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교에 1년 휴학 하고 있을 때 둘째 형님 친구 분이 우리 집에 하숙하러 왔다. 그 형은 대구 근교인 경산의 꽤 큰 과수원 집 아들이었는데 공부에는 농땡이를 쳐 아버지의 속을 매우 썩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고민을 하다가 전교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학생과 생활하면 혹시 달라지지 않을 까 해서 그 학생을 학교에 알아보았다. 그래서 전교 일등인 둘째형이 선택되었고 어머니에게 사정사정해서 우리 집에 하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도 생활에 여유가 없었던 입장이라 하숙비도 벌 겸 허락했다.
그러나 그 형은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우리 집에 오고 난 후부터 더 농땡이를 쳤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학교를 빼먹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학교에 나가지 않을 때는 캐러멜이나 비스킷, 찐빵 등 먹을 것을 사오라고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나는 신이 났다. 하루 종일 혼자 심심하던 차에 맛있는 먹을거리를 나눠먹는 재미가 솔솔 했다. 또한 만화를 잔뜩 빌려 보곤 했는데 만화 보는 재미로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그 형이 매일 학교를 안가기만 바랬다. 그 형 아버지의 속 타는 마음까지는 어린 마음에 생각이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중3, 1년을 그렇게 농땡이를 치다가 그 형은 동계 대구 최고 명문 K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후기 모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어쨌든 그 형 덕분에 나는 휴학 1년간 외롭지 않게 보냈다. 때때로 그 형이 집에 다녀올 때마다 최고급 사과와 양봉 꿀을 과수농원에서 잔뜩 가지고 오는 덕에, 식구들은 사과와 꿀을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이라 하지만 공부는 본인의 동기부여가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심성은 너무나 선하고 인정이 철철 넘치던 L형은 그 후 인생 유전을 하다가 자기 고향 경산시의 세무과 촉탁공무원이 되어 이럭저럭 살고 있다고 들었다.
[에피소드35]
주일날 교회에 갔다 오던 날 갑자기 배가 아파왔다. 집으로 오는 길이 먼 거리여서 참기가 힘들었다. 길 중반 쯤 나는 한계에 도달하여 끝내 참지 못하고 마침내 실례를 하고 말았다. 팬티를 거쳐 바지로 조금씩 변이 흘러 내렸는데 집에 가까이 왔을 때는 바지 끝에서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이 없는 골목길을 주로 갔다. 골목이 끝나고 대로가 나왔을 때는 밑으로 찔끔찔끔 흘러내리는 변을 사람들이 쳐다 볼까봐 다음 골목으로 번개 같이 뛰었다. 이 모습을 보고 동행한 여동생 들이 깔깔대고 웃었다. 나는 진땀이 나는 순간이었는데....! 집에 도착해서는, 호랑이 같은 큰 누나에게 들킬까봐 목욕탕에서 신속히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다행히 누나에게 발견 되지 않았다. 지금도 여동생들이 그때 일을 거론하면서 놀려대곤 한다.
[에피소드36]
이 무렵 나의 친조모님이 대구시 남구 봉덕동 수도산 근처에 일찍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된 큰어머님과 같이 살고 계셨다. 나는 가끔 들러 밥도 먹고 할머니의 귀여움도 받곤 했다. 할머니는 자녀들 중 나의 아버지를 특히 사랑하셨기에, 막내 친손자인 나도 극진히 사랑하셨다. 그 깊은 사랑을 공급 받으려고 나는 수도산으로 자주 할머니를 찾아 갔다. 나는 우리 집에서는 할머니에게 찾아가곤 했던 유일한 손자였다. 아마 할머니의 포근한 사랑이 나의 발걸음을 저절로 그곳으로 인도했던 것 같다. 내가 찾아가면 할머니는 주로 며느리인 큰어머니와 화투놀이를 하고 계셨다. 할머니는 내가 배가 고플까봐 큼지막한 감자를 밥 위에 쪄서 주시기도 하셨다.
며느리에게 폐가 될까 염려하여 좀처럼 우리 집에 오시지 않던 할머니가 어느 봄날 갑자기 우리 집에 오셨다. 그날 마침 아버지는 서울에 출장 가셨고 동구 신암동에 외과병원을 하셨던 둘째 이모님이 집에 와 계셨다. 어머니는 부랴부랴 소고기 국을 끓여 저녁을 대접하셨고 이모님은 사가지고 오신 고급 찹쌀모찌를 권하셨다. 그날 할머니는 음식을 잘 드셨고 늦게까지 담소하시는 등 기분이 매우 유쾌해 보이셨다. 그런데 갑자기 체하신 것 같다고 말씀하셨고 자리에 누워 고통스러워 하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체한 증세는 심근경색의 예고일 수가 있다고 한다. 어머니는 서울로 출장 간 아버지에게 급히 연락했다. 그날 밤에 할머니는 임종하기 전 급히 내려온 아버지의 품에 안겨 평안하게 하늘나라 본향(本鄕)으로 향해 가셨다. 할머니의 최종사인(最終死因)은 급성(急性) 심근경색(心筋梗塞)이었다.
할머니가 다니셨던 교회(대봉교회)와 부모님의 교회(삼덕교회) 양쪽에서 영결예배(永訣禮拜)를 집례(執禮) 했다. 경북지사와 대구 고등, 지방법원장, 도경찰국장등 대구의 유력인사들이 조문(근조)하러 오는 등 성대하고 정중한 장례식이었다. 철없는 나는 상주를 표시하는 누런 삼베완장을 차고 돌아다녔다. 친척들은 어린 내가 할머니를 못 잊어 저렇게 서럽게 돌아다닌다고 안쓰러워하기도 했다.
대구시립공원묘원에 할머니를 안장(安葬)하고 난후 부모님은 이런 얘기를 나누셨다.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장례를 사랑하던 아들집에서 치르게 하시려고 운명하기 직전 우리 집으로 급히 인도하신 것이다”고 하셨다. 만약 사시던 방 한간 집에서 임종 하셨다면, 장례 치르기(당시는 고인이 돌아가신 집에서 喪을 치뤘다)가 불편하기 그지없을 것이었다. 또 장례식의 모든 절차가 끝날 때 까지 날씨도 너무 좋아 모든 사람들이 할머니가 하늘의 복을 받으신 분이라고 하셨다. 괜찮은 초상집마다 찾아다니던 인근에 있던 거지들도 무리지어 와서 넉넉하게 음식을 먹고 입을 모아 돌아가신 분의 음덕(陰德)을 칭송했다.
할머니는 조선시대의 전통적 미인이셨고, 성격이 유현(幽玄)하시고 고요한 분이셨다. 평소에 화를 내거나 소리를 크게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세상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할머니의 생애도 결코 평탄하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잘못된 일로 많은 재산을 날리는 바람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고,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가진 재산도 없이 오직 자식만 바라보면서 고독하게 사신 분이셨다. 그러나 인생의 말년에 아버님의 권유로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의 빛 안에서 비록 물질적으로는 어려우셨지만, 진실한 삶을 보내시다가 영원한 복락 천국으로 가신 것이다. 어릴 때 애정의 결핍 속에서 방황하던 나를 잠시나마 포근하게 감싸 주셨던 할머니를 깊이 추모한다.
첫댓글 대봉교회, 수도산, 봉덕동, 경산...
이런 지명들이 제 어릴적 추억들을
마구 끌어올립니다. ㅎ
덕분에 추억 글 한 꼭지를 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자리님에게 고향의 지명들이 옛적 추억을 소환하는 군요 ㅡ
초교시절은 전교 일등을 하는 둘째 형이 있었고,
큰 어머니와 함께 계시는 할머니를
자주 찾아뵙는 귀여운 손주가 있었네요.
할머니가
아들이 계시는 곳으로 오셔서
임종하셨다는 것,
할머니의 사랑을 받았던 시절이
다저스님의 초교시절의 추억으로...
잘 읽었습니다.
친할머니를 자주 찾아 간 것은 정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시절에 사랑이 목말랐던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쪽으로 발길이 갔던 것입니다.. 꽁꽃님 저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관심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ㅡ
2011년 만75세 나이에 별세한 우리큰형도 집안에 좋은일만 생기면 부모님 음덕이라고 동생들앞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부모님 음덕이고 조상님 음덕이라는 말은 은근히 마음속에 주입되어 갔습니다. 우리 남매들은 지금도 일년에 네차례 부모님 산소를 40년째 꼭 가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조상이 잘하면 자식 3.4대까지 복을 내리고 , 반대로 잘못하면 화가 3,4대까지 내린다는 귀절이 있습니다. 경주 최부자 집안도 그런 경우로 조상이 잘하니까 그 가문이 계속 번창한 것 같습니다 ㅡ
언덕저편1님의 집안도 조상들의 음덕으로 자손들이 복을 받으신 것 같네요 ㅡ
짧은 에피소드지만 만화의 토막 그림처럼
이해가 잘 됩니다 .
콧등 찡한 이야기 , 웃음이 나는 이야기 ..
다저스님의 어린시절을 잘 알아가고 있습니다 ..
아녜스님의 총명과 글담도 대단하십니다ㅡ 댓글 선물에 감사드립니다 ㅡ
한 편 한 편의 에피소드가 생활의 체온을 그대로 품고 있어서 더 오래 남습니다.
하숙하던 형 이야기의 소소한 웃음, 아이 시절의 민망한 기억, 그리고 할머니를 향한 마지막 장면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네요.
특히 할머니 부분에서는 삶의 고단함과 사랑, 신앙이 조용히 겹쳐져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개인의 기억이지만 한 시대의 풍경으로 읽히는 바이오그라피, 깊이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필력과 글담이 뛰어난 탁구님의 평론에 깊은 감사가 우려 나옵니다. 글의 재미란 쓰는 것보다는 읽어 주는 분들의 공감의 답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답글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ㅡ
삭제된 댓글 입니다.
조모님이 만약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셨다면 인생 말년은 그야말로 공허하고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힘이 되는 댓글을 달아 주시는 해도네 님ㅡ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립니다 ㅡ
평탄하지않았던 어린시절을 반면교사로 삼아 청소년기엔 더 분발했을 것 같습니다만 잘 성장했기에 이렇게 회고하는게 아닐까, 합니다.
회고해 보면 파란 많았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힘보다는 주님의 은혜 때문에 고난을 이겨내고 지금이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석촌선배님의 따뜻한 말씀이 저에게 힘이 되어 주네요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