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偶像)은 무엇인가? 베풀/시(施), 시주(施主)의 어원
'나를 위해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마라'는 반대로 나를 위하지 않는 우상은 필요하고, 만들 필요는 있다는 역설이다. 몸이 없으면 마음도 없듯이 몸은 없어서는 결코 안 되는 존재이다. 그러나 몸과 마음을 구분하면, 마음이 참 나 곧 주(主)가 되고, 몸은 겉 나 곧 종(從)이 된다는 뜻이다. 종(從)은 당연히 주(主)를 쫓는 것이지 어찌 종을 따르고 주를 버리려는 것이냐를 힐난하시는 것이다. 몸은 마음을 감싸고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 하신 까닭이다.
말은 얼을 담은 집이다. 하여 마음의 집이다. 집은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폭을 좁히면, 우리말 자음은 그릇이고, 모음은 젓가락과 숟가락이다. 예를 들어 'ㄱ'은 태음(太陰)을 담는 그릇이고, 'ㄴ'은 태양(太陽)을 담는 그릇이다. 'ㄷ'은 소음(少陰)을, 'ㄹ'은 소양(少陽)을 담는 그릇이다. 하여 밥상이 글이고 말이다. 하여 우리말은 하나님의 얼(하나님의 말씀)을 천지인 · 음양 · 오행의 그릇으로 담아 차린 밥상이다. 곧 천지인과 음양오행을 담는 자음의 그릇이다.
그릇은 안에 내용물이 담겨야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담는 데만 쓰인다. 비워지면 그 역할도 끝나는 것이다. 우상 곧 허수아비는 새만 쫓으면 된다. 우상은 악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는 그릇이다. 밥에 이물질이 묻는 것을 막는 그릇과 같다. 그릇 없이 밥도 없다. 밥을 짓는 것이 밥솥 그릇이요, 담는 것도 그릇이다. 밥은 얼이고 그릇은 우상 곧 보자기이다. 밥그릇은 밥을 담고 국그릇은 국을 담는 것이다. 젓가락과 숟가락도 그릇이다. 모음의 그릇이다. 하여 밥도 그릇으로 먹을 수 있다. 오늘날 언어의 식사는 무엇을 담은 그릇인지 모르고 하는 식사와 같다. 그릇 안의 내용물은 모르고 겉만 보고 지레짐작으로 하는 식사이다. 하여 먹을 때는 배부른데 돌아서면 이내 허기를 느끼고, 다시 과식과 과음을 하게 되어 과체중(비만)이 되는 이유이다. 화려한 그릇의 달콤한 맛 같은 착시효과에 속아 편식하기 때문이다.
우리말 보시기는 작은 사발을 뜻하는 그릇이다. 하면 '보[보듬다] + 시[(씨(얼/마음), 시게(곡식)] + 기[명사형 전성어미, 그릇]'의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말 '보시'는 '절이나 중 또는 가난한 이 등에게 돈이나 물품을 베풂, 또는 베푸는 그 돈이나 물품'을 뜻하는 말이다. 한자어로 '포시(布施)'로 쓰기도 하지만, 서로의 개연성이 불분명하다. 그러면 '보시'의 어원은 무엇일까? 보시기에서 유추하면, 얼을 담는 조그만 그릇 곧 탁발승(托鉢僧)이 '보시'로 밥을 동냥하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불교용어로서 원어명은 dāna이고, 단나(檀那) 등으로 음역하기도 한다. 포시(布施)의 한역에서 '보시'가 유래되었다고 대체적으로 보는 듯하다. 보시는 육바라밀의 첫째 덕목이다. ‘부처되기’를 목표하고 수행하는 사람이 보살(菩薩)이고, 보살이 닦아야 할 여섯 가지의 덕목이 바로 육바라밀이라 한다. 여러 가지 보시 중에 특히 재보시(財布施)는 흔히 시주(施主)돈으로 불린다.
시주는 왜 하는가? 시주(施主)의 뜻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베풀/시(施)는 형성자로 언(㫃)은 의미부분이고, 야(也)는 발음 부분이다. 언(㫃)은 깃발을 그린 상형자이고, 현재는 언(㫃)부가 없어서 방(方)부에 넣고 있다고 옥편은 설명한다. 이해하기가 힘들다. 도대체가 베푸는 일과 깃발에 무슨 개연성이 있는 것인가? 또한 글말 '시'와 '야'는 너무 동떨어진 발음이다.
'베풀다'의 우리말은 무슨 얼개일까? '베 + 풀다'로 분석하면, '베(布)를 풀다'는 뜻이다. 우리말 '몸을 풀다'는 해산(解産)하다 곧 ‘애를 낳다’는 뜻도 있다. 그러면 '베를 풀다'는 베(옷감, 천)을 낳다 곧 베를 짜다, 씨실과 날실을 엮어(배어, 짝지어) 짜서 펼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말 뜻 그대로 '베를 (짜서/잉태하여) 풀다'는 뜻이다. 베푸는 행위와 견주면, 베의 씨앗을 풀다(뿌리다) 곧 한 알의 밀알(밑거름)이 되게 하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한말글 시(施)를 다시 분석하면, '방(方) + 인(人) 또는 면(宀) + 야(也)'의 회의자로 볼 수 있다. 방(方)은 본래 쟁기를 상형한 글자라 하고, 야(也)의 금문 자형은 짝짓기의 자형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쟁기로 밭을 갈아[방(方)] 짝지어(씨를 뿌려)[야(也)] 감싸[면(宀)] 심다[시(시므다)] 또는 시키다[시(시기다)]'의 의미로 재구성할 수 있다. 면(宀)의 자형이 인(人)으로 변함은 어원의식이 희미해지면서 또는 '밭을 갈아[방(方)] 짝지어(씨를 뿌려)[야(也)] 씨를[시] 틔우다[人(일으켜 세우다)]'의 의미전성으로도 볼 수 있다. 어쨌거나 우리말 '베풀다'의 말자취 그대로임을 알 수 있다.
주인/주(主)는 주(丶)의 글말과 왕(王)의 형성자라면, '왕(王)으로 주어진[주] 자'이고, 촛불을 상형한 상형자라면, '촛불[주(主)]이/을 주어진(쥐어진 / 주는)[주] 자' 곧 '불 밝혀 주는 자'를 이름이다. 나아가 '붓다/ 메시아(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뜻이다. 하여 시주(施主)는 '메시아(왕, 붓다)의 씨(밀알)에 밑거름이 되게 하다'는 뜻이다. 하여 시줏돈은 그렇게 쓰이는 돈을 의미한다. 남을 위한 베풂은 나도 위함이지만, 나를 위한 베풂은 나만을 위하는 것으로 남을 위함은 되지 못한다. 나만을 위함은 공생/상생의 적인 암이기 때문이다.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 같은 비루한 자라도 그리스도의 씨앗이다. 그런 씨앗들이 속절없이 버려짐을 없애기 위한 밑거름의 돈이다.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돈(우상, 몸)을 좇지 않고 마음(성령)을 좇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음식은 필요하다. 하여 탁발로 연명하는 삶을 택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그런 사람들이기에 돈에 초월할 수 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만이 진정 불우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공정하게 베풀 수 있다고 보고 시주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