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버린 놈 / 잔아
그놈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포악해지다가 급기야는 애비의 멱살을 잡기에 이르렀다 불효막심한 그놈을 원망할 수 없는 까닭은 애비가 그놈의 껍질을 벗기고 팔다리를 꺾어버리고 탄소를 무진장 배출하여 숨통을 틀어막았는지라 그놈은 견디다 못해 무하유無何有 세계로 돌아갈 채비를 갖추고 애비에게 이별을 고했는지라 애비를 아예 포기할 작정이라고, 애비는 수많은 생명체 중에서 자기가 선택한 항목에 불과하다고, 그러니 자기를 애비의 보호자로 착각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애비는 그놈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슬피 울었다 그놈은 우는 시늉마저 거부한 채 온도계를 섭씨 영하 50도와 영상 51도로 틀어놓고 휘엉휘엉 떠나버렸다 지독한 놈이었다.
- 『미네르바』 2024년 가을호 ------------------------------ * 잔아 시인(본명: 김용만) 1990년 『현대문학』 소설 등단, 시평집『잔아 소설가의 시 읽기』, 기행문『세계문학관 기행 』등, 장편소설『칼날과 햇살』『능수엄마』『애나』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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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인 '애비'가 '불효막심'한 자식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는 시다. 짤막한 이야기가 들어있는 산문시. 소설이 되기엔 너무 황당무계하기에 시 형식을 취한 것일 거다.
이 시의 키워드는 '무하 세계', 무위자연의 도교, 장자가 꿈꾼, 어떤 인위도 없는 자연 본디의 세계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다. 그런 세계에 살기를 원하는 아들을 인위적인 기성의 모든 걸 상징하는 아버지가 막아 불효막심한 아들이 됐다는 우의寓意가 주제인 산문시다.
그렇다면 기존의 아버지 세상을 야멸치게 파괴해버리고 무하유 세계로 떠난 지졷한 아들은 누구일 것인가. 바로 화자일 것이다. 어느 것에도 구애된 없는 대자유의 시혼일 것이다.
- 이승하 (시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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