물에서 뿐만 아니라 문자로 표현된 시에서도 폭넓게 나타난다. 이러한 이미지 시는 영상시대에 독자로부터 보는 시로 자리매김을 하게 될 것이다.
2020년 입춘과 함께 찾아온 역병, 텅 빈 도시의 우울함과 고난으로 아린 가슴을 촉촉하게 치유하는 구원의 영약이 되는 시가 없을까?
우한폐렴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며 사람들을 공포감으로 몰아가는 이 척박한 시대에 세상을 조율해나가는 준거점으로 치열하게 삶의 현장을 그려보자.
감염병 확진자가 늘어나는 도심 속에서도 자발적 유배를 택하여 매일매일 새로운 햇빛을 쐬며 붓칼을 갈면서 감성의 봇물이 터지도록 시의 땅을 일구어 가자.
코로나19 왕관 모양의 미립자 병원체가 있어 눈물 속에 먹는 밥, 봄 바다 푸른 윤슬 속에 싹트는 고단한 시의 꿈이 있어, 밥과 꿈의 균형을 맞추어 살아가는 시인은 결코 외롭지 않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인고의 시간을 가다듬어 고독감을 극복하고 절심함으로 세상이 온통 시로 보여질 때 시인은 행복하다.
시는 개인의 역사이고 철학이며 상처 입은 자아 상실의 체험, 이미지를 살리는 상징의 출구이다.
우리의 생에 활력을 불어 넣고 기쁨을 주는 시, 영혼의 울림을 주는 시 앞에는 유토피아, 이상향, 정토세계가 펼쳐친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꿈꾸는 자여!
어둠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 길 멈추지 말라.(문병란 희망가 중에서)
코로나로부터 속히 회복되어야 할 생명과 평화의 들녘, 다시 만날 청명한 봄 하늘을 기다린다.
박헌오: 문학 강국의 이상, 시조로 실현할 수 있다
시조의 가치를 선양하자
시조가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만일 서양에는 소네트가 있고, 중국에는 절구와 율시가 있으며 일본에는 와카와 하이쿠가 있는데 한국에도 전통적 시의 뿌리가 있느냐?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한국의 시인이니 선생의 시조를 좀 소개해 주세요. 하는 요청이 이어진다면 누구나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한국의 시인들은 시조를 기본적 소양으로 삼고 시를 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다. 더구나 식민지 시대를 겪은 나라 국민이라고 업신여김 받을 수 있기에 말이다.
최남선은 현대 시조집 백팔번뇌를 내놓았다. 그리고 외세 문학에 침몰될 위기를 면하고자 이병기를 중심으로 시조 혁신 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조 혁신 운동이 시조를 현대화하는 데는 크게 공헌하였으나 긴 안목에서 볼 때 허점이 없지 않다는 비판을 제기하는 이들이 많다. 자유시를 우월하게 여긴 나머지 시조 창작 과정에서 탈격과 변격이 무비판적으로 확산되어 시조의 정체성을 바르게 계승하는 데 지장이 초래되고 있다는 점을 성찰해 볼 일이다.
한국인이 내세울 전통 시문학은 시조뿐이다
한 유명 대학 교수가 미국의 어떤 대학에 교환교수로 가서 강의를 하는데 한국 시인들의 자유시를 강의했더니 별 반응이 없자 시조로 강의 주제를 바꿨더니 관심이 집중되더라는 말은 익히 널리 알고 있는 이야기다.
한국을 문학 강국으로 일어서게 하려면 시조를 기반으로 삼아야 함이다. 늦었다 생각 말고 한국문학을 가르치고 창작하는 이들 모두 시조쓰기는 기본으로 삼는 바람이 일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히 제기하고 싶다.
대전에서는 35년 전부터 매년 전국 시조백일장을 대전시의 지원을 받아 개최하고 있다. 막상 학교에는 시조 창작을 가르칠 교사들이 부족했다. 백일장에 참여할 학생들을 위해서 시조시인들이 학교에 나가 직접 시조 창작을 가르쳤다. 초등학교 학생들도 네 시간만 시조를 가르쳐 주면 놀라운 시조를 곧잘 창작한다는 것을 매년 경험해 왔다. 이제라도 떳떳하게 시조가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의 시문학임을 가르쳐서 장차 후학들이 자랑스럽게 겨레 시조를 얘기하고, 좋은 작품을 창작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도 시키고, 노벨문학상에도 도전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
시조를 자신 있게 말하자
문학을 이야기할 때 시조를 앞에 내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000년의 시조를 100여 년의 자유시에 종속시키겠다는 것인가? 한국문학진흥법부터 시조를 시에 포함해 버리고 별도로 명기하지 않은 것이 비참하게 느껴진다.
또 시조를 파격으로 쓴 작품이 오히려 문단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현대문학이 걸어온 과정에서 시조의 본질을 간과했기 때문이며 시조인들이 제대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자탄을 금할 수 없다.
시조를 자신 있게 자랑스럽게 한국인의 전통적 시문학이라고 내세워야 하고, 시조의 전통적 형식과 내용을 지키면서 한국적 시문학의 주류로 내세우는 가운데 독자들이 호감을 가질 수 있도록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30년 전부터 시조 창작을 배우면서 시조는 적당한 파격과 변격을 활용해야 고루함에서 효과적으로 벗어날 수 있다고 듣고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약 10년 전 무분별한 형식의 파괴 풍조를 지양하고 시조를 시조답게 쓰자는 활동에 동참하면서 새로운 안목을 갖기 시작했다. 시조의 형식을 올바로 지키면서 쓴 작품이 더 자연스럽다. 형식을 지키는 올바른 수련으로 체질화된 정형속에서 유연해질 수 있는 것은 스포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다. 소소한 탈격 운운하는 글들도 보았다. 그러나 탈격이 불가피한 경우를 예외적으로 인정하는 선에 그처야지, 그것을 상용화하고 그렇게 가르치며, 그런 작품들을 각종 공모의 수상작으로 뽑아 주는 일은 본질적으로 시조를 훼손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다.
시조를 국민 시문학으로 넓히고 국격을 높이는 근원으로 삼자
시조를 사랑하는 10만 가족을 양성해 보자는 화두를 꺼내니 한 선배가 너무 뜬구름 잡는 말이라고 지적했다. 그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나름의 상징성이 있어서다. 1583년 율곡 선생이 외침에 대비하여 10만 양병의 필요성을 주장했는데 뜻을 못 이루고 세상을 떠난 후에 1592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반대한 이들이 크게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일본은 하이쿠를 국민의 정신문화적 힘을 드높이는 원력으로 삼아 하이쿠 시인이 100만이 넘고 동호인이 2000만이 넘는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시조인 10만 달성조차 불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민족문화 전통이 도도히 흐르는 나라, 애국심으로 문화적 주체성을 배양해 가는 국민이 되기 위해 시조 문학 융성을 꾀하고자 제언한다. 그래서 문학 강국을 만드는 자강의 발화점으로 삼아 보자는 것이다. 민족문화의 정수인 시조를 온 국민이 바로 알고 흥미롭게 배우며 유익하게 즐기도록 북돋우고 이끌어 주는 것이 한국문학인다운 정체성을 세우는 바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근자에 여러 시조 단체에서 시조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자고 나서고 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딛고 올라갈 사다리가 필요하다. 시조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통일된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한다. 국민들이 시조를 사랑하고 애용하는 기반이 뒷밤침되어야 한다. 정부와 시조 문단의 유기적인 협력이 동력이 되어야 한다. 시조를 가르치고 전파하도록 교과서를 증편하고 교사를 많이 양성해야 한다. 그 외 여러 종목의 문화유산이 있지만 시조는 단순한 하나의 종목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이념의 덩어리이다. 국격을 높일 수 있는 민족문화의 소중한 자산이다.
맺는 말
유행 문화는 태풍과 같이 지나가지만 전통문화는 미풍과 같이 계절을 일으킨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태풍이 아니다.
시조의 역사적 전통을 바르게 이어받아 온 강산을 물들이면서 민족 문학의 봄을 맞이하자. 우리 국민의 모두가 시조를 문화생활의 격조 높은 양식으로 삼자. 시조가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쉽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교재를 만들어야 하고, 시조가 재미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재미있게 결합한 융복합 예술 작품들을 개발해야 하며, 해외에 나가서 한글을 가르치는 이들이나 동포들을 위해서는 적합한 교재를 만들어 주는 등 실효성 있는 활동들이 필요하다.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의 정신을 지렛대 삼아 제2의 시조부흥운동을 시조인 모두가 한마음으로 앞장서고 교육계를 비롯한 정부 기관과 협력해서 국민문학으로 자리 잡도록 추진해 보자는 게 필자의 새해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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