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경북 안동군 일직면 일직동에서 영남의 석학인 부친 남정한의 3남매중 막내딸로 태어 났다고 합니다.남자현은 독립 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고 하는데요.그녀의 남편인 김씨는 왜군과 전투 중에 전사를 하고 맙니다.이러한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은 남자현 여사님은
복수심이 불타올라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요. 그 이후 그녀에게 남편의 복수를 하게 되는 계기가 생기게 됩니다.바로!! 3.1운동 때인데요. 그녀는 항일 구국하는 길만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그래서 3월 9일에 그녀의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 요녕성 통화현으로 이주를 하여 서로군정서에 가입을하게 됩니다. 그렇게하여 북만주 일대에 약 12개의 교회를 건립하였으며, 여성계몽에도 힘을 써서 노력하여약 10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성신장과 자질향상을 주력했답니다.또한, 남만주 각지를 순회하면서 동포간의 단합과 군자금 모집을 위해 많은 활약을 했답니다.그리고 암살 활동도 했는데요. 바로 1925년에 채찬, 이청산과 함께 그 당시 총독인 사이토를 암살 하기로 한계획을 세웠으나 아쉽게도 미수에 그치고 실패를 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그래도 암살 활동 까지 하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암살에 실패를 했지만 그녀는 독립 활동을 열심히 했답니다.1928년에 그 당시에 안창호, 김동삼 등의 47명이중국 경찰에 검거 되었을때 석방운동을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또한 김동삼이 하얼빈에서 붙잡혔을때 김동삼을탈출시키기 위해서 여러 노력을 했지만 실패를 했다고 하네요.그후 1923년에 국제연맹 리튼조사단이 하얼빈에 오게되자, 흰 수건에 한국독립원 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내어우리나라의 독립을 알리는 활동도 했답니다. 이렇게 많은 독립활동을 기여한 남자현 여사는 동지와의 연락 및 무기 운반 등의 임무를 띠고 걸인노파 차림으로 하얼빈 교외 정양가를 지나다가 결국 일본 경찰에 붙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감옥 안에서 15일동안 단식투쟁을 벌였고 6개월간의 고문과옥중 생활로 인해서 사경에 이르게 되었는데요.이때 일본 경찰은 그녀를 석방 시켰는데요.하지만 남자현 여사는 석방 나오고 난 뒤에 결국 순국하고 말았답니다.광복 이후에 그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답니다.이렇게 남자현 여사는 그당시에 독립을 위해서 열심히
독립활동을 노력한 여성 독립운동가임을 알수가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