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05
5월29일[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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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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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ORxFXPu5akY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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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어머니에서 교회의 어머니로 변화되는 은총을 입으신 성모님!>
축일이나 기념일의 제정은 그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 시대와 우리 교회가 어머니 성모님의 도움을 더 많이 필요로 하는 시대라는 것을 절감하셨을 것이고, 그래서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을 제정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교황청 경신성사성을 통해 이와 관련된 교령을 발표하시며, 이런 요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 안의 사목자들, 수도자들, 신자들 안에서 교회의 모성적 감각을 성장시킬 뿐 아니라, 참된 마리아적 독실함을 성장시키기 위해 이러한 공경을 증진하고 격려하기를 원합니다.”
성경은 명시적으로 성모님이 교회의 어머니라고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복음서에는 성모님 관련 기사들이 지극히 제한적이고 빈약합니다. 그나마 요한 복음서에서 우리는 성모님과 교회의 연결을 시도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골고타 언덕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요한 복음 19장 26~27절에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인 요한 사도와 성모님께서 십자가 가장 가까이에 서 계셨습니다.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요한 사도에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그 뒤로 요한 사도는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되는 제자 사도 요한은 사실 사도단의 대표, 교회 공동체의 대표 자격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서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요한 사도에게 어머니를 부탁드리면서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 공동체에 성모님을 어머니로 선물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에게 요한 사도를 비롯한 제자 공동체, 교회 공동체의 어머니가 되어달라고 부탁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 아래서 교회의 어머니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자상하신 예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돌아가시면서까지 어머니와 요한 사도 사이를 새로운 모자 관계로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남겨질 사람들을 위해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최선의 일을 수행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눈물겹고 은혜롭습니다.
그동안 성모님께서는 구세주 예수님의 어머니 역할을 수행해 오셨는데, 골고타 언덕 십자가 아래서 이제 제자단의 어머니, 예수님을 추종하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로의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에서 교회의 어머니로 변화되는 은총을 입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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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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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공자는 인생의 3가지 즐거움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친구가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입니다. 신학교에서 같이 배웠던 1년 선배 신부님이 뉴욕에 와서 3주간 있었습니다. 함께 미사하고, 함께 산보하고, 함께 식사하니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저는 32년, 선배는 33년을 사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한바탕 꿈’과 같은 시간들이 쏜살처럼 지났습니다. 우린 둘 다 어느덧 반백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바둑에는 ‘복기’가 있듯이 우리는 산보하면서 우리들의 젊은 날을 회상하였습니다. 학창시절 우리가 존경했던 신부님들의 이야기를 주로 하였습니다. 능력과 언변이 뛰어났던 신부님들의 이야기도 하였고, 속이 깊고 따뜻한 신부님들의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저를 신학교에 보내 주셨던 아버지 신부님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버지 신부님께서는 은퇴 하신 후에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하셨습니다. 혼자서 장을 보시고, 혼자서 밥을 해서 드시고, 혼자서 청소와 빨래를 하셨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후에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앞으로 은퇴 하는 사제들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뉴욕에서 저도 홀로 사는 법을 익히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지난 세월, 우리에게 기둥과 같았던 분들이 계셨습니다. 무소유를 이야기 하였던 법정 스님이 있었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하였던 성철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멋진 글을 남겨 주었던 함석헌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며, 가슴에서 발로 가는 여행’이라는 말을 하였던 김수환 추기경님이 있었습니다. ‘사랑합니다.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을 남겼던 자상하셨던 정진석 추기경님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해 맑은 웃음으로 사랑을 전해 주시는 드봉 주교님이 있습니다. 제가 그분들을 처음을 만났던 때에 그분들은 지금 저의 나이와 비슷하셨습니다. 지금 저를 만나는 후배들에게 저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분명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습니다. 번듯한 교회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선교에 대한 열정은 예전보다 약해졌습니다. 신앙에 대한 확신도 예전보다 약해졌습니다. 어쩌면 성장과 발전이라는 허상에 취해서 복음의 기쁨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어른들이 남겨준 열매를 맛있게 먹으면서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데는 게을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유대인들의 어른이었던 엘아자르의 이야기입니다. 엘아자르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내가 지금은 인간의 벌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전능하신 분의 손길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맞갖은 내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 유대인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2000년 동안 떠돌이로 지냈지만 지금 당당하게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았던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라는 건물은 파괴될 수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려는 혼이 살아있다면 성전은 언제든지 새로 세울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2014년 8월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방한하였고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식’을 봉헌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라는 신앙의 별이 있습니다. 오늘 순교자들의 전구를 청하면서 우리들 또한 후손들이 기쁘게 따를 수 있는 신앙의 별이 되면 좋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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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9,25-34: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를 공경하는 날이다. 마리아께서는 성령강림 때에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셨으며, 늘 교회와 함께하셨다. 여기서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드러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조하며 2018년 성령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새로운 자녀들을 잉태하는 신비를 담고 있다. 우선은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라고 기도하시면서 숨을 거두셨다. 이렇게 아들의 영은 아버지께로 갔다가 다시 아들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지며, 그 아들의 영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와같이,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26절) 그리고 사도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27절) 라고 하시며 우리를 마리아의 자녀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교회의 표상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낳아주셨고, 교회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계속 낳아주고 있다. 교회는 그러므로 마리아의 모습을 완전히 구현할 수 있을 때, 진정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 교회의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모두 마리아가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아들을 낳아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시고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셨던 마리아와 같이 되는 것이다.
“목마르다.”(28절)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사람들의 믿음을 목말라 하셨다. 목말라하시는 그분께 우리는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 믿음이 없음을 나타내는 신 포도주를 드리고 있지나 않은지? “다 이루어졌다.”(30절) 주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하신다. 십자가의 신비가 모두 이루어졌고, 고개를 숙이시고 숨을 거두심으로써 사흗날에 다시 일어날 당신의 육신에 평화로운 잠이라는 휴식을 주셨다. 착한 목자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34절) 인간이 죽으면 피는 엉기고 흘러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주님의 몸에서는 피와 깨끗한 물이 흘러나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는 죽었지만, 생명의 원천을 쏟아부어 줄 수 있는, 그 육신 안에 있는 위대한 생명의 힘을 알도록 일어난 일이었다. 첫째 아담이 잠들었을 때, 하와가 그 옆구리에서 나왔듯이, 둘째 아담이 십자가에서 잠드셨을 때, 그 옆구리에서 신부인 교회가 탄생하였다. 교회는 새 아담의 신부이다. 우리가 모두 마리아를 닮아 참으로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며 이끌어주시는 신부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오늘의 신비를 사는 의미일 것이다. 언제나 신랑과 일치하려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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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밀알 하나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4-26)
여기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씀은, “안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나의 죽음이 죽음으로만 보이겠지만, 나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씨를 심는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밀알 하나를 땅에 심는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고, ‘많은 열매’는 사람들의 구원을 뜻합니다.>
우리는 씨를 땅에 심는 일이, 그 씨를 죽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씨를 땅에 심는 것은, 그 씨 속에 들어 있는 생명력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죽는 것으로 끝난 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잠시 거쳐 간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여기서 ‘죽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한 속죄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고, 그렇게 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라는 말씀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사람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면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사람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것을 얻고 싶다면 허무한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것만 희망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혹시 사람들 가운데에는 “지상에서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 좋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둘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가 좋은 예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루카 16,19)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루카 16,22ㄴ-24)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라자로처럼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니라, 그 부자처럼 살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 누리고 싶은 것들을 다 누리고 살았지만, 저쪽 세상에 가서는 한 방울의 물이라도 달라고 애원하는 처지가 된 부자는, “자기 목숨을 사랑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입니다.
그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았고, 또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는 관심 갖지 않았고, 그래서 그것을 희망하거나 청하지도 않았고, 이웃의 고통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자기 한 몸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즐기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누구든지 나를 따라야 한다.” 인데, 공관복음에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곳, 즉 하느님 나라이고,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인데, 그 방법은, 또는 그 길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의 목적이 아니라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일률적으로 똑같은 십자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십자가의 크기도 다르고, 내용도 다릅니다.
또 십자가라는 말이 항상 순교나 죽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전부 다 순교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마태 10,23)>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사랑을 실천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고, 자기 한 몸의 편안함만을 찾으면서 그냥 가버렸는데(루카 10,31-32), 착한 사마리아인은 죽어가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고, 자기의 시간과 돈을 들여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루카 10,33-35)
바로 그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이 곧 “자신을 버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여서 지고 주님을 따른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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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요한 복음서에서는 사도 요한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요한 13,23; 19,26; 20,2; 21,7.20 참조)라고 일컫습니다. 요한은 누구보다 주님을 깊이 사랑하였기에, 십자가 아래 남아 그분의 죽음을 지킨 유일한 제자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의 사도’ 요한에게 성모님을 맡기시고 그를 통하여 교회에 공경할 어머니로 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는 카나에서처럼 “여인이시여”(2,4) 하고 어머니를 부르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카나에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2,5) 하시며 주님께 순명하셨듯이, 이 마지막 순간에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며 사랑하시는 제자를 바라보게 하시고 아들로 내주신 주님께 오롯이 순명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와를 메시아의 어머니요 장차 악에게 궁극적으로 승리할 온 인류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듯이(제1독서 참조), 아드님께서도 ‘새 하와’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 주님께서 “목마르다.” 하시고(시편 22[21],16; 69[68],22 참조) 신 포도주를 드셨으며(시편 69[68],22 참조), 그분의 뼈가 상하지 않았고(시편 34[33],21 참조) 창에 옆구리를 찔리신(즈카 12,10 참조) 예수님을 낱낱이 증언한 요한은, 이로써 구약의 예언과 성부께서 마련하신 구원 경륜이 온전히 실현되었음을 드러냅니다. 성부께 목숨을 바치기까지 순명하신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는, 사랑으로 어머니와 아들로 서로 받아들이신 성모님과 요한의 순명도 함께였음을 기억합니다. 주님께서 어머니로 주신 성모님께 의탁하며, 이웃과 동료를 가족으로 맞아들여 사랑하는 삶 가운데 우리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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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한국 천주교회는 진리에 목마른 학자들의 연구와 깨달음, 인생의 참된 행복을 맛본 초기 증언자들의 순교 열정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자랑스러운 한국 교회의 뿌리를 생각하면, 103위 순교 성인은 물론 지난 2014년 시복되신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그분들의 신앙을 우리 삶의 현장에 옮기는 노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순교는 가장 소중한 목숨을 바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생명을 버릴 수 있다면, 두 가지 가능성뿐입니다.
지금의 내 생이 죽음 이후에 다시 보상을 받아 새롭게 살아갈 기회를 줄 것이라는 환생에 대한 믿음이거나,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아가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최근 환생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죽음을 가볍게 여기거나, 실패한 인생의 재도전의 기회쯤으로 생각하려는 풍조가 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런 생명의 순환과 환생을 믿지 않습니다. 환생은 세속적 행복을 절대시하고, 나의 행복의 기준을 이기적인 욕망에 가두는 현실 세계의 모순을 그대로 반복하는 환상일 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되살아난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가 세상에서 겪어야 할 또 다른 지옥의 연장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실 속에서 영원을 만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와 죽음에 대한 궁극적 승리를 믿는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고 그분을 위해 목숨을 내놓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 없는 또 다른 환생을 꿈꾸기보다, 하느님 안에 사는 참된 평화를 희망했기에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순교자들이 가졌던 열정이 오늘 우리에게 절실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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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어 가는 씨앗’을 통하여 추수철에 많은 결실을 내는 이야기는 복음서에 자주 나옵니다.(마태오 복음 13장 3절-9절 / 마르코 복음 4장 3절-9절 등 참조)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이를 부활과 영원한 행복에 적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코린토 1서 15장 35절-44절 참조)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목숨을 바쳐 많은 이에게 자신의 신앙을 증언한 순교자들의 모범은 ‘땅에 떨어져 죽고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103위 순교 성인들과 오늘 기념하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의 동료 순교자들은, 테르툴리아누스 교부가 말한 대로 ‘교회의 씨앗’임이 틀림없습니다.
순교자들은 박해자들의 온갖 회유와 궤변에도,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이신”(5월 29일 성무일도, 독서 기도, 제2독서) 하느님을 결코 배신할 수 없음을 담대하게 밝히며, 죽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굳게 지켰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루카 21,15)로, 소중한 목숨을 바쳐 자신들의 신앙을 끝까지 증언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 앞에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의 믿음을 통하여 우리도 이 세상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증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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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사람은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대로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바라는 예수님을 만들어 냅니다. 잘못된 신앙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돌아가심으로써 세상에 생명을 주셨는데, 우리는 죽어 가는 길을 살고자 하는 길과 대척점에 놓고 늘 죽음을 회피하고는 합니다.
김영민 교수가 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게 좋다’라는 칼럼이 있습니다. 아침부터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테지요.
김영민 교수는 살고자 아우성치는 우리 한국 사회가 죽음의 문화에 무참히 갇힌 이유를 역설적이게도 죽지 않으려는 오만과 탐욕의 결과로 봅니다. 오히려 죽었다 생각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 살려고 바둥대다 보면 서로를 죽이게 됩니다. 서로 움켜쥐려고 애쓰다 보면,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고 미워 보이고 심지어 해치고 싶은 마음까지 가지게 될지 모릅니다. 밀알이 되어 죽어 가는 것이 오히려 우리를 살리는 일이라는 사실은 명확합니다.
우리 나라의 수많은 순교 성인들의 생애가 그러할 것입니다. 남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 세상의 생명은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굳이 어려운 일을 찾기보다 지금 나의 자리에서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여유를 지녔으면 합니다.
이것만이 아닌 다른 무엇이 있음을 생각하는 여유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이 세워 놓은 탐욕을 없애고 다른 이와 함께 나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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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머니의 고통을 거울로 삼아>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계신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결국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이시자 요한의 어머니요,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아들에 의해 세례로 다시 태어난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성모님은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혈연관계를 넘어서는 어머니를 얻어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관계가 물질적, 가시적 차원에서만 형성된다는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를 나의 어머니로 받아들여 영적인 관계를 맺는 새로운 세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박병규)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많은 고통을 안고 사셨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님의 잉태를 예고 받지만,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시대 상황으로 볼 때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 달라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루카1,38). 그리하여 한동안, 약혼한 요셉으로부터 간음한 여인이라고 오해를 받으셨습니다.(마태1,19)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 하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누우실 한 평 방이 없어서 마구간 말구유에서 해산을 했고(루카2,7) 또한 이집트로의 피난길에 나서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율법에 따라 출산 후 40일만에 정결례를 거행할 때가 되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를 봉헌하면서 시므온의 예언을 접하게 되었는데 “품에 안긴 아기가 많은 사람의 반대 받는 표징이 되어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루카2,34-35)이라는 고통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실현을 30년 이상 기다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축제 때에는 예수를 잃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았건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라고 하여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루카2,41-52) 그 구원의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사실을 알렸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2,4) 라고 외면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시며 평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일찍 남편 요셉을 잃고 홀어머니로서 가정을 꾸려야 했거늘 아들도 집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홀로 버려졌습니다.
어느날 소문을 듣고 아들을 찾았으나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3,33-35)라는 말을 흘려들어야 했습니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는 아들을 지켜봐야 했고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을 맞으시며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아들과 함께 십자가를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제자들과 새로운 자녀 관계를 맺어주며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을 침묵 속에 받아들이고 끝내는 피에 엉긴 아들을 무릎에 눕혀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부활의 소식도 다른 사람을 통해 뒤늦게 알아야 했던 어머니는 인간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고통에 묻혀버리신 분입니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치셨습니다. 성모님에게는 하느님이 당신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을 거울삼아 자진하여 고통을 참아 받으며 주님께 온전히 희생을 바쳐야겠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생각은 언제나 성모님께서 울고 계시던 구세주의 십자가 곁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항상 성모님과 함께 울도록 하십시오”(교부 푀멘). 힘들고 어려울 때 성모님의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없이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 안에서 어머니의 전구에 힘입어 우리도 신앙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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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큰 바위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없어도 작은 돌멩이에 넘어지는 사람은 많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큰 공감이 가는 속담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작은 돌멩이라고 할 수 있는 일상의 작은 일에 자주 넘어집니다.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고민이 너무 힘들어서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했지요. 그랬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뭘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래? 남들도 다 겪는 거야.”
자신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하는 고민인데, 상대방은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사실 이런 고민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민은 대부분 크지 않습니다. 작은 일상의 고통과 시련이 잠 못 이루게 하는 고민이 됩니다.
큰 바위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것처럼, 큰 고민은 정작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예 어떻게 할 수 없으니 포기하거나 다른 방향을 곧바로 찾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은 돌멩이처럼 보이는 작은 고민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작은 고민에 쉽게 넘어지고 맙니다. 또 워낙 작은 것이기에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됩니다. 계속된 넘어짐에 정신은 피폐해지고 몸도 망가집니다.
작은 돌멩이에도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합니다. 주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우리를 향한 큰 사랑 아래에서 작은 돌멩이인 고통과 시련을 가뿐하게 건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합니다. 이들은 1791년 신해박해 때부터 1888년 병인박해 때까지 순교한 분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배교하지 않았습니다. 배교만 해도 살 수 있는데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삶보다도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커다란 사랑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우리나라에 정말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지금은 종교의 자유가 있기에, 과거처럼 주님을 배신할 일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주님을 증거해야 하는 순간이 계속 주어집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못할 때, 쉽게 판단하고 단죄할 때, 나의 욕심과 이기심만을 내세울 때가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이 됩니다. 계속된 작은 돌멩이에 걸려 넘어져 주님께 멀어지게 됩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나’임을 기억하면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지혜와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과거 우리 순교자들이 보여 주셨던 모습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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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영원히 남을 것들>
요한 12,24-26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찾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영원히 남을 것들>
언젠가
이 세상에서
나는 사라지겠지만
외로운 벗을 품은
따스한 마음
그 벗 너머
누군가를 품어
영원히 남겠지요
언젠가
이 세상에서
나는 사라지겠지만
힘겨운 벗에게 건넨
환한 웃음
그 벗 너머
누군가에게 건네져
영원히 남겠지요
언젠가
이 세상에서
나는 사라지겠지만
아파하는 벗에게 내민
부드러운 손길
그 벗 너머
누군가에게 내밀어져
영원히 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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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같이 가는 길>
오늘은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축일인데 윤지충 바오로 순교자는 우리나라 첫 순교자였고, 그래서 오늘 축일의 대표 순교자가 되었으며 이분에 대해서는 이전 강론에서 나눔을 하였기에 오늘은 다른 순교자들에 관해 나누고자 하는데 그중에서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그 가족들에 관해 나누고자 합니다.
윤지충 바오로 순교자가 첫 순교자가 되었지만 호남 지역에 가톨릭을 널리 알린 분은 유항검 복자이고, 그래서 유항검 복자를 호남의 사도라고 우리는 부르지요.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124분의 순교자 가운데는 유항검 복자 말고도 그분의 아들 유중철과 유문석 조카 유중석과 며느리 이순이가 복자로 시복되었고, 비록 시복되지는 않았지만, 동생 유관검과 부인 신희까지 가족이 모두 순교하였으며 그래서 유항검 성인의 생가는 파가저택이 되었지요.
파가저택이란 큰 죄를 지어 죽은 가문을 아주 없애버리고, 멸문의 본보기로 삼고자 그 집마저 없애는 것을 말하는데 집을 허물고 그 집터를 아예 연못으로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또 기념해야 할 것은 유항검 순교자의 아들 유중철과 며느리 이순이가 동정 부부로 4년여를 살다가 순교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순이 순교자가 옥중 서한에서 적었듯이 그 4년여 동안 열 차례나 동정을 깰 뻔했지만 끝까지 동정 서약을 지키고 부부가 같이 순교까지 했으니 동정 순교 성인의 대표로 불리는 아네스 성인과 같이 우리가 공경해야겠지요.
그리고 또 참으로 대단한 것은, 그 가문이 모두 순교했다는 사실, 곧 아무도 배교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지요. 가깝고 쉬운 길은 혼자서도 갈 수 있고 혼자 가는 것이 쉽지만 멀고도 험한 길은 같이 가야 감히 떠날 수 있고 그 길을 끝낼 수 있지요.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그 어떤 길보다 어려운 길이니 우리 또한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에서 이 집안 신앙에서 교훈을 얻고 본보기 삼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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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귀가(歸家)의 여정>
- 늘 새로운 시작 -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저는 우리 삶을 귀가의 여정으로 정의합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여정같지만 죽음은 바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라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예수님의 고별기도에 나왔던 말마디도 기억할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시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대성전이 가까워질수록 마음 설레며 빨라졌던 발걸음의 기억도 선명합니다.
예수님은 물론 순교적 삶을 살았던 대부분 성인들이 죽음이 끝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이자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여겼습니다.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 하느님 아버지이기에 저는 희망의 여정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도원 피정오는 분들에게 맨처음 공통적으로 하는 피정강의 내용이며, 어제도 단체피정자들에게 이 강의를 했습니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이 순교자들 역시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하여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음을 믿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8월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식 미사에서 시복을 선언했습니다. 당시 저는 장충동 수도원에서 안식년중이었지만 이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윤지충(1759-1791)은 유교식 제사를 거부하다 처음으로 순교한 조선후기 신자입니다. 124위 순교 시기를 보면 첫 대규모 박해로 기록된 신유박해(1801년) 순교자가 53명으로 가장 많고, 기해박해(1839년)를 전후로 37명, 병인박해(1866) 순교자 20명, 신유박해 이전 순교자가 14명입니다.
성인별 지역별 순교자 수는 서울이 38위, 경상도 29위, 전라도 24위, 충청도 18위, 강원도 3위입니다. 이들 순교자중 5위(이일언, 신태보, 이태권, 정태봉, 김대권)가 전라도 전주 숲정이에서 1839년 5월29일 순교했기에 이날을 기념일로 정해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대로 다음 복음 말씀처럼 예수님 뒤를 따른 순교성인들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바로 내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순교적 삶을, 부단히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고 작아지는 겸손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보다 더 자기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베네딕도 성인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 순교적 삶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 했습니다.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다’라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을 따라 순교했던 무수한 성인들의 순교의 죽음으로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가 열매 풍성한 교회로 성장, 성숙했음을 믿습니다. 이런 순교영성의 유전자(DNA)는 오늘도 우리 안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으며, 비상한 순교만이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삶에서 자발적 기쁨으로 순교적 삶을 살게 합니다. 예수님의 다음 복음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도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누구든지’, 바로 믿는 이들 모두가 예외없이 순교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결코 값싼 은혜, 값싼 믿음, 값싼 사랑, 값싼 희망은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자발적 분투의 노력과 훈련이 필수입니다. 바로 하루하루 한결같이 주님 사랑에 자기를 비우고 버리고 주님을 추종함이 주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이렇게 살면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도 순조로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제1독서 마카베오기 하권의 주인공, 90세의 노순교자 엘아자르입니다. 평소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고결한 순교적 삶이 훈련되고 습관화되어 제2천성이 됐기에 이런 의연한 순교의 죽음입니다. 하루하루 귀가의 여정에 충실한 평소 일상의 삶 모두가 죽음의 준비임을 깨닫습니다. 엘아자르의 감동적 고백을 일부 나눕니다.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맞갖는 나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합니다.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는 내가 당신께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
이렇게 엘아자르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으니, 그대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입니다. 사실 이런 죽음보다 후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귀한 선물은 없습니다. 이런 믿음도 삶도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독일의 나치스 치하에서 순교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입니다. 이분의 “옥중서간”은 제가 20대 시절 열광하며 수차례 애독했던 책입니다. 1945년 4월9일 처형된 본회퍼의 유언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였고, 그의 묘비명은 “디트리히 본회퍼-그의 형제들 가운데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비상한 순교의 죽음도 은총이지만 평범한 일상의 순교적 삶도 은총입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자발적 기쁨으로 제 십자가를 지고 책임을 다하며 묵묵히 자기를 비우고 버리며 주님을 따르는 사랑의 순교적 삶을 통해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여정도 성공적으로 이뤄질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루하루의 순교적 삶에, 귀가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제 사랑하는 좌우명 기도와 시편성구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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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예수님의 죽음을 따라가는 삶!>
오늘은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순교자들로서 예수님의 죽음을 그대로 따라간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124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12,26)
124위 순교 복자들은 오늘 복음(요한12,24-26)을 그대로 따랐던 분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 죽는 밀알이 된 분들,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따라간, 예수님의 죽음을 따라간 분들이십니다.
평생 동정을 간직하면서 굳은 믿음 안에서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을 잘 따라갔던 어느 자매님께서 생애 마지막 순간에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죽음 이후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12,25)
우리보다 앞서간 수많은 순교자들과 성인 성녀들은 자기 목숨을 미워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따라간 분들이십니다. 그래서 지금은 영원한 생명의 화관을 받으신 분들입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하다. 시험을 통과하면 생명의 화관을 받으리라."(복음환호송)
영원한 생명의 화관을 받기 위해서, 우리도(나도) 이 지상에서의 삶을 착히 살아, 마지막 때에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자매인 죽음이여, 어서오세요."(성 프란치스코) 라는 말을 남기고 기쁘게 죽음을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 죽음 그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정말로 정말로 희망하고 있는가?'
그러면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바뀔 것 같습니다. 참되게 믿고, 굳게 믿고, 기쁘게 믿는 모습으로 바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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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prQ-Lcs3h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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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 26)
섬김이 존중을
안고 갑니다.
섬김과
존중 사이에
참된 사랑이
있습니다.
섬기는 삶이
바로 존중의
삶입니다.
섬기는 삶은
열매를 맺는
밀알이 되고
존중의 삶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뜨거운
삶이 됩니다.
주님을
섬기지 않고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기꺼이 자아를
주님께
내어드린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면서
태어나고
내어드리면서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 어떤 것도
하느님께
한 번도
내어준 적이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내어드리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삶은 순교로
성장되고
순교는 삶을
거룩함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순교로
이루어진
순간들이
우리들
삶입니다.
순교로 완성되는
사랑의
기쁨들입니다.
진정 살아 있음이
어디를 향해
가야할 지를
아는 이 땅의
진정한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순교 같은 삶이
섬김의 삶입니다.
쓸데없이
커져버린
우리 자아를
머리 숙여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영혼의 길을
만납니다.
빛 속에서
비로소
하느님의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금
십자가의
죽음 밖에는
길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낮아지고
높아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우리의
사명입니다.
사람의 길이
다름아닌
사랑이며
사랑은 바로
순교임을
섬김과 존중의
복음을 통해
배웁니다.
이 땅에
사랑을 깨닫고
사랑을
실천한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가장 뜨겁고
가장 치열한
사랑을 배웁니다.
하느님 사랑이
오늘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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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 27)
하느님 백성인
교회는 오늘도
우리의 생활로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생활이 빠져버린
교회는 생명력이
없는 아픈 교회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생활을 이야기합니다.
마리아는 신앙의
차원으로 우리의
생활을 열어주셨습니다.
마리아의 삶이
신앙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신앙은 자신의
생활로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생활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일상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사랑의 역사입니다.
돌보는 사랑 없이는
결코 성장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것을
곰곰이 간직하시듯
가장 아픈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당신의 삶 안으로 깊이
받아들이십니다.
서로의 약함과
서로의 아픔과
서로의 죄스러움을
어머니처럼
품을 수 있는
교회가 되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백성인 교회는
감사의 일상에서
우리의 생활로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삶에서 그 길을
찾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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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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