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南漢山, 522.1m)-노적산(露積山, 388.4m)
여행일 : ‘17. 6. 6(화)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 서울시 송파구의 경계 산행코스 : 광지원→노적산→약사산(藥寺山, 415.9m)→약수산(藥水山, 402.3m)→한봉(汗峰, 418.1m)→은고개갈림길→남한산→벌봉(蜂巖, 461.9m)→은고개갈림길→은고개(산행시간 : 4시간 40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서울의 북한산성과 함께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 중요한 산성이다. 이 남한산성의 주변에 능선으로 연결되는 10여개의 산들이 있는데 서울 근교의 능선산행지로 최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선지 이곳을 찾는 등산객들이 점차 늘어가는 추세다. 필요한 곳마다 이정표가 잘 세워져 있는 등 등산로의 상태가 전체적으로 양호한데다 대중교통편까지 편리한 것이 그 원인이지 싶다. 오늘은 이 능선들 중에서 동쪽(광주시)으로 연결되는 두 개의 코스를 타본다. 남한산성면사무소에서 시작해 노적산과 약사산, 약수산을 거처 남한산성 외성(外城)까지 올라간 다음 은고개(엄미리)로 하산하는 코스이다. 이때 성내에 위치한 한봉과 벌봉, 그리고 남한산을 함께 둘러봤음은 물론이다. 오늘 산행은 한마디로 행복한 산행이었다. 폭신폭신한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완만해서 체력적으로 부담이 없었고, 거기다 오랜만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으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는가. 누구 하나 망설임 없이 웃고 떠들어본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 산행들머리는 남한산성면사무소(광주시 남한산성면 광지원리 113) 강변역(지하철 2호선) 1번 출구로 나와 길 건너 버스승강장(테크노파트앞)에서 13번(광주터미널↔강변역테크노마트앞)이나 13-2번(명하골↔강변역테크노파크앞) 버스를 타면 1시간쯤 지난 후에 남한산성면사무소(옛 중부면사무소) 앞(광지원, 남한산성 입구)에서 내리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 면사무소 구내에 지어놓은 정자(亭子)에서 산행 채비를 한다. 이때 면사무소의 화장실도 이용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면사무소 앞 삼거리에서 면사무소를 오른편에 끼고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남한산성으로 연결되는 342번 지방도이다. ▼ 300m쯤 걸었을까 오른편 언덕에 ’해공 신익희 선생 추모비(海公 申翼熙先生 追慕碑)‘가 길손을 맞는다. 등산로는 추모비의 오른편으로 열린다. 들머리에 ’노적산 등산 안내도‘와 이정표(한봉 5.0Km, 벌봉 6.0Km, 수어장대 11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1892-1956)선생은 이곳 광주(초월면 서하리)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였으며, 해방 후에는 교육자(국민대학교 설립)이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해방 전에는 중국의 군인(육군 중장)이었던 때도 있다. 해방 후 처음에는 이승만을 지지했으나, 이승만의 전제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낀 이후로 반(反)이승만 노선으로 바뀌었다. 1954년 김성수, 조병옥, 윤보선, 장면, 박순천 등과 함께 호헌동지회와 민주당 창당에도 참여하였으며 1956년에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 정권과 맞섰지만 호남지역으로 가는 유세 도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안타까운 삶을 마감했다. ▼ 급할 것 없는 오르막길을 100m쯤 오르면 능선 안부(이정표 : 한봉← 4.9Km, 벌봉 5.9Km/ 신익희추모비↓ 0.1Km)이다. 오른편에 운동기구 몇 점과 벤치를 놓은 쉼터가 보인다. 그 뒤로도 길이 나있는 걸 보면 면사무소 뒤편에서도 산길이 열리는가 보다. ▼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능선을 따른다. 이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가파름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도(强度)를 높여간다. 버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나지막한 산이라고 우습게 봤다간 큰 코 다치기 십상이겠다. ▼ 그나마 다행인 것은 등산로가 잘 닦여있다는 점이다.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조금이라도 힘이 덜 들도록 배려를 했다. 또한 곳곳에다 벤치를 놓아 힘이 들 경우 쉬어가도록 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멀쩡한 계단을 놓아두고 다들 옆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숫제 계단 옆으로 길이 하나 더 나있을 정도이다. 계단이 촘촘하지 않고 올라서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높다보니 없는 것만도 못해버렸다. ▼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만에 노적산 정상에 올라선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마치 너덜처럼 널려있는 정상에는 자그마한 정상표지석 외에도 벤치와 평상을 갖춰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힘들게 올라왔으니 잠시 쉬었다 가라는 모양이다. 이렇듯 등산로가 잘 정비된 곳에 이정표(벌봉 5.0Km/ 광지원리 2.0Km)라고 없을 리가 없다. 119의 국가지점표시목(다사 76824052)까지 세워놓았다. 참고로 노적산은 산의 생김새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군량미를 쌓아 놓은 것 같이 생겼다는 것이다. 병자호란이라는 아픈 역사가 만들어 낸 이름이지 싶다. ▼ 노적산을 지나면서 산길을 아래로 뚝 떨어진다. 함께 걷고 있던 여성들의 표정이 굳어지는 순간이다. 떨어진 만큼 올라가야만 하는 산의 진리를 알고 있음이리라. 어디 산뿐이겠는가. 인생 또한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맨날 나쁜 일만 계속될 수도 없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현실을 직시(直視)하고 미래를 대비해 나가야 할 일이다. ▼ 하지만 이는 기우(杞憂)에 불과하다. 일단 노적산에 오르고 난 이후부터는 산길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는 얘기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길까지 폭신폭신한 황톳길이다. 거기다 능선은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숲이 우거져 있다. 마침 오가는 이들도 없으니 호젓한 산행을 즐겨볼 일이다. 그렇게 12분 정도를 진행하면 이정표(벌봉↑ 6.6Km, 수어장대 9.0Km/ 엄미리(은고개)→ 1.5Km)가 있는 삼거리를 만난다. 그런데 벌봉까지의 거리가 아까 노적산에서보다 오히려 더 멀어졌다. 우리들이 낸 혈세로 만든 시설물들일 진데 조금 더 신경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 잠시 후 약사산 정상에 올라선다. 노적산을 출발한지 27분만이다. 밋밋한 구릉(丘陵) 모양으로 생긴 정상은 119의 국가지점표시목(다사 76294055)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정상표시석이나 이정표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게 안타까웠던지 대구의 산악인 김문암씨가 나무로 만든 정상표지판을 걸어놓았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덕분에 인증사진까지 찍는 호사를 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약사산의 옛 이름은 밀라봉(密羅峯)이었다. 구전에 의하면 ’밀양 박씨‘가 많이 살았던 골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밀양골‘이 ’밀양곡‘으로, 또다시 ’밀라동‘으로 바뀌었고 그 뒷산의 이름이 ’밀라봉‘이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이름인 약수산은 이 산에 ’약수가 나오는 샘이 있는 절‘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그게 어떤 절인지는 모르겠다. ▼ 또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아까와 다름없이 호젓한 산길이 계속된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것 또한 같다. 함께 걷고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하나같이 경쾌하다. 그만큼 산길이 편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그렇게 잠시 진행하면 송전탑이 나오고, 이어서 나타나는 내리막길을 조금 더 걸으면 이정표(벌봉 3.7Km/ 노적산 1.4Km)가 있는 십자안부에 내려선다. 119의 국가지점표시목(다사 75644062)은 현재의 위치를 ’불당리갈림길‘로 적고 있다. 왼편에 있는 불당리(남한산성면)로 연결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 길은 ’오전리 오야수마을‘로도 연결되니 참조할 일이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내려갈 경우에는 ’엄미리 미라울마을‘이 나온다. ▼ 안부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딱 걷기 좋을 만큼의 경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분 남짓 진행하면 약수산 정상이다. 약사산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정확히 25분이 걸렸다. 약수산 정상도 텅 비어 있기는 약사산과 매한가지이다. 아니 오히려 한술 더 뜬다고 봐야겠다. 이곳에는 국가지점표시목 조차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김문암씨가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갈림길이 보인다. 왼편은 불당리 아랫말, 그리고 오른편은 미라울마을로 연결되는 길이다. ▼ 계속해서 능선을 탄다. 큰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부드러운 능선길이다. 걷는 게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다는 얘기이다. 산길의 풍경 또한 괜찮은 편이다. 크고 작은 나무들과 고목(古木)이 함께 어우러지다 못해 작달막한 철쭉들까지 끼어들었다. ▼ 15분쯤 걸었을까 ’검복리 갈림길‘이 있는 안부사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갈 경우에는 미라울로 연결되고, 왼편은 검복리 양지말로 내려가게 된다. 이정표(벌봉 2.5Km, 동장대지 2.8Km/ 노적산 3.8Km)와 국가지점표시목(다사 74584091) 외에도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서툴게 쌓아올린 케언(cairn)도 보인다. 성황당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 안부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렇다고 산행풍경이 크게 변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는 얘기이다. 높이가 비슷한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을 연결시키다보니 골을 깊게 만들 필요가 없었나 보다. 울창한 숲길에다 폭신폭신한 황톳길이 계속된다는 것 또한 변함이 없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길이지 싶다. ▼ 그렇게 20분 정도 걸었을까 성벽이 나타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2014년)되어 있는 남한산성(南漢山城 : 사적 제57호)의 세 개의 외성(外城) 중 하나인 한봉성(漢峰城)이다. 나머지 둘은 봉암성(蜂巖城)과 신남성(新南城)이니 참조한다. 한봉성은 본성(本城)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봉암성의 동남쪽에서 한봉(漢峰)의 정상부까지 쌓은 외성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이 이 일대를 장악하고 화포를 쏘아 인조가 머물던 행궁에까지 포탄이 떨어지게 했기 때문이다. 이런 전략적 요충지를 지키기 위해 축조되었는데 본성이나 봉암성과는 달리 폐곡선(閉曲線 : 하나의 곡선상에서 한 점이 한 방향으로 움직일 때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곡선)을 이루지 않게 설치한 것이 특징이란다. ▼ 성벽을 왼편에 끼고 돌다가 성의 안으로 들어가면 길이 두 갈래(이정표 : 벌봉→ 1.3Km/ 노적산↓ 2.8Km)로 나뉜다.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한봉은 남서쪽 방향, 쉽게 말해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그리고 성벽의 위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 4분쯤 걸었을까 이정표(벌봉 1.6Km, 동장대 1.7Km)가 세워진 곳에 이르니 오른편 숲속에 삼각점으로 보이는 구조물과 함께 자연석 하나가 눈에 띈다. 반반하게 생긴 표면에는 ‘한봉 418.1m’이라고 적어 놓았다. 공식적인 정상석은 아니고 누군가가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한봉(汗峰)이란 이름을 얻게 된 연유나 짚어보고 넘어가자. 한봉(汗峰)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을 정복하기 위해 청나라 칸(汗=한)이 이 봉에 올라 남한산성을 엿보았다고 해서 칸의 한자 음역인 ‘한(汗)’과 봉우리의 ‘봉(峰)’을 하나씩 따온 것이라고 한다. 한봉(汗峰)을 ‘漢峰’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으니 참고한다. ‘해동지도(海東地圖)’와 ‘광여도(廣輿圖)’인데 ‘남한산성 동문 아래 한봉(漢峰)’으로 묘사되어 있다. 1847년(헌종 13)에 홍경모(洪敬謨)가 편찬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도 ‘한봉(漢峯)은 남한산성의 동쪽에 있고 옛 이름은 한봉(汗峰)인데 성 안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돈보(墩堡)를 쌓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 다시 삼거리로 돌아와 이번에는 벌봉방향으로 진행한다. 북쪽으로 보이는 산성길이다. 옛 절터처럼 애잔한 분위기가 넘쳐나는 좋은 길이다. ▼ 5분쯤 걸으면 암문(暗門) 하나가 나온다. 누군가 이정표(벌봉↑ 1.0Km, 동장대터 1.3Km/ 좌익문(동문)← 3.0Km/ 한봉↓ 0.6Km)에다 ‘제16암문’이라고 적어 놓았다. 남한산성의 성벽에 만들어진 4대 문(門)과 16개의 암문 중 마지막 하나라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남한산성의 암문은 모두 16개이다. 본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그리고 한봉성에 1개가 있다. 너무 많다보니 이름 붙이기 쉽게 아예 번호로 매겼다. ▼ 암문(暗門)이란 성곽에 문루(門樓)를 일부러 세우지 않고 뚫은 문을 말한다. 일반인이나 적들이 알지 못하게 후미진 곳이나 깊숙한 곳에 만들었으며, 전시(戰時)에는 적이 모르게 물자를 이송하곤 했다. ▼ ‘동문갈림길’을 지나면서 길은 오르막으로 변한다. 남한산으로 오르는 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잠시 후 또 다른 암문을 만난다. 봉암성으로 연결되는 암문이 아닐까 싶다. 작달막한 체구의 집사람에게도 비좁게 느껴지는 것이 과연 암문(暗門)답다. 그래야 적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암문 근처에서 우리가 하산코스로 잡은 엄미리(은고개)로 내려가는 길이 나뉜다. 사람들이 ‘검단지맥’이라 부르는 능선길이다. 길이 나뉘는 지점에 이정표(벌봉↑ 0.4Km, 동장대터 0.9Km/ 엄미리(은고개)→ 3.9Km/ 한봉↓ 1.1Km, 큰골 1.2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이곳에서부터 은고개까지는 검단지맥의 일부구간이다. 검단지맥은 한남정맥 상의 선장산(350m) 북쪽 1.7km 지점인 향린동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법화산(383.3m)과 영장산(414.2m), 성남 검단산(523.9m), 용마산(595.5m), 하남 검단산(658.4m) 등을 일군 후 팔당대교 남단에서 그 숨을 다하는 길이 약 45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산꾼들은 대개 용인시 기흥구 향린동산에서 이배재까지를 1구간, 이배재에서 은고개를 2구간, 그리고 은고개에서 바깥창모루(팔당대교)까지를 3구간으로 나눈다. 그러니까 오늘은 검단지맥 3구간 중 일부(남한산에서 은고개)를 걷게 되는 셈이다. ▼ 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벌봉까지 다녀오기로 한다. 아니 반대편 성남방향에서 올라오고 계신 여성회원님을 접속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곳의 위치를 찾지 못하겠다고 해서 벌봉으로 올라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역시 산성길을 따른다. ▼ 2분쯤 걸었을까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계속해서 성벽을 따르는 길과 그렇지 않은 지름길이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인데 오른편의 성벽을 따르는 길보다는 왼편의 길이 훨씬 더 또렷하다는 게 문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웃자란 잡초가 갈 길을 방해하는 오른편으로 진행해야만 한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오석(烏石)으로 만든 남한산 정상표지석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옆에는 삼각점(422 재설)도 보인다. 참고로 남한산은 일장산(日長山) 또는 주장산(晝長山)으로도 불린다. 산의 사방이 평지여서 밤보다 낮이 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 남한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하남시 일원의 아파트 숲들은 물론이고, 그 뒤에 있는 검단산과 용마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마치 병풍이라도 되는 양 시가지를 감싸고 있다. 그 왼편 한강 너머에서는 예봉산과 적갑산이 나도 있다며 고개를 내민다. 그 뒤에 뾰쪽하게 솟아오른 산은 아마 천마산일 것이다. ▼ 벌봉으로 연결되는 성벽(城壁)도 보인다. 벼랑 위에 쌓아 올린 것이 아마추어의 눈에도 천혜의 요새로 보인다. 사람들은 남한산성을 일러 우리나라 산성축성술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는 남한산성을 일러 ‘천작지성(天作之城)’이라고 했다. 하늘이 내려준 천혜의 자연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성(城)이라는 것이다. 가운데는 평평하고 바깥은 험고하며 형세가 웅장하여 마치 산꼭대기에 관을 쓴 것 같은 형상이라고 했다. ‘택리지(擇里志)’에서도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에 있고 중심지는 만 길이나 되는 산꼭대기 위에 있다. 옛날 백제 시조 온조왕의 옛 도읍이었던 곳이다. 안쪽은 평평하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다. 청나라 군사가 처음 왔을 때 칼날 하나 대보지 못했고, 병자호란 때도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단지 양식이 부족하고 강화가 함락됐기 때문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 조금 전의 갈림길로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왼쪽의 길을 따른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또 다시 길이 나뉜다. 이번에는 이정표(벌봉↗ 0.2Km/ 전승문(북문)↖ 1.2Km/ 한봉↓ 1.2Km)가 가리키고 있는 벌봉 방향이다. 하지만 북문 쪽으로 가더라도 벌봉에 이를 수는 있다. 아니 오히려 더 편하게 갈 수가 있다. ▼ 거의 허물어지다시피한 암문 쪽으로 올라선다. 그리고 조금 전 남한산 정상에서 보았던 성벽의 위를 따른다. 성벽은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아니 어떤 곳은 이미 허물어져 있다. 복원이 시급하다는 얘기이다. 아니나 다를까 ‘문화재조사’를 하고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곳곳에 붙어있다. 복원을 위한 지표조사를 하고 있음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은 남한산성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인적이 뜸한 길은 순하면서 호젓하고, 길섶 양쪽으로 허물어진 봉암산성이 쓸쓸한 분위기를 돋운다. ▼ 잠시 후 ‘외동장대터’라고 쓰인 빗돌이 나타난다. 주변에는 축대를 쌓았었던 돌들로 추정되는 돌들이 널브러져 있다. ‘장대(將臺)’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루(樓)로 남한산성에는 다섯 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 외동장대는 동장대와 벌봉 일대가 조망되는 곳에 지어졌다. 이 외동장대는 숙종12년(1686) 수어사 윤지선이 수어청 군병을 동원하여 봉암성을 축성할 때 함께 구축한 것으로 추측되며 군사(후영장인 죽산부사와 2천 명의 군사들)들이 진을 치고 훈련하던 곳으로 보인다. 고지도를 보면 서장대와 남장대의 경우에는 누각이 설치된 것으로 나오지만, 외동장대의 경우에는 누각에 관한 기록이나 표시가 전혀 없다. 이로보아 외동장대는 처음부터 누각이 없이 대(臺)만 설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조금 더 걷자 거대한 바위봉우리 앞에 ‘벌봉’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벌봉’이란 암문 밖에서 이 봉우리를 보면 벌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정기가 서려있는 벌봉을 깨트려야 산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하여 이 바위를 깨트리고 산성을 굴복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한편 벌봉은 해발512.2m로 수어장대(497m)보다 높기 때문에 남한산성의 서쪽 내부와 동쪽 성벽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병자호란 당시 이 지역을 청나라 군에 빼앗겨 적이 성 내부의 동태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으며 화포로 성안까지 포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바위를 돌아 위로 오르자 이번에는 ’봉암산성신축비‘에 대한 안내판이 나타난다. 숙종 12년 윤4월 1일부터 봉암성을 쌓기 시작하여 같은 해 5월9일에 마무리했음을 말해주는 비(碑)란다. 자연석 위에 정사각형의 해서채(楷書體) 로 음각(陰刻)되어 있는데, 판독 가능한 49자 외에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힘든 몇 글자가 더 있다고 한다. 비문을 통해 당시 광주유수겸 수어사인 윤지선의 감독아래 봉암신성이 신축되었음을 알 수가 있단다. ▼ 몇 걸음만 더 옮기면 벌봉이다. 아니 바위를 돌아 올라왔으니 이미 벌봉에 올라왔다고 봐도 되겠다. 벌봉은 도면에는 없는 이름이다. 벌은 순수한 우리말인데 한문으로 옮길 경우 봉(蜂)이 된다. 그래서 벌봉을 ’봉봉‘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웃자고 한 이야기겠지만 아무튼 벌봉은 커다란 바위봉우리이다. 참고로 이곳 벌봉은 남한산성 안에 있는 여러 봉우리들보다도 높다. 전략적 요충지라고 볼 수 있다. 병자호란 때에는 그런 이점을 알아차린 청나라 군사들이 이곳에서 산성 안을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을 해야만 했던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이다. 그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숙종 12년에 벌봉 주위에다 산성을 새로 쌓았는데 그게 바로 봉암성이다. 숙종31년(1705년) 수어사 민진후가 포루를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남한산성의 본성에 대비하여 새로 쌓은 성이라는 의미로 '신성(新城)'으로 불리기도 하며, 동쪽에 위치한 성이라 해서 '동성(東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 깊지 않은 굴이 뚫린 커다란 바위에 뭔가가 음각(陰刻)되어 있다. 글을 쓴 솜씨도 여간 뛰어난 게 아니다. 뭔가 내력이 있을 것 같기에 유심히 살펴보다 헛웃음을 짓고 만다. ‘金炳陸’... 사람 이름이었던 것이다. ▼ 왔던 길로 되돌아가 ’엄미리(은고개)갈림길‘에서 이번에는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른다. 올라올 때 이용했던 노적산-약수산 코스와 마찬가지로 걷기 좋은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울창한 숲속을 걷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게 10분 남짓 진행하자 삼거리(이정표 : 엄미리(은고개)↑ 4.3Km/ 엄미리계곡→ 0.5Km/ 벌봉↓ 1.0Km)가 나온다. 엄미리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오른편으로 나뉘는데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능선을 탄다. ▼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춰간다. 능선의 길이가 5Km에 가깝다보니 서두를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급한 오르내림이 아주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계단을 놓은 것도 모자라 밧줄 난간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가파른 구간도 나타난다. 다만 어쩌다 한두 번, 그것도 그 길이가 아주 짧을 따름이다. ▼ 중간에 갈림길도 여러 번 만나게 된다. 30분쯤 후에 만나게 되는 첫 번째 갈림길(이정표 : 엄미리(은고개)↑ 3.0Km/ 엄미리계곡→ 0.7Km/ 벌봉↓ 1.3Km)은 엄미리계곡으로 연결되는데 잠깐만 다리품을 팔면 의안대군 방석(芳碩, 1382~1398)의 묘역(애기릉)을 다녀올 수 있다. 두 번째도 역시 엄미리계곡으로 연결되는 갈림길(엄미리(은고개)↑ 0.9Km/ 엄미리계곡→ 0.4Km/ 벌봉↓ 3.4Km)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은 곳에서도 두어 번에 걸쳐 길이 나뉜다. 이럴 때는 대충 길이 또렷한 곳으로 진행하면 될 것 같다. 참고로 의안대군 방석은 태조 이성계가 48세 때 신덕왕후 강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8번째 아들이다. 11세의 나이로 조선 최초의 세자로 책봉되어 조선 2대 왕이 될 운명이었으나 이복형제인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1398년) 때 17세 나이로 죽임을 당했다. 이방원은 둘째 형인 영안군을 2대 왕(정종)으로 앉혔다가 2년 후 그 자신이 조선 3대왕(태종)에 올랐다. 그렇게 방석과 방원의 운명은 뒤바뀌었다. 이방원의 무덤인 헌릉이 서울 도심에 으리으리하게 자리해 있는 것에 비하면 남한산 동쪽에 위치한 이방석의 묘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 하산을 시작한지 80분쯤 지났을까 판독 불가능한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는 자그마한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기에 그냥 지나치려는데 눈에 익은 팻말 하나가 눈에 띈다. ’준?희‘라는 아명을 쓰고 있는 최남준씨가 ’검단지맥 303.1m‘라고 쓴 표지판을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았다. 국제신문의 ‘근교산 취재팀’ 산행대장을 지냈던 분인데 검단지맥을 하면서 이곳을 지나갔던 모양이다. ▼ 303.1m을 지나면서 산길은 갑자기 가팔라진다. 산길은 그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밧줄로 난간까지 만들어 놓았다. 비록 얼마가지 않아 밋밋한 능선길로 되돌아가지만 말이다. ▼ 산행날머리는 은고개(남한산성면 엄미리) 하산지점에 가까워지자 길은 더욱 좋아진다. 시멘트계단까지 만들어져 있을 정도이다. ‘광주 이씨’ 문중에서 자기네 묘역(墓域)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었지 않나 싶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진행하면 43번 국도가 지나가는 은고개(이정표 : 벌봉 4.4Km, 한봉 5.1Km, 좌익문(동문) 7.0Km)에 내려서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은고개’란 이름은 엄미리(奄尾里)라는 지명에서 유래됐다. 엄미리의 ‘엄’자를 따서 엄고개(奄峴: 엄현)로 불리다가 발음이 은고개로 변한 것이라 한다. 오늘 산행은 정확히 6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준비해간 음식을 먹느라 80분이나 쉬었으니 실제로 걸은 시간은 4시간 40분으로 보면 되겠다. ▼ 산을 내려오니 식당에서 보낸 승용차 두 대가 기다리고 있다. 부지런한 최영철군이 음식주문을 미리 해놓은 모양이다. 엄미리에 있는 음식점이니 걸어봐야 10분이 채 되지 않는 거리지만 음식점에서 서비스 차원으로 태우러 왔을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도착한 ‘황금옻닭(TEL : 031-761-7477)에서 점심 겸 뒤풀이가 시작되었다. 메뉴는 이 집의 메인요리인 ‘옻닭’이다. 나처럼 옻을 타는 사람들에게는 ‘엄닭’, 즉 엄나무를 넣고 끓인 닭백숙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쫄깃쫄깃한 육질은 입에 넣을 때마다 감칠맛이 났고, 원할 때마다 리필을 해주는 진한 국물은 시원하면서도 구수했다. 그 덕분에 우린 과음을 하게 됐지만 말이다. |
출처: 가을하늘네 뜨락 원문보기 글쓴이: 가을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