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의 푸른 계절
살다 보면 마음에도 색깔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날은 잿빛이고, 어떤 날은 노을처럼 붉다. 봄날의 연둣빛처럼 설레는 때도 있고, 깊은 겨울밤처럼 모든 빛이 사라진 듯한 때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마음은 무슨 색일까. 푸른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선 순간, 문득 대답 하나가 떠올랐다. 푸른색이었다. 하늘과 바다 사이 어디쯤에 있는,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깊고 맑은 푸른빛.
젊은 날에는 아름다움이 젊음의 몫인 줄 알았다. 피부가 팽팽하고 머리카락이 윤기 나며 무엇을 입어도 잘 어울리던 시절, 우리는 그것이 오래도록 곁에 있을 것처럼 살았다. 그러나 세월은 참 성실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우리 곁을 지나간다. 어느 날 거울을 들여다보면 눈가에 가느다란 선 하나가 생겨 있고, 또 어느 날에는 흰 머리카락 한 올이 햇빛에 반짝인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시간의 얼굴을 닮아 간다.
한때는 그것이 서운했다. 젊음에서 멀어지는 일이 마치 아름다움에서도 멀어지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진 속 젊은 나를 바라보다가 지금의 얼굴을 만져 본 적도 있다. 그때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꽃처럼 피어나던 날들은 정말 지나가 버린 것일까. 그런데 살아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꽃에도 피는 시기가 다르듯 사람에게도 저마다의 계절이 있었다. 봄에 피는 꽃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한여름의 능소화도 아름답고, 가을의 국화도 아름답다. 눈 내리는 겨울 산에서 붉게 남아 있는 열매 한 알도 충분히 눈부시다. 아름다움은 젊음이라는 한 계절에만 머물지 않았다. 다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었을 뿐이다.
푸른 드레스를 입은 날이었다. 옷자락이 발끝까지 물결처럼 흘러내렸다. 햇살이 닿을 때마다 작은 은빛 장식들이 반짝였다. 소매를 스치는 바람이 가볍게 지나갔고, 드레스 자락도 따라 흔들렸다. 문득 내가 바다 한가운데 서 있는 듯했다. 푸른 물결을 한 겹 한 겹 몸에 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거울 속의 여자는 더 이상 젊은 날의 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날은 젊어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의 얼굴이 좋았다. 웃을 때 생기는 눈가의 주름도, 세월이 조금씩 내려앉은 얼굴선도 싫지 않았다. 그것들은 내가 지나온 날들의 흔적이었다. 웃었던 날도 있고 울었던 날도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도 있었고 헤어진 사람도 있었다. 무엇인가를 얻어 기뻐했고, 무엇인가를 잃고 오래 마음 아파하기도 했다. 그 모든 시간이 얼굴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주름은 시간이 남긴 문장인지도 모른다. 한 줄 한 줄 살아낸 이야기다. 젊은 날의 얼굴이 아직 쓰이지 않은 백지라면 지금의 얼굴에는 제법 긴 이야기가 적혀 있다. 지우고 싶은 문장도 있고 다시 읽고 싶은 문장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내 것이 아닌 것은 없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봄·여름·가을·겨울에 비유한다. 젊음은 봄이고 중년은 가을이라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사람의 삶이 그렇게 계절표처럼 정확하게 나뉠까. 나이가 들었다고 마음까지 가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순의 마음에도 봄이 찾아오고, 일흔의 가슴에도 한여름 소나기 같은 설렘이 내릴 수 있다. 여든에도 처음 보는 꽃 앞에서 걸음을 멈출 수 있고, 아흔에도 새로운 친구를 만나 웃을 수 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나이로 계절을 세지 않으려 한다.
가슴이 뛰는 날이 봄이고,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는 날이 여름이며, 지나온 시간을 감사하게 바라보는 날이 가을이다. 그리고 잠시 쉬어 가고 싶은 날에는 겨울이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한 번의 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 봄은 몇 번이고 돌아온다.
푸른색은 묘한 색이다. 하늘의 색이면서 바다의 색이다. 가까이 잡을 수 없으면서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고개를 들면 하늘이 있고 길 끝에는 또 다른 하늘이 기다린다. 바다는 끝없이 밀려왔다가 물러나면서도 제 빛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푸른빛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쪽이 넓어진다. 아직 갈 곳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날에는 앞만 보고 걸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뒤처질 것 같았다. 누군가보다 잘해야 했고,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했다. 행복마저 목표처럼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되었다. 삶은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는 경주가 아니었다. 때로는 길가에 핀 꽃 한 송이를 바라보느라 늦어도 괜찮았고, 나무 그늘 아래 잠시 앉아 쉬어도 괜찮았다. 돌아가는 길에서도 뜻밖의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는 조금 천천히 걷고 싶다.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고, 계절이 바뀌는 냄새를 알아차리고,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날에는 하던 일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고 싶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차 한 잔을 더 마시고,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이 나이에 무슨’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한번 입어 보고 싶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하지 못하는 일이 늘어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남의 시선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일이기도 하다. 젊은 날에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자주 생각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남이 정해 놓은 아름다움보다 내 마음이 편안한 아름다움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날 푸른 드레스가 좋았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화려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을 입은 내가 기뻤기 때문이다. 거울 앞에서 웃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아직 괜찮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운 계절을 지나고 있었다. 우리는 자꾸 지나간 시절을 황금기라고 부른다. 가장 젊었던 날, 가장 사랑받았던 날, 가장 빛났던 날을 떠올리며 그때가 좋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만 황금기라 부른다면 오늘은 언제 빛날 수 있을까. 오늘도 언젠가는 그리워할 과거가 된다. 지금 웃고 있는 얼굴도 십 년 뒤에는 가장 젊은 얼굴이 된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오늘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오늘은 내 남은 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다. 그러니 아껴 두었던 옷을 입어도 좋겠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도 좋겠다. 가 보고 싶었던 곳으로 길을 나서도 좋겠다. 배우고 싶었던 것을 시작하기에 늦었다고 말하지 않아도 좋겠다. 인생에서 늦은 계절이란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달력 속에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었다. 푸른 옷자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 순간 드레스가 아니라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오래 접어 두었던 날개 하나가 천천히 펴지는 듯했다. 나는 웃었다. 예전보다 조금 깊어진 웃음이었다. 젊은 날의 웃음이 햇살이라면 지금의 웃음은 햇살을 오래 품은 저녁빛에 가까울 것이다. 눈부시게 밝지는 않아도 오래 바라볼 수 있는 빛. 많은 비와 바람을 지나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온기가 그 안에 조금쯤 들어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젊음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 시절은 그 시절대로 아름다웠고, 지금은 지금대로 좋다. 다시 스무 살이 된다면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과 걸어온 길과 마음속에 쌓인 수많은 이야기를 다시 처음부터 살아야 할 테니까. 나는 지금의 나를 데리고 앞으로 가고 싶다.
조금 느려도 좋다. 가끔 쉬어도 좋다. 길을 잘못 들어 돌아가도 괜찮다. 아직 보고 싶은 풍경이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며 쓰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면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푸르다. 그 푸른빛 아래 서 있으니 문득 알 것 같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지나간 어느 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오늘, 새로운 것을 꿈꿀 수 있는 오늘, 작은 것에도 마음이 설레는 오늘이 바로 가장 좋은 계절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계절 한가운데 서 있다. 내 생의 푸른 계절은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 어쩌면 이제부터, 더 깊고 아름답게 푸르러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