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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누군가가 이유도 없이 노골적인 적개심을 품고 내 목숨을 해치려 할 때 가까스로 피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작정해서 나를 폄하하고 나를 음해하고 나를 못살게 군 끔찍한 경험이 있는지요?
그럴 경우 통상 즉시 나타나는 우리의 반응은 어떠한 것입니까?
대체로 동태복수법에 따라 처신하든지 아니면 더 센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내가 살기 위해, 내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겠지요.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인 생명의 위협 상태에 놓이셨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 사사건건 대립각을 내세우다 보니, 특히 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안식일 규정이나 정결예식 등을 예수님께서 보란 듯이 파기하다보니 예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노기등등하던지, 얼마나 살기가 번득이든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셨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방보다는 위험부담이 조금은 덜한 갈릴래아 지방에서
더 많이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살기등등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지속적인 압박 속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매일 수시로 죽음의 위협을 겪으면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시기 위해,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부여하신 인류 구원 사업의 완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이윽고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다가왔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예수님을 향한 살의(殺意)는 더해갔고, 더 이상 드러내놓고 다니기조차 어렵게 되었습니다.
초막절은 당시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야 하는 세 명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명절은 오늘날 추수감사제 비슷했습니다.
그 해 수확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동시에
이집트를 빠져나온 히브리인들이 사막을 횡단하면서 보낸 오랜 체류 기간을 기념하는 축제였습니다
일주일간 지속된 이 명절기간에 유다인들은 초막 안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남자들은 매일 아침 봉헌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제물을 바치며 사람들은 하느님께 풍부한 비를 내려주실 것을 청했습니다.
저명한 성경학자 플라비우스 요셉푸스에 따르면 유다 사회 안에서 이 명절은 1년 중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명절이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명절이었기에 예수님께서도 축제를 지내기 위해 조용히, 그리고 남몰래 예루살렘 입성을 시도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은 또 난리들입니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떠벌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끝도 없는 불신,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함, 도를 넘어선 적개심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을 비애와 배신감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예수님 당신은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돌려보려고,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서게 하려고 외치고 또 외쳐보지만 끝까지 귀를 굳게 막은 그들은 절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담하지 않고,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묵묵히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정말 대단해보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그 숱한 배신과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눈물겨워 보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당신을 핍박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더 큰 선, 더 큰 희망, 더 큰 사랑을 위해 꿋꿋이 그리고 당당히 뚜벅뚜벅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누구나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키울 수 있다
『하.사.시.』에 나오는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합니다. 예수님께 어떤 이방 여인이 다가와 남편이 싸움하다가 머리에 상처를 입어 의사의 말로는 실명이 될 것이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시메온이라는 남편은 이전에 죄를 지었다가 아내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신 적이 있는 남자였습니다. 그의 삶이 다시 냉혹과 탐욕으로 비뚤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사정은 알지만, 그가 용서받고 죽어 천국에 갈 것인지, 아니면 치유 받고 지옥에 갈 것인지 선택하라 합니다. 갈등하던 여인은 남편의 영원한 생명을 선택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도 같은 선택을 하게 하십니다.
남자는 “용서하십시오! 용서하세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지난번처럼 선생님의 용서를 주십시오! 그러나 지난번처럼 병도 고쳐 주십시오. 아리아! 아리아! 나 당신에게 맹세하오. 다시는 폭력도 쓰지 않고 속임수도 쓰지 않겠소. 나는….”라며 죽음의 공포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약속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청하는 것이 속죄하기보다는 죽음이 두려워 그러는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가 뉘우치도록 그의 아내에게처럼 두 가지를 제시하시고 하나를 선택하라 하십니다. 그도 지금 죽음과 심판, 지옥의 공포를 느끼고 있으므로 결국 “제 병을 고치기 위해 손을 들지 마시고, 저를 용서하시고, 저를 붙잡고 있는 마귀에게서 저를 구해내시기 위해 손을 드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내미시어 용서해 주시니 그는 이내 눈물을 흘리며 잠이 듭니다. [출처: 『하.사.시.』 6권 150장]
결국 예수님은 그 사람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평화를 주셨습니다. 두려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의 근원은 모두 ‘죽음’입니다. 두려움은 살려는 욕구에서 생깁니다. 더는 잃을 게 없다면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죽이려 하는데도 당당하게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십니다. 아직 당신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운명을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누구보다 강력한 분이셔서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누구도 당신께 손을 댈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더 가지려 하고 더 먹으려 하고 더 강해지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할 수 있을까요? 만리장성을 쌓는 일은 힘이 듭니다. 그래도 진시왕은 일찍 죽었습니다. 모든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부은 까닭에 더 빨리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유튜브에 한 강아지가 여러 마리의 호랑이에게 젖을 먹여 키우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개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개가 되었습니다. 호랑이들이 성장해서도 그 강아지를 자기 어미라 여기기 때문에 그를 보호합니다. 그 개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다가가려면 수많은 그 둘레의 호랑이들과 맞서야만 합니다. 이때 강아지는 다른 개들에게 전혀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모든 에너지를 정말 강한 대상에게 쏟았기 때문에 얻는 보상입니다.
위 이야기에서 죽어가는 남편과 그의 아내는 생존의 두려움을 병 나음으로 이겨내려 했습니다. 다행히 그들은 올바른 선택을 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심판관이 되셨습니다. 그들은 지옥에 가지 않게 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 세상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를 얻었습니다. 자신 안에 잉태된 호랑이를 키우려면 임신부처럼 세상에서는 가장 약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세상 것들에 의지하여 자기를 지키려 하다가는 내 안의 호랑이가 죽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몰방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믿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물 위까지 걸었던 베드로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다만 조금씩 젖을 줄 때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조금씩 더 평화로워짐을 느낍니다. 그러면 더 많이 투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라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은 이 세상에서 작은 투자로 백 배의 보상을 받는 것으로 성장합니다. 한 번에 하느님의 보호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마치 성모님 태중의 아기처럼 나의 희생을 먹고 자라십니다.
저도 주일 학교 교리 봉사하고 성당에서 활동하면서 거기서 오는 평화 때문에 저의 전 생애를 바쳐도 되겠다는 믿음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나의 이 지상에서 두려움을 이기려고 원하는 것들을 포기하고 조금이라도 주님께 의지해 봅시다.
내가 포기하는 그것들이 내 안에 잉태된 하느님을 성장시키는 영양분이 됩니다.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완전히 이기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7,1-2.10.25-30: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당신 신변의 위협을 아시고 아직 당신의 때가 아니었으므로 갈릴래아 지방으로 가셨다. 초막절이 되어 제자들과 따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초막절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던 생활을 기억하며 그때와 같은 천막을 세우며, 9월 말에서 10월 초순에 걸쳐 지냈다. 이 축제는 8일간 계속되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변모시켜 보여주신 때가 바로 초막절이었다. 이 초막절 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27절). 이 말은 근거 없는 생각이다. 성경에는 나자렛 사람,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메시아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누가 그의 가계를 말할 수 있으랴”(이사 53,8 칠십인역 참조)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28절). 그러시면서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28절). 그분의 가족들을 알고 고향을 아는 것뿐이며, 그분에 관해서 모르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하느님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29절) 당신 말고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은 그분이 아버지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본성으로 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유일한 분이시므로 그분만이 하느님을 아신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30절)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에 자신들의 지식을 믿고 있던 유다인들은 격노한다. 그러나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이 원하시지 않으면 붙잡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때란 그분께서 죽음에 처하기로 된 때를 말한다. 우리는 그분을 잘 알고 있는가?
4)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신학교에 입학해서 사제 성소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사제로 만 25년을 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성소는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이미 신부가 되었지만, 완성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자기 성소가 아니라며 사제의 길에서 벗어나는 경우를 관심 있게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성소가 아니라는 본인의 말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완성된 성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완성되지 않았으니 자기 성소가 아직 아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완성되기 전에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성소’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늘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는 길이었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길로만 가려고 할 때, 진정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낄 수가 없으며 그 길로 제대로 갈 수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주님의 진정한 협조자도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을 드러내고 당신을 세상에 높여 세우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자기만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는 성소의 초기 단계에 머무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는 완성된 것이 아니어서 그 안에서 결코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또 큰 혼란 속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 성소가 아니라면서 걷어차고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주님 안에서만 자기 성소가 완성되어 갑니다. 기도하며 또 사랑을 실천하면서 나의 성소를 성숙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성소를 확실하게 지켜 나가셨습니다. 즉, 자기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삶을 철저하게 사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사람은 두려워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최고 의회 의원들의 모습이 대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시지만, 최고 의회 의원들은 못마땅해하면서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분을 잡으려고 하지만 손도 대지 못합니다. 성경은 아직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이 두려웠고 자기들이 하려는 일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삶을 살다 보니 다른 사람의 시선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봐야 할 시선은 하느님의 시선이었습니다. 그 시선에 집중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오늘의 명언: 감사는 좋은 마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느낄수록 분노와 불안, 시기심과 같은 부정적인 정서를 덜 느낀다. 감사하면 행복해지는 것은 분명하다(김경미).
5)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분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7,30)
그분의 시간도
우리의 시간도
모두 다
그분의 뜻에 달려 있다네.
그분의 시간이란
아버지께서 맡기신
지상의 구원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당신 홀로
마지막 수난의 여정을
걸어가야 하는
뼈아픈 고통의 시간이라네.
6)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하느님을 앎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잘 아고 있는가?’ 자문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이 얘기해며
증언하고 증거하고 선포해야 하는 삶을 사는 나는
과연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내가 그리스도를 잘 알지 못하면
내가 만나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잘 모르면
예수님처럼 사랑하기도 어렵습니다.
저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것이 곧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이 될 것입니다.
세상이 달라 보이니
모든 일에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제 마음에서 살아 움직이시는
그분과 함께 하기를 청하며
그분께 배우는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7)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 30)
사순시기는
빨리 빨리라는
우리 마음의
성급함을 내려놓는
인내의 시간입니다.
늘 서두르다
주님의 뜻을
놓치게됩니다.
선한 뜻도
때가 필요합니다.
때가 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제대로 된
삶의 기쁨과 깊이는
기다림과 인내를
동반합니다.
그분의 때안에는
아픔과 희망이
있습니다.
고통 없는
기다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과
주님의 때는
인내를 토대로
합니다.
이 사순시기가
그분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기다림이
역설적이게도
앞으로 나아가는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8)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요한7,30)
'십자가 사랑!'
오늘 복음(요한7,12.10.25-30)은 '예수님의 때(kairos)'에 대한 말씀, 곧 '십자가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죽이려는 유다인들을 피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 손을 대는 자가 아무도 없었던 이유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기적을 체험한 이들에게 이 기적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셨던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때'는 '예수님께서 잡히신 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결정적인 때를 앞두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바로 공관복음이 전하는 '겟세마니에서의 기도'이고, 요한복음 17장이 전하고 있는 '당신 자신과 제자들과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17,1)
세상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파견하신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께서 세상 구원을 위해 십자가 나무에 매달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십자가 나무에 매달림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와 당신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길이라고 기도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이 사랑이 바로 '십자가 사랑'입니다.
나도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죽는 사랑이 나와 너를 살리는 길, 함께 부활하게 하는 길입니다.
사순시기가 참으로 은혜로운 이유는, 구원과 부활의 대전제인 이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고, 이 사랑 안에 깊이 머무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 사랑이 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돌아오라고!'
'회개하라고!'
'서로 사랑하라고!'
'용서하라고!'
복음 말씀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1-2.10.25-3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