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 향 / 이병률
살짝 열린 작업실 문틈으로 누가 빼꼼 고개를 들였다
손가락 끝은 화병의 백합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몇 마디를 내뱉었으나 충분히 외국인이었다
그녀가 그 꽃을 어디서 샀냐고 물었다
백합 향기에 가던 길을 돌아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새벽에 들여놓은 백합의 반을 덜어 안겨주었다
누군가의 목소리만으로
그 사람 뒤를 따라간 적이 있다
누가 쓴 글씨인지를 묻고 물어
한사코 그 사람을 알고 싶어 한 적이 있다
누가 햇볕에 널어놓은 허름할 대로 허름한 빨래를 한없이 올려다보다
그만 마음이 젖고 만 적이 여러 번 있었다
― 계간 《미네르바》 202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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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률 시인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등
산문집 『내 옆에 있는 사람』 『혼자가 혼자에게』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등.
2006년 현대시학작품상, 2018년 발견문학상, 2021년 박재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