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쓰는 예수님의 수난곡
-최인각신부-
배반당하신 예수님의 마음
저는 오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배반당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음악적으로 표현(수난곡)하고 싶은 마음을 글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 높은 곳에 호산나!”라고 환호하는 군중의 외침이 아련히 들리는 저 편에서, 유다가 예수님의 몸값을 흥정 하고 있습니다. 군중의 환호를 받던 예수님의 얼굴은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나를 팔아먹다니. 어떻게?’하며, 예수님의 얼굴은 붉어지며, 번뇌의 먹구름으로 가득 찹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파스카 음식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라고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 합니다. 제자들은 쥐죽은 듯 조용합니다. 그 순간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하며 천연덕스럽게 묻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은 마냥 미어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며,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고 하시며 용서의 잔을 나눠주십니다. 이 작은 방에서 이루어지는 순간을 천사들은 천상악기를 다 동원하여, 화려하고 장엄한 오케스트라로 연주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배반할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니 산으로 향하십니다. 그 발걸음은 근심과 번민으로 가득차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라고 하시며, 얼굴을 땅에 대고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비켜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십니다. 땅을 움켜쥐고, 피땀을 흘리며 기도합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이 순간에 ‘우리 아기 잘도 잔다’는 곡에 맞춰 잠을 자고 있는 듯합니다.
당신이 팔아 넘겨지는 순간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는 급한 마음으로 “일어나 가자.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며 제자들을 깨웁니다. 이미 신호해 둔대로 유다는 예수님께 입을 맞추러 다가옵니다. 역겹고 더러운 배신의 입맞춤을 당하십니다.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죄인의 손에 이끌려갑니다. 이 순간에 믿고 사랑했던 제자들은 슬금슬금 도망칩니다.
사람들은 이미 정해놓은 벌을 선고하기 위해 온갖 죄를 뒤집어씌웁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이름으로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인지’를 고백하라며, 우격다짐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렇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사람들은 화난 폭도처럼 옷을 찢으며 “이 자가 하느님을 모독하였습니다. 그 자는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며 예수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후려치고, 손찌검을 하며, ‘너를 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맞춰봐라’하고 놀려댑니다. 순간, 당신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베드로와, 당신을 팔아먹은 것을 후회하며 목매달아 죽는 유다가 잠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민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에게 넘기며 사형을 시켜달라고 조릅니다. 아니, 협박까지 하며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쳐댑니다. 이 아우성을 듣는 어둠의 사탄들은 좋다고 환호성을 외쳐댑니다.
빌라도는 권력유지를 위해 예수님을 죽음에로 넘겨줍니다. 이제 군사들과 군중들은 ‘분풀이가 허용된 이’의 옷을 벗기고 가시관을 씌우고, 갈대로 때리며 마구 대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딱하고 불쌍한 버림받은 자로서,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울부짖습니다. 사랑하고 믿었던 이들에게 당한 배신에 대한 울부짖음은 메아리로 온 누리에 퍼져갑니다. 메아리가 멈추어질 때쯤에, 그분은 숨을 거두십니다. 세상은 어둡고 껌껌한 죽음의 천지가 되고, 성전의 휘장은 찢어지고 땅은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지며, 공포의 순간이 다가오자, 사탄들은 승리했다고 난장판의 잔치를 벌입니다. 그때 몇몇 사람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고백하며,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다’라고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바로 그때부터 죽음의 곡소리는 기쁨과 생명의 선율로 바뀌고, 생명의 빛이 비춰오며, 믿고 부활한 자들과 천사들이 함께 부르는 승리의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잘 묵상했습니까? 여러분도 우리 신앙의 핵이며 정점인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각자의 가장 멋진 표현으로 고백하면 어떨까 합니다
“함께하는 고통”
-고찬근신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을 비우고 낮추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짧은 인생을 고통 속에 마감하셨습니다. 그분이 그토록 사랑했던 인간과의 사랑도 잠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했던 그 군중들이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믿음이 아닌 이기심과 배신으로 점철된 인간 세상의 쓴맛을 보셨습니다. 누구보다 사랑하셨던 그만큼 누구보다 고통이 더 크셨을 것입니다. 고통을 없애주실줄 알았던 그 예수님이 고통 속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苦海), 예수님도 바다를 없앨 수는 없으셨나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 고통의 바다에 푹 잠겨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고통스런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남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하나는 고통받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어 위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힘들다면 고통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누리게 되는 기쁨을 주려하셨으나, 세상에 만연한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그것이 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고통이란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인간의 병을 치유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제철에 나오는 음식을 잘 먹는 것이고, 신토불이 즉 제 땅에서 난 음식을 먹는 일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 이론은, 병을 치유하기 위해 특별한 약을 먹는다거나, 먼 곳으로 요양 가는 것이 아니라, 병을 얻은 원인에서 병을 치유하는 방법도 함께 찾으라는 말입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지요. 그렇습니다. 고통은 인생의 조건입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의 욕심 때문에 고통받고, 어떤 사람은 옳은 일을 하려다 고통받고, 또한 거의 모든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고통 속에 인생을 살아갑니다. 고통의 이유야 어쨌든 고통받는 사람은 자기 옆에 함께 고통받는 사람이 있을 때 위로를 받습니다. 고통이 고통을 치유해주는 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과 함께 고통받으심으로 고통받는 인간을 위로하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고통받는 모든 사람이 위로받을 수있도록, 누구보다도 더 순수하고, 누구보다 더 억울하고, 누구보다 더 가엾은 고통의 길을 가셨습니다. 죄 하나 없이, 오직 사랑 때문에, 가장 고독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의 모든 고통은 위로받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면 우리의 고통은 견딜만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고통 속에 우리의 고통은 녹아 사라집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 몰라주는 나만의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삶의 포기라는 문턱까지 가야 했을 때라도, 나보다 먼저, 나보다 더 큰 고통의 길을, 나를 위해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돌아서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도 나의 고통으로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는 ‘함께하는 고통’을 실천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수십 년 전, 알래스카의 자연보호 지역에 사슴과 늑대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정부 당국은 이렇게 함께 살다가는 약한 사슴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지요. 그래서 사슴의 천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늑대를 모조리 없앰으로 인해 사슴의 안전을 지켜주기로 계획했고, 실제로 실행했습니다. 그 후 늑대는 완전히 사라졌고, 10년간 4,000여 마리의 사슴이 10배가 넘는 42,000마리로 증가되었습니다.
이렇게 사슴의 안전을 지켜주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자, 예기치 못한 결과가 찾아왔습니다. 글쎄 늑대의 위협이 없자 사슴은 점점 게을러졌고, 운동량의 감소로 인해 체질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차츰 그 수가 줄어들어 오히려 처음의 숫자인 4,000마리 이하가 된 것이지요.
정부 당국은 다시 사슴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도 허사였습니다. 바로 그때 어떤 동물학자가 없앴던 늑대를 투입하라고 권고했고, 다시 투입하자 그때부터 사슴들은 다시 숫자가 늘기 시작했습니다. 사슴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늑대에 희생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고 또 뛰어다닌 것이지요. 사슴은 건강해졌고 그래서 그 숫자도 늘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슴과 늑대가 함께 있으면, 힘이 약한 사슴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러나 이 사슴을 오히려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오히려 천적인 늑대였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 역시도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통과 시련. 정말로 감당하기 힘든 것은 물론이고, 그래서 제발 내 곁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내 자신을 더욱 더 성장시켰고 지금의 내 자신이 있도록 만듦으로 인해, 어쩌면 오히려 고마움의 대상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과 시련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거부하기 보다는, 이를 통해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감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 지를 이미 다 알고 계셨지요. 즉,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겪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연약한 인간의 육체를 지니신 당신의 몸으로 견디어내기에는 너무나도 큰 고통과 시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피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있었고, 이 아버지의 뜻을 철저히 따라야 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불만을 먼저 던지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이러한 불평불만이 터져 나올 때 십자가상에 계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불평불만을 던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먼저였던 예수님의 모습을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철저히 하느님 뜻에 따를 때, 우리 역시 부활의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만큼 귀중한 것은 없다. 또한 시간만큼 낭비하기 쉬운 것도 없다.(윌리엄 펜)
두려움
-이연수-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길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때, 예수님은
겟세마니에서 기도를 올리십니다. 그분의 기도를 듣고 있자면, 무척이나 처절한 인간의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예수님은 분명 당신을 고발한 저들의 불의,
부당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도 알고 있었을
테지요. 하지만 피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버리셨다고 인간적
고뇌로 몸부림칠 만도 한데, 왜 피하지 않으셨을까요?
유다가 예수님께 입맞춤으로써 당신이 유다 당국에 체포되는 순간,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제자들이 당신을 버렸듯이,
공포의 순간에서 도망칠 수도 있었습니다. 두려움은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을 때, 하느님을 우리 마음에서 저버렸을 때 생겨납니다. 인간의 폭력과 불의, 부당함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눈에서 마음에서 제쳐 두었을 때, 우리는 자신을 제압하는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겠지요.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하느님 계획의 구원사적 행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성경에 따라 일어났고, 의인들의 부활을 예견하기 때문입니다(다니 12,1-3 참조). 이로써 그분의 죽음은 다른 인류의
부활을 가능하게 하며(1코린 15,20-23 참조), 인류 역사 안에서 큰 획을 긋게
되는 구원사적 의미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임숙희-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예수님이 수난 가운데 지니셨던 자세와 마음을 우리 안에 심어주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오늘 본문 앞 단락은 어떤 여인이 예수님이 가셔야 할 길을 알아보고, 그분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매우 값진 향유를 그분 머리에 부은 이야기입니다. (6 – 13절)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던 유다 이스카리옷이 은돈 서른 닢으로 스승을 팔아넘기게 됩니다. (14 – 16절)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수난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이 긴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수난 중에 보이신 자세를 묵상하는 것은 수난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난 전에 먼저 성찬례를 제정하십니다. (17 – 35절) 예수님의 수난이 무엇인지 관상하려면 이 성찬례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 단락은 네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파스카 준비 (17 – 19절), 배반 선포(20 – 25절), 파스카 식사 (26 – 30절), 베드로의 부정으로 시작되는 제자들의 부인 (31 – 35절). 예수님의 행위와 관련된 동사들은 그분의 삶을 요약합니다. “팔아넘겨지다” (21.23.24절),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시다”(26절), “제자들에게 주시다” (26.27절),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시다”(27절).
이 지상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세상의 빛’ 이신 예수님은 제자들로 대표되는 모든 인간의 어둠과 죄 안으로 들어와 당신 자신을 온전히 주십니다. 그분은 아시면서도 당신이 제자에 의해 ‘팔아넘겨지도록’ 두십니다. (21절) 예수님은 빵과 잔을 들고 먼저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십니다. 이 행위는, 그분이 겪으셔야 할 수난이 그분 편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사라기보다는, 하느님 편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주신 선물에 대한 감사의 차원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는 당신 전부를 주시고, 이제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그분을 닮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항상 이 사랑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감사드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배반할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데리고 겟세마니로 가서 기도하십니다. (36 – 46절) 이 본문에서 우리는 수난 앞에 예수님이 지니셨던 내적 자세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스승과의 마지막 밤을 잠에 소비하지만, 예수님은 마지막 밤을 온전히 기도에 바칩니다. 그분은 세 차례에 걸친 기도를 통해 ‘근심과 번민’ 에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인간적인 고통에서 아들의 신뢰로 넘어갑니다. 히브 5, 7 – 10은 이 밤에 예수님이 어떻게 지내셨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히브 5, 7 – 8)
공생활 시작인 세례 때에, 그리고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후에 있었던 영광스런 변모 장면에서 아버지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마태 3, 17; 17, 5)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공생활의 절정인 수난의 순간에 아들이 ‘사랑하는 아버지’ 를 부르며 자신을 철저히 넘겨드립니다. (마태 26, 39. 42 참조) 이 밤에 예수님은 자신의 뜻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격렬한 싸움을 하고,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넘기는 첫 번째이자 가장 완전한 본보기가 되십니다. 그 고통스런 밤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복된 밤이었습니다. 이 밤의 기도 때문에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모욕과 조롱을 받으며 사랑하는 아버지께 자신을 넘기면서 숨을 거두십니다. (26, 47 – 27, 66)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을 모욕했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합니다. 인간의 판단과 어떤 조롱과 모욕도 그분이 성경에 예고된 당신의 길, 사랑받는 아들로서 고통 받는 종의 길을 가시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에 속한 분,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수난 중에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이사 50, 6) 예수님이 수난 당하시는 모습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는데, 바오로는 서로 갈라져 있는 필리피 공동체에 일치를 위해 예수님의 이런 자세를 지니도록 권고합니다. (필리 2, 5 – 11)
묵상 (Meditatio)
주님, 수난 복음 안에서 당신을 배반하고 모욕하고 조롱하고 죽음에 처하게 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인간적인 지혜로는 당신의 수난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당신 머리에 향유를 부었던 여인의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주십시오. 당신이 수난 때에 지니셨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삼아 우리의 수난을 겪어내기 위해서입니다.
기도 (Oratio)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필리 2, 5)
새벽을 열며
- 조명연신부
저는 시간이 날 때면 서점에 들러서 책을 봅니다. 책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요즘 서점에서는 여러 장르 중에서도 자기 계발서가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을 자기의 단어로 만들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계발 할 수 있는 수많은 지침과 법칙을 전달해주는 이 책들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변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봐도 성공했다는 사람을 만나기란 그렇게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밤 중에 높은 곳에서 창밖을 보십시오. 빨간 십자가가 얼마나 많은지요? 또한 산에 가면 얼마나 많은 절이 있습니까? 그리고 성당 역시도 점점 그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각 종교(사이비 종교 제외)에서 나쁜 범죄 행위를 가르치지는 않을 텐데, 이 세상은 왜 변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종교가 늘어날수록 착한 사람들도 늘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이 사회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범죄가 더욱 더 기승을 부립니다.
이렇게 변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실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계발서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안에 있는 지침과 법칙을 실행해야 하는 것이며, 선(善)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종교가 제시한 선한 행동들을 실행할 때에야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실행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변함이 없는 아니 어쩌면 더욱 더 나쁜 상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들은 ‘성주간’을 시작합니다. 성주간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토요일’까지의 한 주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기간 동안 우리의 구원을 위해 수난과 죽음까지도 피하지 않는 예수님의 모범을 깊이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그 지침을 주님으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배움만으로 그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실천을 통해서만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바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만약 예수님 말씀에 대한 실천 없이 주님께서 알아서 주기만을 바라면서 산다면, 우리들은 과거에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했다가 며칠 뒤에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악을 써 가면서 반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을 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즉,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맞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반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고, 예수님을 도왔던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을 끝까지 실천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가장 비참한 상태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보장받게 됩니다.
성주간의 시작에 선 오늘, 우리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듣기만 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는 절대로 우리 곁에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 보세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김종기신부-
오늘 마태오 복음사가의 수난기를 통해 유다의 배신과 최후의 만찬,
예수님의 겟세마니에서의 기도와 십자가상 죽음의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장면처럼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듯합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와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일들과
인간 관계 속에서 많은 아픔과 고통을 겪으며 생활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상처와 실망으로 몸부림치며 괴로운 나날을 보낼 때도
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순간 우리를 위해
온갖 고난을 다 이겨내시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승리하신 주님을 생각하면
큰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수도자이며, 사제로서의 저의 삶을
되돌아보면 많은 경우 안정과 평화보다는 아픔과 실망 속에서
삶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절망 속에 부르짖었던
십자가의 고통은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헤매는 순간에
용기와 힘을 주고자 하신 예수님의 사랑임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지 가지를 손에 들고 주님을 환영하는 우리의 몸짓은 안락함이나
우리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과의
깊은 연대의식을 갖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수난의 큰 그릇이여!
-김찬선신부-
언젠가 한 제자가 프란치스코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순종이 완벽한 것이고,
가장 높은 것인지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참되게 순종하는 사람을
시체에 비유하여 답하였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곳에 시체를 놓아 보십시오.
움직이게 해도 저항하지 않고,
그 위치에 대해 투덜거리지도 않으며,
다시 자리를 옮겨도 울부짖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상좌에 앉히면 올려다보지를 않고 내려다봅니다.
자주 빛 옷을 입히면 두 배 정도 더 창백해 보입니다.
바로 이 사람이 참되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동되는 이유를 묻지 않고,
어디에 놓이든 관심이 없으며,
다른 곳으로 바꿔 달라고 고집스럽게 말하지 않습니다.
직책이 올라가도 자기의 습관된 겸손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공경을 받으면 받을수록 자신을 더욱 하찮게 여깁니다.”
제가 관구장일 때 수사님 중의 한 분이 돌아가시면서
저에게 유언을 하셨습니다.
나환자들을 위해 사신 분이시기에
다른 나환자들처럼 화장을 해달라고 하셨고
나환자들 가운데 묻어달라고 하셨습니다.
살아계실 때 저는 그렇게 해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형제들과 의논을 하니
화장을 하는 것은 문제없지만
다른 곳에 묻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죄송하지만
수사님을 저희 수사님들이 묻힌 곳에 함께 모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수사님은 왜 내 뜻대로 하지 않느냐고 불평치 않으시고
저희가 모신대로 지금까지 그대로 계십니다.
시체는 이러한 것입니다.
묘지에 모시기 전, 수사님 유언대로 화장을 하였습니다.
화장장에서 일하신 분들이
제가 원하면 화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화로 뒤로 가서 수사님 육신이 타는 것을 다 보았습니다.
몇 백도의 불이 육체를 타들어가도 피하지 않고
파괴자가 아니라 형제인 양 그 불을 다 받아들였습니다.
완전한 수동태인 것입니다.
오늘은 하느님과 똑같으신 분이 야훼의 종이 되어
죽기까지 순종하심을 기리는 수난주일입니다.
수난이라 함은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것이 다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거부하고,
어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거역하지도 않으시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으십니다.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뺨을 내맡기셨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움으로
수치를 당하지 않으시고 부끄럽지 않으십니다.
모욕을 주어도 모욕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몸은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매질 당하고,
수염 뜯기고,
뺨을 맞아도
마음은 꿈쩍 않으시고
깊은 물처럼 고요합니다.
작은 접시의 물은 조약돌 하나로도 온통 출렁거리지만
깊고 큰 호수의 물은 큰 돌이 굴러 떨어져도
한 번 풍덩하고 잠잠해지고 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수난의 작은 그릇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주님은 호수같이 큰 수난의 그릇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작은 모욕으로도 존재가 흔들리고
작은 상처로도 그렇게 아파하는데
주님은 어떤 모욕도 모욕이 되지 못하고
아무리 작정하고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습니다.
모욕은 받는 사람이 당하는 것이지
아무리 주어도 받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싫어하고 거부하는 사람이 받고
좋아하고 환영하는 사람은 받지 않습니다.
좋아하고 환영하면 모욕이 아예 되지 못하기 때문이고
거부하면 할수록 모욕은 커지고
오히려 들러붙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처럼 싫고 좋음이 없이
무엇이든 다 좋은,
수난의 큰 그릇들이 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성주간을 시작하며...
-오상선신부-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로서, 성주간 첫째 날입니다.
우리는 성주간 동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시작으로
지상 생활의 마지막 한 주 동안에 이룩하신 구원의 신비를 경축합니다.
우리는 오늘 특별히 두 가지의 복음 말씀을 듣습니다.
이 두 가지 복음 말씀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단 며칠 사이에 이루어진 극적인,
그리고 상반되는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인파의 환호 속에
영광의 임금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과
바로 이 사람들의 모욕과 질시, 험담 속에
십자가 죽음의 길을 걸어가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상반된 사건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개선 행렬이기보다는
십자가 죽음의 전주곡이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하던
같은 군중들은 어느새,
'바라빠를 놓아주고
그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군중들이 생각했던 평화와 영광은
곧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군중들은 자신의 평화,
즉 권력과 이기심과 탐욕의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함으로서 지탱되는
거짓 평화를 지키기 위해,
사랑과 정의와 평등에 기초한 참 평화를 주러오신,
참 평화 자체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군중들은 서로 먹고 먹힘으로써 상처만이 가득한 자신들의 헛된 영광을 위해
나눔과 섬김으로써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영광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습니다.
소란스러운 군중들의 틈바구니를 헤치고
예수님께서는 담담하게 당신의 길, 십자가 수난의 길,
죽음으로써만 가능한 참 생명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즐기는 무리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서 서럽게 목놓아 우는 사람들,
생사고락을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등진 제자들이
이 길에 함께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길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모든 사람은 이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합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나눠서 지기 위해 함께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못질을 하기 위해 망치를 들고 함께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이야 십자가를 지던 말던 냉랭한 시선으로 바라보고만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십자가 옆에 있다가 행여 자신도 십자가에 못 박힐까봐 두려워서
멀리서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길에 함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느냐?'>라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부터 드디어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성주간의 전례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복음도 예수님의 수난사화(受難死話)이며,
고통의 길을 험난하게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신비를 묵상하도록
우리들을 이끌어 줍니다.
3년마다 복음사가가 바뀌는데
금년은 마태오 복음에 의한 수난사화입니다.
마태오에 의한 수난사화는 그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
주의 깊게 그 내용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태오는 가능한 한 예수님의 고통과 절망의 어두움을 강조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잡다한 곁가지 내용은 잘라 버립니다.
예를 들면,
루가의 수난사화에는 예수님께서 부인들을 위로하시고,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은 자들을 용서하시기도 하시고,
같이 달렸던 도둑 중의 한 명에게 구원을 보증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루가는 용서와 사랑을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마태오는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내용을 전혀 다루지 않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께 고통을 주는 사건만으로 수난사화를 통일하고 있습니다.
그 수난사화에 등장해서 예수님을 짖누르는 사람들의 악의(惡意)에 관해서는
다른 복음서보다도 철저하고 깊습니다.
유다는 대사제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데,
배반의 대가로 돈을 받는 유다의 악의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님과 함께 살고 죽겠다고 맹세했지만
급하니깐 예수님을 거부해 버립니다.
생존본능 때문에 사랑하는 스승이나 친구를 배반하는
인간의 나약함과 의리가 없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대사제들과 장로들의 고약한 심보도 마태오에서는 유난히 두드러집니다.
예수님을 판 대가로 은화를 받았던 유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 돈을 돌려주려고 찾아갔지만,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며 쫓아버리기도 하고,
뒤에서 군중을 선동합니다.
권력과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악랄한 짓도 서슴치 않는
인간의 추한 모습이 여기에 있습니다.
폭동이 일어날까 염려해서,
무력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정치감각을 가진 빌라도와
지도자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군중이 더욱 한통속으로 변합니다.
이렇게 마태오의 수난사화에서는
인간의 추한 욕망이나 이기주의에 의해서 상처받고,
고통에 짖눌려, 죽음을 당하려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부각됩니다.
우리 모든 인간에게 있는 추한 욕망과 죄가
예수님을 덮쳐 버립니다.
상처받고, 고통에 짖눌려 있는 예수님을
그 누구도 위로하거나 도와주려는 자가 없고,
예수님은 고통과 고독의 어두움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가셨습니다.
고통과 고독은 예수님의 뼈 속 깊이 파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의 도움도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절망을 체험하시며 외치십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똑같은 부르짖음을 두 번씩이나 반복하실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상처받으시고, 배신당하시고, 버림받으시며,
하느님의 도움은 한치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상태에서
예수님은 생애를 마치십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고뇌(苦惱)의 절정을 감수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런 죄도 없으시면서 고통의 생애를 보내셨다는 것,
우리들을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이 되시어
고통의 십자가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셨다는 것,
그것은 분명히 놀랄 수밖에 없는 신비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신비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느님의 고통과 괴로움에 의해서 주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설레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이 순간에
이렇게 은총을 받고 희망이 주어지는 뒷면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통이 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랄 뿐입니다.
성주간의 전례를 통해서 다시 한번,
우리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은 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삶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각인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에 감사드리고 기뻐하며,
나의 삶을 바쳐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해야할 것입니다. 아멘.
* 은혜 넘치는 성주간 되시길 기원합니다!
고통은 더 큰 고통을 통해서
-양승국신부-
얼마 전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직접 목격한 일입니다. 번잡하지 않은 낮 시간대에는 각종 생필품을 직접 들고 다니면서 판매하는 분들을 자주 만나게 되지요. 지병이라도 있는지 안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한 중년신사가 생필품 세트를 팔기 위해 제 바로 앞에서 멈췄습니다. 제품의 우수성과 저렴한 가격에 대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하였는데, 자신감 없어 보이는 얼굴표정을 통해 그날 처음 나온 분이란 것을 느꼈습니다.
자신감이 없어서 그런지, 제품을 들고 한 바퀴 돌았지만 아무도 물건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급하게 내리던 한 승객에 의해 제품이 가득 담긴 여행용 가방이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물건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가방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그분은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저 굳은 표정으로 흩어진 물건들을 하나하나 다시 주워 담으셨는데, 유심히 살펴보니 한쪽 팔에 장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보기가 딱했기에 제가 다가갔습니다. 함께 물건을 주워 담으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그래도 힘내세요!"하고 물건 하나를 샀습니다. 근심 가득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다음 칸으로 향해 가는 그분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제 마음이 몹시 슬퍼졌습니다.
때론 이웃들이 견뎌내고 있는 극심한 고통 앞에서 우리는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또 우리가 아직 먹고 살 만하면서 굶어 죽어가는 이들에게 던지는 위로의 말은 별 설득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직 싱싱한 젊음을 유지하면서 말기암환자를 위해 드리는 기도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결국 고통은 더 큰 고통을 통해서, 슬픔은 더 큰 슬픔을 통해서, 좌절은 더 큰 좌절을 통해서만이 극복되고 치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연의 고통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고통의 신비와 의미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갖은 고통의 치유를 위해 더 큰 고통을 몸소 겪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오늘 수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느끼는 슬픔을 덜어주려고 더 큰 슬픔을 선택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죄와 고통, 십자가와 죽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예수님이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먼저 밑바닥 인간의 연약함과 질병과 고통을 직접 짊어지셨고, 고난과 저주의 쓴잔을 기꺼이 마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임종자로서 단말마의 고통, 이국땅에서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서러움을 몸소 체험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고통받고 죽어가는 자와 나란히 누워, 그의 동료로서 위로와 구원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무게가 너무 무거워 죽을 지경인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조금만 참아. 힘내!"하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는 우리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선택하셔서 직접 지고 우리보다 앞서 가십니다.
오늘 고통 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고통인 죽음의 고통을 잘 참아냄을 통해 영광스럽게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한 예수님의 최후를 묵상하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고통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극복해야 할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고통에 대한 의미 부여입니다. 모든 고통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고 나름대로 가치가 있음을 잊지 말길 바랍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성서는 우리가 그토록 부담스러워하고 힘겨워하는 고통 앞에 딱 부러진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한 비법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직접 겪으셨던 그 고통스런 수난과 죽음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없애지 않으셨지만 고통을 겪는 우리 옆에서 함께 고통을 겪으십니다. 우리와 나란히 서서 우리를 위로해주십니다. 우리 눈에서 눈물을 없애지 않으셨지만,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치워버리려 오신 것이 아니고 고통을 설명하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 현존으로 고통을 채우러 오신 것입니다"(클로텔).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27,54)
-김 웅태 신부-
로마의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뵙고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27,54)하고 고백합니다. 점령군들이 자기들이 점령한 지역의 백성들을 아주 우습게 볼텐데, 너무 뜻밖의 반응입니다. 게다가 백성들에게 추앙이 아니라, 오히려 배척을 받아 죽어가는 한 인간에게서 어떤 '하느님성'을 발견했을까요?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장면만을 살펴봅시다. 빌라도 로마 총독이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11)하고 묻자, 예수님은 그렇다 아니다 하고 딱부러지게 대답하지 않으시고 "그것은 네 말이다."(11)라고 다른 차원에서 대답하신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묻는 질문에도 예수님께서는 "총독이 매우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신다."(14) 예수님은 자기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로마 총독 앞에서 살려달라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재판부의 권위를 뛰어넘을 정도로 당당하고 위엄을 지니신 분으로 비쳤다.
백인대장은 총독 빌라도가 그에게서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죄목도 발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가 군중에게 끌려온 것이 그들의 시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18)고, 그를 죽이는 일을 아주 꺼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너희가 맡아서 처리하여라.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24)
그런데도 예수는 끌려가면서도 사형이 마치 자기의 일인 것마냥, 자기가 겪고 넘어가야만 하는 숙명처럼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 어떤 저항의 몸짓이나 저주의 말마디조차도 던지지 않았다. 또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떳떳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단지 한 마디. 하느님께 부르짖을 뿐이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46) 그런데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시작되는 이 시편 22편은 처음에는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부르짖음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노래로 마친다. 죽음 앞에서, 자신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오히려 하느님을 찬미하며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이방인들에게는 거룩하게까지 보였다. 그리고 덧붙여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자, 자신들이 죽인 이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보셨기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믿고 감사드리고 청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생애의 구체적인 순간에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주셨기에 여러분은 주님 앞에 나와 계십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는 예수에게서 구원의 은총을 받으시고 인생의 빛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비수를 품은 신앙인?
-박 영식 신부·-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성지를 축성하고 행렬을 하면서 승리의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재현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입성은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야 비로소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음을 예고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규정을 만들어 놓고 그 규정을 지키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길이라 여겼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는 데에 누구보다 앞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른바 완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규정을 조목조목 따지며 누가 규정을 어기는지 감시하는 데에도 선수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살리는 분이시며 죄인마저 용서하시는 분임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율법 준수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에 정작 하느님의 뜻은 외면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닮지 않았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법대로 살 것을 요구하고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즉시 고발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더욱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고달픈 이를 격려하지 않았습니다. 약한 이들을 때리고 그들의 수염을 뽑았습니다. 죄 없는 사람에게 욕설과 침 뱉음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누리기 위하여 하느님의 이름으로 힘없는 이들을 짓밟고 죽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영광만을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당신의 실체를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분을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필립 2,6-11 참조).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들먹이며 다른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습니다. “도대체 그 사람의 잘못이 무엇이냐?”는 양심의 소리가 들려오면, 그들은 더욱 악을 써가며 자신이 정해 놓은 삶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외쳐댑니다. 무심코 내뱉는 말 한 마디가 그를 한없이 슬프게 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합니다.
그들 역시 외면상 나무랄 데 없는 신앙인입니다. 그들은 오늘도 성지 가지를 흔들며 높은 곳에서 오신 주님께 호산나를 외치지만 가족과 형제를 찌를 비수를 아직도 마음 속에 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나’마저 사랑하시며 당신이 나의 비수를 대신 받으십니다. 굳게 닫힌 나의 마음을 여는 아픔을 감수해야 참된 기쁨을 맛 볼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죽음을 넘어선 사랑
-이기양 신부-
여러분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누가 제일 좋습니까?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면 반대로 열두 제자 중에 누가 제일 싫은가요? 많은 분들이 유다라고 대답하실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유다를 싫어합니다. 주님이라고 고백하던 분을 돈 때문에 배반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음에 처했을 때 주님을 배반한 사람은 유다만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났고, 특히 베드로는 천벌을 받아도 그 분을 모른다는 맹세까지 하면서 세 번씩이나 배반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유독 유다만을 싫어합니다. 유다의 배신행위를 미워하고 거부하는 나의 모습 속에 혹시라도 유다를 닮은 거짓의 그림자를 갖고 있지나 않은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성경에는 유다에 관한 내용이 별로 나와 있지 않지만 죽음과 생명의 시기인 성주간이 되면 마치 자기의 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어둠의 세력과 함께 유다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적대자들에게 넘기기로 작정하고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무리를 대동하고 나타난 유다는 예수님께 다가와 인사합니다.
"스승님, 안녕하십니까?"(마태 26,49)
그는 미리 짠 대로 예수님께 입을 맞춥니다. 다정하게 인사했지만 '자, 이 사람이 예수다. 잡아가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지요. 겉으로는 사랑을 드러내면서 속으로는 배신행위를 한 것입니다. 또 최후의 만찬을 나눌 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21).
그러자 제자들이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하고 묻습니다.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하고 뻔뻔스럽게 발뺌을 합니다. 이렇게 곳곳에 이 겉 다르고 속 다른 유다의 행동이 계속해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유다가 어느 날 은돈 서른 닢의 유혹에 빠져서 예수님을 배반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은돈 서른 닢이라는 유혹이 있기 전에 벌써 유다는 일상의 삶에서 배반의 씨를 키우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적인 태도는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흑심은 위험에 처하거나 자기 이득에 부합되는 결정적인 순간이 와야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어려운 시기가 닥쳐야 이 사람이 진실한 사람인지 거짓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성당에 와서 고해성사를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며 거룩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다가도 사회로 돌아가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가정이나 회사에는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행동하지요. 싸우고 욕하고 시기하며 어떨 때는 비신자보다 못한 삶을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잠재된 배반의 씨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나의 이익이 관계되는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탁 드러나게 되어 있지요. 어쩌면 이것은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완전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자기 그림자를 벗어던지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림자는 떨어질 줄을 몰랐지요. 마룻바닥에 뒹굴고 물속에 뛰어들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림자는 여전히 그를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 하루는 그의 고충을 전해들은 현자가 말했습니다.
"조금도 걱정할 것 없네. 세상에 그처럼 쉬운 일도 없다네."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반색을 하며 그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현자가 말했습니다.
"자기 그림자를 벗어던지고 싶은 사람은 나무 그늘로 들어가면 된다네."
그렇습니다. 우리의 나약한 신앙은 예수님이라는 큰 나무 아래에 깃들 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사랑의 그늘을 드리워주고 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감사드리며 살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는 뜻 깊은 성주간에 신앙과 삶이 일치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주님의 수난 : 십자가의 승리
-조 욱현 신부-
이제 성주간이 시작된다. 전통적으로 이 주간을 “성대주간”(Hebdomada major) 이라 한다. 왜냐하면 “이 주간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죽음이 소멸되며 저주가 사라지고 악마의 노예살이가 종식되어 그에게 빼앗겼던 모든 것을 찾게 된다. 또한 하느님께서 인간들과 화해하시고 하늘의 문이 열리며 인간들과 천사들이 하나로 일치된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을 평화롭게 하신다”(In Genesis Homil. 30 in PG 29,273-274)라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말한다. 이러한 위대한 일들 때문에 이 주간이 ‘승리’의 장면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공경하여 기념하는 ‘팔마 가지’의 축성과 행렬로 시작되지만, 이것이 또한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예수님을 육체적으로 압박하는 음모로 바뀔 것이다.
오늘의 전례는 ‘무죄한 이’를 거슬려 자행되는 이유 없는 폭력으로 꾸며지는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승리’의 기치를 높이 들어 올리신다. 즉 십자가 위에 승리의 ‘팔마 가지’를 높이 매다신다. 이러한 이유로 독서들은 ‘주님의 수난’을 감격적인 뜨거운 사랑으로 되새기고 있다.
제1독서: 이사 50,4-7: 고통 받는 야훼의 종
제1독서는 ‘야훼의 종’의 셋째 노래의 일부만을 전해주고 있는데 여기서 야훼의 종은 굴욕적인 모욕을 당하고 있지만, 하느님께 대한 결코 흔들리지 않는 굳은 신뢰심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 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우지도 않는다. 주 야훼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다”(이사50,6-7).
제2독서: 필립 2,6-11: 십자가 위에까지 순명하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찬가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주 강하게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참담한 ‘모욕’의 여정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능욕’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신성을 ‘비우시고’, ‘벗어버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렇게 하여 스스로를 낮추시는 마지막 단계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기 위해 받아들이신 ‘십자가의 죽음’에서 나타난다(6-8절). 그러나 바오로는 이 그리스도의 참담한 능욕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고 놀라운 부활의 영광을 통하여 ‘영광의 주님’으로 들여 높여지시는 것까지 내다본다(9-11절).
복음: 마태 26,14-27,66: 마태오의 수난기
마태오 복음의 수난기를 전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개념은 ‘자유’이다. 즉 예수께서는 이 ‘자유’로써 죽음을 맞으신다는 것이다.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이끌어 가신다. 당신이 원하셨다면, 피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칼로 대사제의 종의 귀를 쳤을 때 예수께서는,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도 넘는 천사를 보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한 성서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2-54)라고 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다. 이 ‘뜻’ 때문에 자진하여 당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의 손에 당신 자신을 맡기신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26,39.42). 그리고는 세 번째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잠이든 제자들에게 깨어있지 못하느냐고 하시며, “자, 때가 왔다. 사람의 아들이 죄인들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와 있다”(26,45-46)라고 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 ‘때’에 맞춰져 있음을 본다. 그 ‘때’는 예수께서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될 ‘때’이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주시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1).
이 외에도 예수께서 현실에 이끌려 가시지 않고 자유롭게 다스리심을 알 수 있는 말씀이 여러 군데 나타난다. “사람의 아들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죽음의 길로 가겠지만...”(26,24), 또는 “지금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잡으러 왔으니 내가 강도란 말이냐?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언자들이 기록한 말씀을 이루려고 일어난 것이다”(26,55-56). 이것은 모두 아버지의 뜻에 ‘완전한 순명’(필립 2,8 참조)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은 죽지 않을 수 있지만 친구를 위해서 죽는 무한한 사랑에서 나온다. 이러한 사랑의 표지로 나타나는 마태오 복음이다.
또한 마태오 복음의 수난기에는 그렇기 때문에도 예수님을 ‘죽을죄인’(26,66) 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지만, 그분의 ‘무죄하심’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빌라도의 아내는 남편에게 무죄한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하고(27,19), 빌라도는 손을 씻으며 책임을 회피하고, 군중은 책임을 자기들이 지겠다고 한다(27,24- 25). 이렇게 무죄한 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함으로써 그 잘못에 대한 선언을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자신들에게 스스로 하고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길을 달리함으로써 더 이상 하느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다. 그들의 자리를 교회가 대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백인대장의 고백이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지진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하며 몹시 두려워하였다”(27,54).
여기서는 또한 인간들의 잘못이 역설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빌라도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님을 사형장에 내몰고 있지 않은가?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조차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깨닫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분을 단죄하고 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유다는 예수님을 30은전에 팔았고, 베드로는 큰 소리를 치고도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쳤다. 유다처럼 돈을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마저도 팔 수 있는 것이며, 스스로 목을 맨 절망적 행위는(27,5) 지나치게 자신의 목적에만 눈이 어두웠던 행위의 반작용이다.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은 아직도 용기가 부족하다. 빌라도의 모습은 진리나 정의보다 자신의 안이함을 추구하는 양다리를 걸친 자들이며, 많은 형제들의 고통스러운 상황 앞에서 맥을 놓고 있는 사람들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분과 더불어 “단 한 시간도 깨어있지 못하는”(26,41) 사람들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이 수난사는 우리의 문제가 아닌가? 그 비극적 사건의 장본인들이 우리이기 때문에 수난사의 주역들이 무대 위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나 자신이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 어떠한 자세로 있으며 살아가고 있느냐에 따라 수난의 비극을 재현하고 있을 수도 있고,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삶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성대주간을 지내면서 참으로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순간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살아가자.
오늘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묵상하는 날
-서 공석 신부-
오늘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묵상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지금 들은 것은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수난사였습니다. 모든 복음서들이 수난사를 보도합니다. 하나의 수난사이지만, 그것을 기록한 복음서에 따라 이야기는 조금씩 다릅니다. 같은 사실을 겪었지만, 그것을 기록하여 이야기로 남긴 공동체의 신앙 배경과 의도가 다르기 때문에 이야기도 서로 차이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수난사는 빌라도가 “매우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예수님이 침묵 지키셨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이 복음서는 이사야 예언서가 전하는 학대당하는 의인의 모습을 예수님 안에 보았습니다. 이사야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53,7). 마태오복음서는 이 학대당하는 의인을 연상하면서 오늘의 수난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억울하게 죽어가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 의인이라고 이사야서가 예언한 바로 인물이 예수님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을 죽인 책임이 유대인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킵니다. 사형을 언도하고 형을 집행한 사람은 로마 총독 빌라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서는 예수님을 죽인 일차적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빌라도의 아내가 남편에게 사람을 보내어 “당신은 그 무죄한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마십시오”라고 전했다는 일화와 빌라도가 군중 앞에서 손을 씻은 일화는 빌라도가 책임 질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말합니다. “너희가 맡아서 처리하여라.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이 말에 유대인 군중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라고 화답합니다. 이것으로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을 죽인 책임은 유대인들에게 있고,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누린, 구원의 백성이라는 특권을 포기하였으며,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아들을 죽인 민족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가졌다는 말과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기도,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말은 시편(22,1.18)에서 가져 왔습니다. 온갖 역경을 딛고 하느님을 가르치던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서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을 표현하는 기도입니다.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시어” 예수님의 목을 축이게 했다는 말도 시편(69,21)에서 가져 왔습니다. 이것도 의인이 역경에서 하느님에게 부르짖는 기도 시편입니다. 마태오복음서가 구약성서를 이렇게 인용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구약성서가 예고한 의인의 죽음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고, 하느님께 신뢰하면서 목숨을 잃은 의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초기 신앙인들, 특히 마태오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는 예수님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그분이 그렇게 죽어야 했던 의미를 구약성서에서 찾아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면서 인간 생명의 의미를 사람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이 사실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서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10,10). 우리는 우리 손으로 우리의 생명을 보장하려 합니다. 유대교는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이라는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생명을 보장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의 원인이 되는 조건을 채워서 그 조건의 결과인 구원을 얻어내겠다는 것입니다. 소위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를 하느님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이 원리는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 세상의 순리입니다. 예수님은 인과응보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원리를 제시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 원리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병들고 불행한 이들은 모두 하느님이 버린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치고 죄인을 용서하면서 하느님은 사람을 버리지 않으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고치고 용서하시는 아버지라고 예수님은 믿고 계십니다.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를 살리기 위해 계신다는 뜻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믿음과 가르침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주장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 아버지의 일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잃은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존이 위협 당할 때도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믿으셨습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고, 우리를 고치고 살려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이 예수님을 새로운 생명 안에 살려 놓으셨다는 것이 그분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또 “아버지의 뜻이...이루어지게”(마태 6,10)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일을 실천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같이 아버지의 일을 실천하여 그분의 자녀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실천에 몰두하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십자가를 지라고 가르쳤고, 실제 그것을 위해 당신 스스로를 잃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그 기도와 그 실천이 있는 우리 삶의 현장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실천되는 그 현장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이 살아 계시는 곳에 우리의 허세와 우리의 욕심은 사라집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신 분이라 우리가 그 자비를 실천할 때, 우리의 허세는 사라집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 우리가 베풀고 섬길 때, 우리의 욕심은 사라집니다. 그런 것이 사라진 곳에 생명이 회복되고 자랍니다.
생명이 회복되고 자라는 곳에 하느님의 일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수난사는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자 지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변이 일어났다고 말했습니다. 로마 군인 백부장과 다른 사람들이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고도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유대교 세상에 지각 변동과 같은 이변을 일으켰습니다. 백부장의 고백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는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비와 베푸심을 실천한 결과라고 믿으면서 그리스도 신앙이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서는 길
-정호 신부-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한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섭니다. 나귀를 타고 들어옵니다. 무슨 일인지 사람들은 이런 모습에 옛 예언자들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처럼 여기고 그 사람을 향해 환영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누군지도 중요하지 않고 그냥 사람들은 무엇에 홀린 양 가지를 흔들고 옷을 벗어 그 가는 길에 드리웁니다.
사람들이 그 순간에 예수님을 맞이한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들이 환호하며 예수님을 향해 흔들던 그 움직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누군가를 향해 환호하며 떠드는 소리를 보면 우리는 ‘저 사람은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이 되길 바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 수난 성지주일은 주님 수난의 관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이렇듯 나뭇가지를 흔들고 깔고, 자신들의 옷가지 마저 땅에 깔아 예수님을 예루살렘 당신의 도시로 모셔들였지만 우리가 성전에 들어서서 분위기가 돌변하듯 하느님의 실체를 알고 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 몰아 버립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복음의 끝부분에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물었던 말은 그들이 하느님에 대해 얼마나 맹목적이었던가를 보여줍니다.
“이분이 누구냐?”
“이분은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신 예언자 예수요.”
누군지도 모르고 열광하고, 그분이 무엇을 하시는 분인지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하느님이라면 좋아보이고 좋은 일만 있을 것 같고, 그래서 너도 나도 가지를 흔들고 옷을 땅에 깐 것입니다. 그분이 모든 이에게 참 사랑을 전하고 하느님의 진심을 지키려 사람들의 편견에 맞서는 분이심을 알았다면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환호했을지 궁금한 일입니다.
너무 길어 생략된 주일의 본 복음, 곧 수난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 착하기만 한 한 사람의 마지막을 우리는 함께 듣고 보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이 우리가 그토록 믿는다고 고백하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 가슴 아프기만 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단 일주일도 안되는 시간 동안 그분을 향해 손을 흔들던 이들이 곧 바로 살인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도 하느님 앞에서 손을 모으고 입을 열어 그분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두려운 것은 그런 우리의 행동이 도대체 하느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들 흔들기에 손을 흔들고 사람들이 저분이 우리를 잘 살게 해주시리라 하는 말에 내용도 모르고 줄을 서는 사람들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그렇게 섬기고 살지는 않는지 우리의 손이 우리 손에 쥐어진 성지가지들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영문도 모르고 환호하던 사람들이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한 사람이 대답합니다.
“이분은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신 예언자 예수요.”
그분에게 실망하지 않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그분을 향해 손을 흔들 줄 아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매일의 십자가 어떻게 맞을 것인가?
-허성 신부 -
우리 교회에서는 오늘부터 1주일 동안을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우리도 거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이끌어 주고 있다. 그래서 이 주간을 성주간이라 한다.
예수님은 배신한 사도 유다에 의해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노리던 사람들에게 은전 30개에 인신매매를 당하셔서 종교적으로 가장 큰 죄에 해당하는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 되고, 정치적으로도 가장 큰 죄에 해당하는 가이사르 황제를 거역하여 스스로 유다인의 왕이 되었다는 역적으로 몰리어 그 당시에 가장 잔인한 사형방법인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수모를 당하셨다.
십자가의 의미
본래 십자가는 정복자들이 포로들이나 노예들에게 겁을 주어 도주하거나 범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고안해낸 사형 도구였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가장 비참한 죽음의 상징이었고 저주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에는 그 의미가 전연 반대가 되었으니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 승리의 상징, 영광의 상징, 축복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성당의 종탑 위에도 제대 위에도 교우들의 방 벽에도 십자가가 걸려 있고, 신자들의 가슴에는 물론이려니와 심지어는 비신자인 연예인들의 목에도 걸려 액세서리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성직자들은 강복을 하거나 집이나 물건들을 축복할 때에도 십자가를 긋는다. 우리는 식사 전후에도, 기도 전후에도, 일과 전후에도, 운전 전후에도 심지어는 주부들이 밥을 퍼기 전에도 십자가를 주걱으로 긋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 이후에 십자가의 의미가 달라졌지만 모든 십자가의 의미가 다 달라진 것은 아니다. 같은 날 같은 십자가를 지고 같은 길을 걸어 같은 곳에서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은 세사람이었지만 이 세사람의 십자가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셔서 인류를 구원하시고,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을 하셔서 성부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마귀를 발판으로 삼고 계시는 데에 비해 예수님의 오른쪽에서 못 박힌 죄수는 겨우 자기 한 사람만을 구하는 데에 그쳤고 예수님의 왼편에 못 박힌 죄수는 자기 자신마저 구하지 못하고 죽음을 앞당겼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차이가 생겼을까?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성부께 대한 순명과 인류에 대한 용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치열하였는가를 증명하신 반면, 오른 쪽의 죄수는 자기 잘못의 대가로 당하게 된 십자가형을 당연한 것으로 순수히 받아들이면서 예수님께 자신을 온전히 위탁하였으나, 왼쪽의 죄수는 자기의 잘못으로 받게 된 십자가형을 거부하면서 무죄한 예수님께까지 조롱을 퍼부으며 죽어갔으니 그의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을 만류하는 베드로에게 호되게 야단을 치시고는 당신의 제자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 16, 24~25)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싫든 좋든 고통을 즉 십자가를 져야한다. 예수님은 크고 무거운 나무십자가를 지고 가셨지만 우리에게는 매일 매일 크기와 무게와 색깔이 다른 십자가가 찾아오기 때문에 그것들을 품에 안고 가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성호를 등에다 긋지 않고 앞에다 긋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매일 맞이하는 십자가가 어떤 의미의 십자가가 되는가는 순전히 우리의 지향과 자세에 달렸다.
예수님과 같은 지향과 자세로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것이 될 것이고, 오른쪽의 죄수와 같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남에게는 도움을 못 줄 망정 자신만은 구원할 수 있겠지만 왼쪽의 죄수와 같이 자기의 십자가를 거부하면서 발악을 한다면 그 아까운 십자가가 멸망의 도구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떠한 지향과 자세로 십자가를 맞을 것인가?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도 공범자다
-유 영봉 몬시뇰-
[묵상길잡이]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여러 차례 예고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은 유대 지도자들과, 제자들과, 예수를 팔아 넘긴 유다스와,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하며 외치는 군중들이 함께 만들어 낸 공동 작품이었을 알 수 있다.
1.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의 참 원인은 인간의 죄악이다.
오늘은 사순절(빠스카 준비시기)이 그 막바지에 이르고,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건너가는 빠스카 신비가 그 절정을 이루는 성주간이 시작되는 성지(聖枝)주일이다. 나뭇가지를 들고 옷을 벗어 길에 깔며 환호하던 군중들은 현세적 부귀영화를 주며 군림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으로 봉사할 것을 요구하는 메시아였기에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하며 예수로부터 돌아섰던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의 참 원인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때 성혈을 축성하시며 "너희와 많은 사람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흘릴 내 피"라고 하셨다. 이는 당신 자신을 많은 사람의 죄를 사하기 위한 한 마리의 속죄 양으로 바칠 것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사람의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원인인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고 한마디로 예수님의 죽음을 설명한다. 오늘 수난복음을 읽고 구체적으로 예수님 주변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어떻게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데 한 몫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또 다른 십자가의 죽음이 역사 안에 계속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우리 모두가 때로는 그 일에 동참하고 있음도 깨닫자.
2.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공모하였다
그들은 은전 서른 닢을 내주었다.(마태26,1) :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은 "흉계를 꾸며 예수님을 잡아죽이려고 모의한 대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마태26,3-4)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성전 정화'(마태21,12-17)에서 보듯이, 성전세와 장사꾼들에게서 받는 수입원(收入源) 등 자기들의 기득권(旣得權)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는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인물이었다. 어둠은 빛을 거부한다. 예수는 그들에게 있어 '눈의 가시'였다.
안녕하십니까? (마태26,49) : "내가 당신들에게 예수를 넘겨주면 그 값으로 얼마를 주겠소?"(마태26,15) 가리옷 사람 유다는 스승을 그 당시 노예 하나 값인 은전 서른 닢에 팔아 넘겼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것을 보며 "이렇게 낭비를 하다니!"하며 분개한 그였다. 돈 욕심에 눈이 멀었던 것일까? 무력혁명을 마다하는 예수께 대한 실망 때문일까? '돈이 바로 하느님인' 황금만능 풍조에 찌들인 많은 이들에겐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밀고와 배신과 청부살인은 그래서 어디서나 항상 있는 일인지 모른다.
그 때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떠났다.(마태26,15): 현세적인 출세를 꿈꾸며 예수를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스승이 체포되자,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을 피하려고 하나같이 도망쳤다. 신앙 때문에 어떤 불이익이라도 생긴다면 언제나 도망칠 수 있는 신자들은 지금도 많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27,74)하며 세 번이나 배반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무기력한 우리의 모습이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마태27,22): "군중을 움직이는 데는 복잡하고 깊은 철학보다는, 한 두 마디의 선동적인 구호(口號)가 더 효과적이다."라는 말도 있다. 매스컴의 암시에 따라, 덩달아 춤을 추는 여론 재판과 관제 데모, 동원 폭력배, 어용시민단체 등은 요즘도 흔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때로는 진상을 잘 모르면서도, 선입견이나 남의 말만 듣고 '몹쓸 사람'으로, '죽일 놈'으로 단죄하기도 한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마태27,24): 예수님의 죄 없음을 알고 있던 빌라도 총독은 "폭동이 일어나려는 기세를 보고"(마태27,14)예수님의 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 "너희가 알아서 처리하여라."하며 예수를 넘겨주고 만다. 빌라도 총독을 꼼짝 못하게 옭아맨 것은 아마도 "만일 그 자를 놓아준다면 당신은 카이사르의 충신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자는 카이사르의 적이 아닙니까?"(요한19,12)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황제에게 나쁜 '동향보고'라도 올라간다면 정치생명은 끝이 아닌가? 예수님은 정치범이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적 출세를 위해, 무죄한 줄 알지만 한 두 명 아니 몇 천명쯤 죽이는 것은 권력에 눈먼 정치인에겐 아무것도 아니다.
3. 우리도 예수님의 죽음에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예수님의 주변에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기득권 수호와, 자기 욕심과, 비겁함과, 자기 안위와, 정치적 출세를 위해 예수를 죽음에로 내몰았던 것이다. 예수 사건(Christ-event) 은 2천년 전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또 다른 예수 사건이 우리 주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우리도 때로는 이런 일에 동참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들의 죄악이 공모한 작품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죄악과 하느님의 사랑이 극적으로 만난 사건이었다. 이 성주간에 우리의 작은 결점이라도 고치며, 회개로 죄에 대하여 죽고 새로 사는 길을 찾자. 우리는 아무도 예수의 죽음에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랑과 용서의 십자가 승리
-배 광하 신부-
잔인함
나치 독일에 반대하며 저항하다 순교하신 ‘디트리히 본 회퍼 (1906~ 1945)’ 목사는 한 때 스페인에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스페인에서 몇 번 투우장을 찾아가 투우경기를 본 뒤 누이 ‘자비네’에게 이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호산나!’라고 외치던 군중이 돌변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친 이유를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 그런데 투우사가 정확하게 황소를 찌를 때 정신없이 소리를 지르던 군중이 그 투우사에게 불행스러운 일이 닥치자 즉시 동일하게 정신없이 소리를 지르고 휘파람을 부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었단다. 황소가 한 마리 한 마리 죽을 때마다 우리는 점점 더 빠르게 선정주의와 잔혹함이라는 요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분명히 볼 수 있단다.”
군중은 투우사가 정확히 황소의 급소를 칼로 찔러 넘어뜨릴 때에는 환호하며 축하의 박수를 보내지만, 실수로 투우사가 황소의 뿔에 받혀 넘어지면 그 가엾은 투우사에게 야유와 조소의 함성을 보낸다는 내용의 편지입니다.
인간은 대체로 두 가지 행동의 모습을 보입니다. 첫째는 자신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극도의 분노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군중 심리로 작용되면 더 큰 분노와 집단행동이 나오게 되고 끔찍한 폭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둘째는 한번 잔인해진 인간의 심성은 더 큰 잔인함을 부르게 되며 끝내는 피를 불러 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카인은 자신의 뜻에 맞지 않자 이성을 잃어버리고 친 혈육인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여 미치광이로 돌변합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은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나, 예수님의 나라가 이 지상에서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오늘 이렇게 호의를 보이다가도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으면 내일은 야수로 돌변하여 피를 보고야 맙니다. 어쩌면 이 같은 잔인한 모습이 인류가 끝없이 만들어낸 인간의 이중적 추악함이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끔찍한 잔인의 역사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같은 잔인함을 바꿀 수 있는 길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용서의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훗날 예수님께서 수난하실 모습 속에서 폭력을 이겨내시는 사랑을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 50, 6).
수많은 순교자들의 삶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순교하는 그 마지막에도 자신들을 죽이는 박해자들을 미워하지 않고 하느님께 그들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사랑의 기도를 바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처럼 놀라운 기적의 용서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잠시 실패로 끝나 버린 것처럼 보이던 순교자의 삶이나 정신이 다시 부활하여 사랑의 승리로 승화된다는 것입니다.
베트남의 가톨릭 순교자 집안에서 출생하시어 주교가 되시고 베트남 공산당에게 체포당하시어 무려 13년 이라는 죽음의 수용소 생활을 겪으신 ‘구엔 반 투안 (1928~2002)’ 추기경은 당신의 어머니께서 어머니의 4형제를 무참히 죽인 원수들까지 용서하시는 사랑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자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역시도 사랑의 승리를 믿고 베트남 공산당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분의 책에는 무한한 용서의 하느님을 ‘키아라 루빅’의 글을 인용하며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 글을 조용히 묵상하다보면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용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우리가 빛을 갖도록
당신은 자신의 눈을 멀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일치하도록
당신은 아버지와 이별을 겪었습니다.
우리가 지혜를 갖도록 당신은 ‘무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다시 무죄한 사람이 되도록
당신은 ‘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갖도록
당신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도록
당신은 당신한테서 멀리 계신 하느님을 경험했습니다.
천국이 우리 것이 되도록
당신은 지옥을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수많은 형제 사이에서
이 땅의 기쁜 체류를 경험하도록
당신은 하늘과 땅과 인간과 자연에서 추방당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무한한 사랑을 지니신 우리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인간 사랑에 대한 애끓는 어버이 마음으로 죽음의 길, 예루살렘 입성을 강행하신 예수님 사랑의 길이 끝내는 승리의 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승리의 길을 따르라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초대받은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