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책, ‘옹정제’는 재평가 되었다.
옹정제는 청나라 제5대 황제다.
강희제의 넷째 아들로, 부황이 열어젖힌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어나간 군주이다. 강희제의 치세가 워낙 길었기에 비교적 늦은 나이에 즉위하였고, 이후 13년 동안 재위했다.
부친 강희제와 아들 건륭제의 재위기간이 각각 60년으로 길었고, 그들의 화려한 업적들에 비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내치에 전념한 것과 독한 인상 탓에 근대까지도 비교적 존재감이 묻혀있던 군주였으나, 현대에 연구가 진행되면서 강희제의 오랜 치세 이후에 불안정할 수 있었던 제국을 있는 힘껏 통치하여 청나라의 전성기를 유지 시킨 군주라는 재평가를 받고 있다.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가 문무가 비교적 균형을 이루었던 데 반해 철저할 만큼 문치(文治)에 비중을 두었다.
선제인 강희제가 삼번(三藩)의 난 평정, 대만 정복, 러시아와의 분쟁, 외몽골 정복 등을 감행하고 준가르와 전쟁을 치르는 등 외정에 직접 관여하여 성과를 내면서 내치도 돌본 것에 비교하면 철저하게 평화주의나 부전(不戰)주의로 일관했는데, 즉위 초기에는 연갱요가 서북에서 군사 작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1731년 티베트의 갈단 체링에게 청군이 대패한 뒤로는 군사적인 정복 활동을 벌이는 작업에서 거의 손을 놓았다.
그렇지만, 내치에서는 선제 때 마무리가 안 된 수준의 내정 체계를 크게 정비하여 강희제와 거의 동급의 찬사를 받는다.
팔기군 체제를 손보고 군기처를 설치하는 등의 개혁으로 권력을 황제에 집중시켰고, 1727년 러시아와 캬흐타 조약을 맺어 국경선을 명확히 그었다.
또한, 하술되는 '본인 즉위 문제'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황태자 밀건법도 시행했다.
다만 만주족 후비에게서 난 소생이 본인 뿐이던 건륭제 등의 사례로 실제 이 법의 효과가 있었던 때는 적다
옹정제의 탄압은 측근과 형제들만 머물지 않았다.
이민족으로 중국을 통치한 만주족은 사상적인 면에서 많은 통제를 펴야 했기에 자주 문자의 옥(文字之獄)이라는 필화 사건을 일으켜 많은 책을 검열하고 분서시켰는데,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 시기를 걸치며 더욱 강화시켰다.
옹정제는 조세법으로서의 지정은제 확립, 부패척결, 농업장려, 중앙집권의 개토귀류(改土歸流)제도를 성공시킨 유능하고 착한 황제였다.
옹정제는 알콜중독자였으며 일중독자였다.
그의 사망 원인도 몸을 너무 혹사한 때문이었다.
옹정제는 다른 독재자처럼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역사상 수 많은 독재자들은 대부분 국민들을 탄압하고 혹독한 생활고를 겪게 하였으나, 옹정제는 국민들을 위한 착한 정치를 하였다.
마오쩌뚱이 공산 정권을 수립하고, 독재를 하면서 국민들을 잘 살게 하겠다고 공언하였으나 그것은 杞憂였다.
박정희는 권력을 영구히 하기 위해 10월 유신으로 가능한 듯 했으나, 결국은 술 자리에서 심복에게 살해 되었다.
쿠바의 카스트로는 독재를 하였으나 국민들을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가 되었다.
카스트로는 진정한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카스트로는 옹정제의 가치를 실현시킨 독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