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008. 묵상글 ( 연중 제27주간. - 포도밭의 여러 비유. 등 )
----------------------------------------------------
231008. 연중 제27주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3.10.08 05:18
연중 제27주일-2017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소작인들에게 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오게 종을 보냈다.”
우리는 3주 계속해서 포도밭 비유를 듣습니다.
연중 25주일에는 포도밭에 일찍 나와 일한 사람에게나
늦게 나와 일한 사람에게나 하느님은 같은 일당을 주신다는 비유를 들었고,
지난주 26주일에는 포도밭에 일하러 가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가겠다고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가지 않은 아들과
안 가겠다고 했지만 뉘우치고 포도밭에 가서 일한 아들의 비유를 들었는데
오늘은 포도밭의 또 다른 비유, 곧 소작인의 비유를 듣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보아라.”
그러니까 앞의 두 주는 포도밭에 개인으로 가서 일하는 데 비해
이번 주는 개인이 아니라 소작인으로서 일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게 되었습니다.
나는 주님 포도밭의 단순 노동자/일꾼인가, 소작인인가?
단순 노동자와 소작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단순 노동자와 소작인은 차이가 없습니다.
포도밭의 소유권이 자기에게 없다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소작인이란 그야말로 소작인이고 일꾼이나 마찬가지로 소유권자가 아닌데
가끔 소작인이 자기 주제파악을 못하고 소유권자로 착각하거나
아예 자기 소유로 만들려고도 하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오늘 비유를 통해
소유권 없는 우리의 가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다른 한 편
내거로 착각하고 소유하려는 교만과 욕심을 버려야 함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기업과 하느님의 사업을
내 것으로 삼으려는 교만과 욕심을 버려야 함은 물론이고,
하느님 기업과 사업을 내 거로 여기는데서 오는 근심걱정도 버려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수도회가 자기가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상대로
가지 않는 것을 보고 생애 후반에 무척 고뇌하였습니다.
그때 프란치스코는 기도 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수도회를 누가 세웠냐? 너나, 나냐?
이 수도회가 네 것이냐 내 것이냐?”
그런데 오늘의 비유는 단순 일꾼과 소작인의 차이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단순 노동자/일꾼은 하느님의 기업이나 사업에 아무 책임이 없고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하는 비해 소작인은 소출의 책임이 있는 존재지요.
그러면 소출의 책임이란 무엇입니까?
책임은 하느님께 지지만 책임의 내용은 하느님 백성에 대한 겁니다.
구약에서 포도밭이란 이스라엘 백성이고
그러기에 포도밭의 소출을 낸다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 백성답게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명을 누리며 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잘 살게 할 수 있습니까?
사랑이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책임을 다하면 백성이 생명을 누리며 잘살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책임지는 것,
이것이 버겁고 그래서 이 책임이 싫습니다.
내 것도 아닌 하느님의 포도밭을 버거운데도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니.
그래서 이것이 짐인지, 아니면 영광인지 모르겠는 때가 있는데
사랑이 없으면,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랑이 없으면 짐일 뿐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고, 지니고 있으며, 그리고 그 사랑이 넘치고,
그 사랑에 감사하면 소작인인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파트너가 되고
하느님 사랑의 공동경작자가 되는 것이니 그것이 무한 영광일 것입니다.
나를 당신의 파트너 삼고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큰 책임을 맡기시다니!
여러분의 기도와 도움 덕분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보살핌 덕분에
바자회가 잘 끝났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어제 바자회가 끝나기도 전에
피정 동반하러 이곳 제주에 와 있습니다.
오늘 너무 늦게 일어나기도 했고
피정 강의 준비를 해야 하기에
새로운 강론을 준비하지 못하고 이전 강론을 올렸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
231008. 연중 제27주간. 김명겸 요한 신부님.
지난 주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비유에서 포도밭 임자는 하느님,
소작인들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
소출을 받기 위해 파견된 이들은 예언자들
그리고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비유를 우리가 알아듣는 것처럼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도 알아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복음사가는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듣기에
이 비유는 거북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고 싶었습니다.
당신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을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 굳이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실 필요가
있었을까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 비유를 알아듣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알아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분 나쁘다는 감정에만
머물러 있을 뿐
자신들의 행동이나 마음은 바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을
직접적으로 지적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잘못이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알아듣고 깨달아
스스로 하느님께 돌아올 기회를 주시기 위한
예수님의 선택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을 비판하시고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을 뉘우치고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위해서 여러 기회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해 주십니다.
스스로 알아듣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입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아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알아듣고도 하느님께 돌아오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더 큰 어려움을 가지고 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에서 벗어난 것이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끝까지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그 어느 한 순간에
그것을 깨달을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럼에도 듣지 않으려고 우리의 귀를 닫거나
듣고도 실행하지 않아
하느님 나라를 빼앗기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231008. 연중 제27주간.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오늘 <말씀전례>는 ‘포도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사야>가 부르는 사랑의 연가(戀歌)인 <제1독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드리리라”(이사 5,1)
여기서, 포도밭을 공들여 가꾸는 “포도원 지기”는 하느님으로, “포도밭”은 유다 민족으로 비유됩니다. 그런데 포도밭을 사랑하는 포도원 지기의 사랑을 배반하고, 포도밭은 엉뚱하게도 들 포도를 맺었습니다. 이에 포도원 지기는 사랑에 상처받고, 무너져 내리는 실망과 쓰라림에 빠졌습니다. 사랑이 배신당한 아픔에 어찌할 바를 몰라 비탄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를 격려합니다.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운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 4,6)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권위에 대해 따져 묻자 들려주신 세 가지 비유 중 ‘두 번째 비유’인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입니다. (지난 주일에 ‘첫 번째 비유’(두 아들의 비유)를 들었고, 다음 주일에는 ‘세 번째 비유’(혼인잔치의 비유)를 듣게 된다.)
이 비유에서는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자비가 더욱더 도드라지게 드러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몇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직접 보내주시기까지 믿음과 자비를 베풉니다. 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했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을 드러냅니다. 곧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약점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약점을 감추는 것이 문제요, 우리의 실수가 아니라 우리가 실수를 통해서도 배우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우리가 잘 모른다는 사실이 아니라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는 것이 문제요,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며, 우리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완전을 요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열매를 잘 맺은 포도밭이 되라고 하십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먼저 결실을 맺을 모든 준비를 우리에게 다 해 주셨습니다. <제1독서>에서 보듯이,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어서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도 마련”(이사 5,2)하여 주셨고, <복음>에서 보듯이, “울타리를 둘러치고는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워”(마태 21,33) 모든 준비를 다 해 주셨습니다.
이토록,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하여도, 우리의 죄를 뛰어넘는 당신의 큰 사랑이 있습니다. 이 큰 사랑으로, 이제 구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토록,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참으로 놀랍습니다.
비유를 마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이는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쳐졌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신비요, 바로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입니다. 우리 주 하느님의 크나 큰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결코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이토록, 주님께서 제게 하신 일은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저를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 둔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이제 도조를 잘 내는 소작인이 되어야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행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로지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내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치는 새 백성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 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
231008. 연중 제27주간.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배은망덕하지 마라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십니다. 넘치도록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요한15,9). 그래서 하느님은 미리미리 사랑의 질타를 하십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가운데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1독서를 보면, 포도밭을 가꾸는 주인의 노고와 정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인은 산등성이에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한가운데 탑을 만들고 즙을 짜는 포도 확까지 만들어 놓고 포도가 송이송이 맺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이사5,1-2). 그러나 생각지도 않게 들포도가 열렸습니다(이사5,4). 온갖 정성을 다했건만 결과는 영 딴판이었습니다. 결국 주인은 울타리를 걷어내고 담을 허물어 망그러진 채 내버려 두게 됩니다. 순을 치지도 않고 김도 매지 않고 황폐하게 두어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덮인 채로 두게 됩니다(이사5,5-6).
이사야 예언자는 이 비유 말씀에서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고,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함을 지적합니다.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이사5,4). 하느님께서 사랑을 주시는 만큼 사랑을 열매 맺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황폐한 밭이라는 의미입니다.
복음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한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훌륭하게 잘 가꾸어 소작인들에게 도지를 주고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고는 추수철이 되어 그 도조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 소작인들이 간이 부었는지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마침내 간이 배 밖으로 나왔습니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이고 그 포도밭을 통째로 먹어버리려고 했습니다(마태21,33-38). 그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았습니다. 그러니 그 주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 소작인들은 욕심으로 화를 자초하여 죽고, 새로운 소작인이 포도원을 경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종들은 예언자요, 아들은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의 포도밭을 잘 가꾸어 소출을 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셨으니, 구원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아무리 귀한 은총을 주어도 관리하지 않으면 그 권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은 하느님의 심판이지만 자업자득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결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고 (예레31,3)말씀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5,8). 그리고 마침내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에페2,4).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에 대한 감사에 인색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두를 다 주셨음에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21,43). 결국은 걸맞은 삶으로 감사할 줄 모르면 죽음에 이르고, 소출을 내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는 돌판에 새기고, 베푼 것은 모래에 새겨라’ 했습니다. 우리는 거꾸로 사는 것이 아닌지요? 늘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갚기는 고사하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루었다고 잘난 체하며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면 그리스도의 평화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시편 50,14은 “사람이 하느님께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페5,20).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면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생깁니다. 억지로라도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면 감사할수록 감사할 수 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행실로써 감사드려야 합니다”(성 필립보네리). “모든 일이 당신의 생각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십시오. 그러면 혼란에서 벗어나 기도 중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교부 실루스).
성경에서 감사를 드린 인물을 몇 명 보면,
아브람은 자기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던 자리에 제단을 쌓아 바쳐 감사를 드렸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하느님께 바치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내 마음은 주 하느님 생각으로 울렁거립니다. 하느님의 은덕으로 나는 얼굴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렇듯이 내 가슴에 승리의 기쁨을 주시니 원수들 앞에서 자랑스럽기만 합니다”(공동번역. 1사무2,1). 다윗은 하느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옮겨 모시고 번제와 친교제를 바친다음 주 하느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복을 빌어주고 아삽과 그의 형제들을 시켜 감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역대기 상16,7).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손을 들어 강복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습니다(루카24,51-53). 예수님도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신 후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11,41).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감사할 일을 찾으십시오.
내가 숨 쉬고 있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공짜로 숨을 쉬고 있으니 많은 빚을 진 것입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각도 은총입니다.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은혜로움인지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이순간 미사를 봉헌하며 주님을 찬미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잔소리 많은 아내를 보고 남편이 말했답니다. ‘여보, 나 부탁이 있는데 당신 벙어리가 될 수 없겠소?’ 그러자 아내가 대답했어요. ‘나도 부탁이 있어요. 당신 귀머거리가 돼 줘요’ 벙어리가 되어달라는 남편이 있어서 감사하고, 귀머거리가 되어 달라는 아내가 있어서 감사하고요. 아내나 남편이 계시지 않는 분은 그런저런 부탁 받을 일 없어서 감사하고요. 자식이 말썽 피우지 않고 잘 자라주어 감사하고, 말썽 피우는 자식이라도 있어서 감사하고요. 무자식이 상팔자라 감사하고… 아픔을 느끼게 만든 자식이 있어서 가슴이 찢어졌지만 그래도 나를 철들게 하니 감사하고… 부모님이 계셔서 감사하고…… 감사합시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고 결코 배은망덕한 사람은 되지 맙시다. 무엇보다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하늘나라를 선물로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31008. 연중 제27주간.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소작인이 주인이 맡겨주신 포도원을 잘 돌보지 않으면 주인은 다른 소작인에게 포도원을 맡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소작인의 비유를 들으면서 저의 경험이 생각났습니다. 1986년에 저는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자대배치를 받기 위해서 기다리는데 인사담당 장교가 저를 불렀습니다. 제가 신학생인 것을 알았습니다. 인사담당 장교는 자신의 아들도 신학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저는 군종성당이라는 포도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덕함과 잘못으로 저는 3개월 만에 군종성당이라는 포도원에서 쫓겨났던 적이 있습니다. 군종신부님은 1년 뒤에 다른 병사에게 군종성당이라는 포도원을 맡겨 주셨습니다. 제가 부족했기에, 제가 잘못했기에 저는 군종신부님을 원망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를 따끔하게 혼내 주었기에 제가 남은 군 생활을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군종신부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선량한 소작인들이 불의한 힘에 의해서, 독재자들에 의해서 포도원에서 쫓겨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나봇’의 이야기입니다. 나봇은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포도원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이 좋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돈을 주고 사려고 했지만 나봇은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포도원을 팔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합 왕의 아내 이사벨은 거짓과 선동으로 나봇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포도원을 빼앗아 아합 왕에게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봇의 억울함을 아셨고, 아합 왕과 이사벨에게 벌을 주었습니다. 해병대 수사단장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고 채 상병의 사망사고를 조사했고, 경찰에 이첩하는 과정에서 ‘항명’이라는 죄목으로 보직 해임되었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한 수사단장은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수사단장은 경찰에 이첩하는 과정에서 부당한 외압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수사단장의 해임을 주도하였던 국방부 장관은 해임되었습니다. 아직 결론이 나지는 않았지만 억울하게 포도원에서 쫓겨나는 사람이 없도록 철저하고도, 명확한 조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9년 교구에서는 제게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라는 포도원을 맡겨주었습니다. 어느덧 4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직원들과 함께 매주 신문을 발행하는 것이 주된 업무입니다. 미주 지역의 한인 성당을 다니면서 신문홍보를 하는 것은 저의 업무입니다. 무탈하게 신문 발행을 하고 있지만 구독자의 감소는 큰 고민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2년 동안 신문홍보를 다니지 못한 것도 원인입니다. 종이 신문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것도 원입니다. 구독자의 감소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초래하게 됩니다. 직원들의 근무일수 조정과 저의 급여 삭감으로 재정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청하며 좀 더 많은 곳으로 신문홍보를 다니려고 합니다. 후임 신부님에게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라는 포도원을 잘 넘겨주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브루클린한인성당’이라는 포도원도 맡겨 주셨습니다. 2020년 8월부터 미사를 하였으니 어느덧 3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제가 도움을 주려고 다녔지만 오히려 저는 공동체와 함께 지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포도원에는 때로 원하지 않는 일들이 생기곤 합니다. 분열의 씨가, 두려움의 씨가, 갈등과 걱정의 씨가 들어오곤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했습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면, 우리가 사랑한다면 그 어떤 시련도, 고난도, 아픔도 우리를 하느님과 맺어주신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포도원 소작인의 자세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끝으로,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맡겨 주신 포도원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 가족, 이웃이 포도원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포도원을 잘 가꾸면 좋겠습니다.
----------------------------------------------------
231008. 연중 제27주간.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읽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참으로 미련하다. 어떻게 주인을 거슬러서 아들까지 죽일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아들을 죽이면 그 밭이 자신들의 소유가 될 거로 생각했을까? 또 소출을 보내지 않으면 마지막에는 주인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 미련하다 미련해, 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복음을 읽고 우리가 모두 할 수 있는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아도 소작인들은 바보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보 같은 일이 가끔은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소작인들이 포도밭은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삶을 우리의 하루를 우리의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물론 맞습니다. 우리의 것입니다. 포도밭이 소작인에 의해 운영되고 키워지듯 오늘도, 삶도 우리의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밭도 우리의 삶도 모두 주인에게서 받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 하느님에게서 말입니다.
그것을 알고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소작인들을 보면 잘 알 수 있겠지요. 그러나 소작인들은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소작인들이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 정작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오늘 하루에 감사하고 있는지, 또 하루를 살면서 하느님께 보낼 소출을 준비했는지 말입니다.
짧은 기도라도, 작은 사랑이라도, 용서와 이해, 봉헌이라도 준비했는지 말입니다. 하느님이 원하는 소출은 돈도, 어떤 결과도 아닙니다. 단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것, 나의 주인으로, 그래서 그분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 사랑하려고, 용서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신이 주는 선물
일본에는 ‘아이누족’이라는 부족이 있다고 합니다.
이 부족은 이렇게 믿는다고 합니다.
신이 동물의 가죽을 쓰고 나타나서 사람에게 고기를 선물한다고 합니다.
즉 사냥의 명수는 사냥 기술이 좋은 사람, 혹은 용맹한 사람이 아니라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의 활과 창에 신이 잡혀준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자연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도 이 내용은 충분히 소화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고 우리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
231008. 연중 제27주간.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마크 배터슨(Mark Batterson)이 쓴 ‘올 인(All In)’이라는 책에는 선교사 밀른(A.W.Milne)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남태평양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원주민들이 사는 곳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사실 이곳은 원주민들이 앞서 파견했던 선교사 모두를 살해했던 곳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떠난 것입니다. 그에게는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개의치 않고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이미 죽었다면서 자기 관을 싸 들고 갔다고 합니다. 결과는 35년 동안 원주민에게 살해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함께 잘 살았습니다.
35년의 삶을 마치고 주님 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 후, 원주민들은 그를 마을 한가운데에 묻고 다음과 같은 비문을 남겼습니다.
‘그가 왔을 때 빛이 없었다. 그가 떠났을 때 어둠이 없었다.’
세상의 빛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은 세상에 주님의 빛을 비추고 있느냐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사랑의 대상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지 못한다면, 또 미워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면 빛이 아닌 어둠을 더 넓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선교사 밀른(A.W.Milne)의 35년 삶을 평가한 원주민들의 평가를 보며, 나의 삶을 모두 마치고 나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평가를 하실까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삶이 후회되지 않는 삶이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못된 포도밭 소작인들의 비유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맡겼지만, 소출을 주인에게 주지 않습니다. 소출을 받으러 온 종을 매질하고 또 죽이기까지 합니다. 더 많은 종을 보내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없으면 상속 재산을 차지할 수 있다면서 죽여버립니다.
이렇게 위험한 곳에 아들을 보내는 부모가 있을까요? 그리고 부모의 명령이라고 위험한 곳이라도 기꺼이 가는 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포도밭 주인도 또 그의 아들 역시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임금들과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맡기셨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계획을 거부하고 예언자들을 잡아 죽였지요. 심지어 외아들이신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듭니다. 결국 소작인인 임금들과 사제들과 원로들을 내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포도밭을 맡기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에 맞게 이 포도밭을 가꾸고 있나요? 혹시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는 생각에 주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못된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아버지의 뜻을 철저하게 따랐던 외아들 예수님처럼, 우리도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순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이신 주님께 인정받습니다.
---------------------
오늘의 명언: 산을 움직이려 하는 이는 작은 돌을 들어내는 일로 시작하느니라(공자).
---------------------
----------------------------------------------------
231008. 연중 제27주간. 키엣 대주교님.
우리의 삶인 포도밭
유다사람들은 포도밭의 주인인 하느님께 가장 먼저 선택된 사람입니다.
유다사람들의 역사는 주님 사랑의 역사입니다. 사랑의 은총으로 악랄한 애굽의 노예와 픽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나라를 갖게 되었고 주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 그들을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사랑을 배신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자신들을 가르치러 온 주님의 사람들을 죽였고 주님의 포도밭을 가로채기 위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죽였습니다. 그 결과 포도밭은 파괴되고 황폐해졌고 그들의 삶도 짓밟히고 소멸되게 되었습니다.
포도밭의 유다사람들은 우리 모두를 의미합니다.
포도밭이 짓밟히는 위기를 알려주는 양심의 탑과 도둑들로부터 보호하는 울타리는 바로 교회의 규율이며 사회의 규율입니다.
우리의 일터인 포도밭은 포도를 수확하고 짜고 거르고 발효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향기가 나는 포도주가 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일터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주님이시라는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성공은 나의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패의 순간에만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께서 만들어주신 양심의 탑을 허물었기에 생명의 위협과 파괴를 느끼지 못합니다. 규율의 울타리를 허물었기에 영혼의 포도밭은 유린되고 있습니다. 노동이 싫어 삶의 터전인 포도밭을 버렸기에 어떤 소득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운명을 주신 주님을 믿으십시오. 주님께서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밝은 미래를 주실 것입니다.
거짓과 참, 선과 악, 검은 색과 흰색을 구별하고, 미래를 위해 가장 아름다운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양심의 탑의 울림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사회의 규율과 법을 따르고 교회의 법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회의 달콤한 유혹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는 길입니다.
세상의 온갖 유혹과 사회의 정의를 파괴하는 편견의 소리들을 피해 성실하게 나의 일에 열중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성공할 수 있는 오직 단 하나의 열쇠입니다.
시작은 새로운 은혜이며 새로운 책임을 지니게 되는 시기입니다. 많은 것을 받고 많은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 중에는 이로운 것이 많지만 그 이로움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사회를 위해, 교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필요한 것이어야 합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나 자신, 나의 내면과 행동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주님, 저희가 주인이신 주님을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리고 나 자신보다 가정과 교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내려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봅시다.
1. 주님께서는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생명과 나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2. 주님께서는 나의 주인이심을 자각하고 있습니까?
3. 사회의 발전, 개인의 발전은 책임이기도 합니다. 나의 삶의 발전을 위해 지고 있는 책임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말씀의 실천
1.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나 자신, 나의 내면과 행동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사회에 대한 불만, 가족에 대한 불만을 말하기 전에 나의 생각과 행동을 먼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
231008. 연중 제27주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는 모두 주님의 소작인이다
-착한 소작인의 삶-
참 어렵고 힘든 것이 사람이, 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평생 공부가 참 사람이 되는 참내가 되는 공부입니다. 평생 공부해도 될까말까한 참사람되는 공부입니다. 새벽 인터넷 동영상 하나를 잠시 봤습니다. 장자 명언 8가지 이런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 뒷통수 친다는 것입니다.
이간질하는 사람, 음흉한 사람, 단점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무례하고 불손한 사람, 자기말만하는 사람, 고마워할줄 모르는 사람, 아첨과 아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정말 공감이 가는 말마디 였습니다. 사람은 살아온대로 삽니다. 사람은 고쳐쓸수가 없다고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하나? 어떻게 참사람으로 살 수 있나? 고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을 약육강식, 생존경쟁, 각자도생, 승자독식의 시대라합니다. 인간관계도 답이 없어 참 어렵습니다.
8월 중순부터 해온 제 영적습관도 도움이 될 듯하여 다시 소개합니다. 저는 기상하여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성호경과 주모경을 소리내어 바친후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 양손을 활짝 펴고 소리내어 만세육창 및 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세상이 하두 어지러우니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릅니다. 이 또한 참사람이 되기 위한 분투의 노력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여러분은 여섯 번째 “우리 가정 만세!”로 바꿔부르면 됩니다. 그리고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다.” 라고 고백합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신간 소개에 나온 책 제목과 일부 소개된 내용에도 공감했습니다.
“거룩하라, 세상적이지는 마라(Holy, not Worldly)”
책 제목입니다. 이래서 가톨릭 신자들의 평생교육에 평생성사가 되는 성체성사와 고백성사가 참 좋으니 책 제목대로 살 수 있는 은총을 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속에서 살지만 세상적으로 살지 않고 거룩하게 살게 합니다. 참사람이 되는데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기도-회개-말씀-성체가 포함되어 있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면서 늘 새로워지면서 주님을 닮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교황님의 책 서문내용입니다.
“신자들의 삶은 전쟁입니다. 우리 자신을 닫아버리려는 유혹을 극복하려는 내적전쟁입니다. 우리의 행복을 갈망하는 우리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안에 사시도록 노력해야 하는 전쟁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전쟁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우리 안에서 승리하도록 할 때, 우리는 완전히 고양되고 우리 존재는 무한한 분의 광채에 의해 빛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추종자로서 우리가 수행해야할 전쟁은 무엇보다 영적 세속성에 대한 전쟁입니다.”
이래서 우리 믿는 이들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오늘 복음의 악한 소작인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비유라기 보다는 우화라 함이 맞습니다. 포도밭이 상징하는바 세상이요 포도밭 소작인들이 상징하는 바,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니 그대로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오늘날 역시 복음의 악한 소작인들 같은 이런 배은망덕한, 무지막지한 제 분수를 모르는 무지한 탐욕의 사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대로 지옥도와 같은 복음장면이요 오늘의 세상같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을 무자비하게, 심지어는 주인의 아들까지 살해하지 않습니까! 이런 예언자들에 대한 박해는 예나 이제나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살해된 아들은 우리 구원자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악의 승리인 듯 하지만 궁극에 하느님의 승리, 파스카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말씀이 답입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느냐?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줄 것이다.”
아, 바로 우리의 신원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임받은 착한 소작인이라는 것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기반基盤으로 하는 주님의 착하고 성실한 소작인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랑스런 신원입니까! 파스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영적전쟁은 백전백승이요 언제나 주님의 착하고 성실한 소작인답게 살게 해줍니다.
이런 영적승리의 삶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그러니 이런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를 위임받은 우리 소작인의 우선적 책무責務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참사람의 참내가 되고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다음은 회개의 삶입니다. 끊임없이 선택하고 훈련하고 습관해야 할 회개입니다. 이런 참된 회개 없이는 살아온대로 삽니다. 사람을 고쳐쓸 수 없다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포도밭의 노래에 나오는 주님의 탄식에 대한 답도 회개뿐입니다.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 유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나무라네.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흘림이 웬말이냐?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말이냐?”
그대로 오늘의 불평등과 불의가 만연된 포도밭 세상에 대한 주님의 탄식같습니다. 바로 이런 지옥같은 세상속에서 세상의 빛이 되어, 세상의 소금이 되어 천국을 살아가야할 우리 믿는 이들에게 회개의 여정의 삶은 절대적입니다. 바로 회개의 은총이 우리를 무지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속적이 아닌 거룩한 삶을,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끊임없는 회개없이는 광야인생중 괴물이나 악마,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회개의 은총만이 용서받고 치유받아 건강한 정신, 건강한 마음, 건강한 영혼으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며 살게 합니다. 구체적으로 바오로가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하늘나라 소작인들인 우리에게 참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바오로를 대신 하여 말씀드립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
자나깨나 우선적 할 일은 기도입니다.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의 삶이 영적건강,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그리고 다음의 덕들을 간절히 추구하고 마음에 간직하는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바로 다음의 덕들을 선택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말끔도 고무적입니다. 용기와 힘을 줍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선택하여 마음에 품고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이래야 품격있는 거룩하고 고결한 인품의 맑고 향기로은 참사람의 주님의 소작인들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거룩하고 덕스런, 착하고 성실한 주님의 소작인들로 살아가는데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
231008. 연중 제27주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직>
나를 향한
하느님의 믿음에
오직
하느님을 향한
나의 믿음으로
나를 향한
하느님의 희망에
오직
하느님을 향한
나의 희망으로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오직
하느님을 향한
나의 사랑으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