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품위와 십일조
2테살 2,1-17; 마태 23,23-26 / 성녀 모니카 기념일(연중 제21주간 화요일); 2024.8.27.
1943년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간의 욕구는 타고난 것이며 강도와 중요성에 따라 하위단계에서 상위단계로 계층적으로 5단계를 따라 충족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Maslow's hierarchy of needs) 그는 인간 욕구를 생리적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욕구에서부터, 안전하려는 욕구, 애정을 받고 소속되려는 욕구, 존중 받으려는 욕구 그리고 자아를 실현하려는 욕구 등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기본 욕구 가운데 존중받고자 하는 욕구까지도 채운 다음에 마지막으로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까지 충족시키려면, 다른 이들의 기본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아 실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목표는 자아를 초월하는 과정을 필수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당연히 이 노력에는 자신의 돈과 시간, 재능과 기회가 들어갑니다. 그 어떤 희생도 들어가지 않고서는 그 누구의 결핍 욕구도 채워줄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 다른 이들의 기본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자기희생이요, 그 최소한의 기본 기준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십일조 정신입니다.
본시 구약의 전통에서 십일조 전통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유래되었음을 히브리서가 밝혀주고 있습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히브 7,17)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히브 7,2)을 사제 멜키체덱을 통해 하느님께 바쳤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인 신자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계승해야 할 신앙의 전통으로서 자신의 삶 가운데에서 십분의 일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제직을 살아야 함을 명심하라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그 후 모세가 확립한 유다교의 전통에서 사제 직무는 열두 지파 중 레위 지파에서 맡게 되면서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이라는 전통이 ‘수입의 십분의 일’로 굳어졌습니다. 레위 지파는 토지를 분배받지 않고 성전과 제단에서 봉사하는 대신에 이미 토지를 분배받은 나머지 열한 지파로부터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받을 권리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래서 열한 지파에 속한 백성이 십일조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면, 사제는 그 중에서 십분의 일을 자신과 제단 봉사자들의 몫으로 하고, 십분의 구는 성전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레위 지파와 이방인, 과부, 고아 등 토지를 분배받지 못해 가난한 이들의 몫으로 주었습니다.(신명, 14,22-23.28-29) 이것이 사제직을 통하여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십일조 제도와 십구조 질서였습니다.(히브 7,2) 이 십구조는 가난한 이들 개인에게 돌아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공유경제의 기금으로 활용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금고요 하느님의 곳간이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께 바쳐 드려야 하는 것은 일해서 벌어들인 돈만이 아니라, 시간과 재능, 기회와 경험 등 돈보다 더 귀하게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것들도 십일조 정신으로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마땅합니다. 아브라함은 사제 멜키체덱을 통해서 하느님께 “모든 것의 십분의 일”(히브 7,2)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바치는 일만큼 중요한 것이 모아진 십일조를 통해서 십구조의 질서, 즉 공유 질서를 세우는 일입니다. 즉, 사회의 공익을 위한 공유 경제와 공동체를 위한 공동선의 질서를 형성함으로써 돈과 시간과 재능, 기회와 경험을 서로 나누어야 세상이 공평해지고 밝아집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고 그래야 우리가 사는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세워집니다.
자아실현의 기회는 그렇게 해서 찾는 것이고, 여기에 믿음이 필요한데 이 믿음이란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의식과 함께 자기가 스스로 이 믿음에 따라 결정하려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이렇듯 각성된 개인들의 지속적인 연대를 세상 속에 퍼뜨리는 일이 새롭고 또 진정한 선교이고 또 이것이 원래의 ‘교회’였습니다.
십일조를 봉헌하는 정신과 이로써 십구조의 공동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믿음의 품위로 인한 사회적 실천입니다. 믿음의 품위를 지키고, 자아를 실현하며, 선행과 사랑을 증거하는 삶의 경위가 이렇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렇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로부터 불행하리라고 단죄를 받았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마태 23,23)
그런데 이들과 달리 사도 바오로는 한때는 열성적인 바리사이로서 살았지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 가다가 벼락을 맞고 나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는 십일조를 훨씬 넘어서 자신이 지닌 지식과 재능과 체력과 모든 기회를 예수님께 봉헌하면서 선교사로 살아갔습니다. 그는 사도요 선교사로 일하면서 받을 수 있는 보수마저도 포기하고 자기에게 필요한 생활비와 활동비도 천막을 만드는 노동을 하면서 충당했고 이를 사도로서의 명예로 삼았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에서 나오는 도덕적 권위로 선교지에서 만난 이방인들을 감화시킬 수 있었으며, 그 감화력 덕분에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가 형성된 뒤에는 자기가 남아서 그 공동체 위에 군림하지 않고 또 다른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떠나갔으며, 다만 문의를 해 올 경우에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오늘 독서인 테살로니카 편지도 그렇게 해서 나온 것입니다. 내용은 공적이지만 형식은 사적인 편지인데도 신앙적으로 훌륭한 내용이라서 오늘날 성경에 편입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2테살 2,15)
요컨대, 십일조 봉헌의 정신, 그리고 모아진 십일조를 통해 십구조의 공동 질서를 형성하는 일에서 믿음이 지니는 사회적 가치를 봅니다. 믿음의 진정한 품위는 개인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으로 그 가치를 실현하여 더 많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공동체의 가치보다 사적인 이익을 앞세우는 속물들이 행태가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많이 가졌거나, 많이 배웠거나, 사회적 지위가 제법 높은 자들이 공동선보다도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힘을 쓰는 허접한 처신을 보고 실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 또한 우리 믿는 이들이 밝혀야 할 어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믿음의 품위를 지키고 자아를 실현하며 스스로 믿음에 따라 결단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