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같이 다정했던 나의 오빠~ 그대 너무 그립습니다 / 蘭草 권정아 먼 세월 거슬러 올라가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 온 나에게 세살 위 오빠가 지어 준 나의 닉네임[Nickname]은 [촌닭]이었습니다 오빠의 친구들에게도 선후배에게도 언제나 저를 [촌닭]으로 소개를 했답니다 저는 맨처음엔 예쁜닉이 아니라 너무 싫었습니다 꽃이 많은 집안에서 자라면서 꽃을 너무 좋아해서 고향에선 19홉살까지 제 닉은 [꽃나라]였으니까요 그런데 오빠는 제가 서울와서 지리도 어리둥절 모르지요 서울 학생들같이 영악하지도 못하지요 그러다 보니 늘상 오빠는 일년동안 저를 [에스콧트]를 하면서 학교도 바래다 주고 극장도 음식점도 백화점 쇼핑도 꼭 함께 다니고 허다 못해 캠퍼스내 축제까지 바라다 보았고 제 결혼 골인에도 혁혁한 공로를 세우신 분이었지요 야! 촌닭아 이것 어떠니? 야! 촌닭아 이라 와 봐~ 이렇게 자연스럽게 부르고 저는 시간이 지남에따라 자연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자주 음식점이나 백화점 쇼핑 때는 연인인양 말해서 우리는 폭소를 터트렸고 그럴때마다 설명을 해 주었지만, 나에게는 연인같이 너무나 소중한 오빠였습니다 세살 위인 오빠는 남달리 총명해 고등학교를 1년 월반하여 대학을 남보다 더 빨리 입학했는데 3년 복무 마치면 저를 보호하며 같이 다니려고 대학교 2학년 초기에 지원 입대를 했습니다 부모님의 엄하신 명령이시기도 했고요 아무턴,저를 위해서라면, 모든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헌신하고 아껴 주었던 연인 같았던 나의 오빠 나를 그토록 사랑했던 나의 오빠는 [반백]도 못 채우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남을 위해선 남다른 박애정신을 발휘하던 그대 자신의 몸이 병들어도 느끼시지도 못한 체 그렇게 4개월의 투병끝에 서울대 병원에서 타계 하셨습니다 갑자기 무너진 오빠의 건강에 온 집안은 비상이 걸려었고 남은생 4개월 정도란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충격받아 짧은 잔여 삶~오빠의 모습 다시 볼수 없기에 난 오빠를 위해 간병인도 두지않고 올케 언니랑 둘이서 최선을 다해 간병하면서 오빠의 회생을 갈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말 한마디 못하시고 떠나던 날 하늘은 가을비를 세차게 내리며 울었고 쿠당탕탕 뇌성 병력은 온 세상을 뒤엎는듯 했습니다 생전,가시는길 아시는듯 젊은 나이에 고향 선산엔 조상님 뵙기 죄송스러워 죽어도 절대 안 묻히겠다고 하신 오빠의 유언 따라 몸 담았던 회사에서 마련해 주신 12평의 서울 근교 대지에 기가 막힌 오열속 회사장으로 차거운 산등성이에 오빠를 묻고 하늘이 꺼지는듯한 아린 마음, 그 비통함 이 세상 그무엇에다 비교하리~ 아무리 울고 울어도 가셨어야 했으니~ 오빠 떠나시고 날마다 우는 저 때문에 우리 그이 마음 고생 참으로 많았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울었고 낙엽이 떨어지면 더 목놓아 울었고 한때는 심한 우울증으로 몇달간 치료를 받았으니까요 그런데,지난밤 오랜만에 오빠의 꿈을 꾸었습니다 천상의 나라에서 잘 계시는지요 평소처럼 환한 미소로 나타나셨던 오빠 왜 저를 본척도 않고 홀연히 사라지셨는지요 꿈 속에서나마 무척 보고 싶었는데요 유년시절, 봄이면 진달레꽃 꺾어다 머리에 꽂아 주시고 연한 찔레순 벗겨서 먹여 주셨고 복숭아 털 가렵다고 물에 씻어 먼저 먹여 주시고 노오란 감꽃 떨어지면 조롱조롱 감꽃 목걸이 만들어 목에 걸어 주시던 자상했던 나의 오빠를 동네 친구들은 너무나 부러워 했었고 그런 오빠를 난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데, 오빠가 사랑했던 누이동생 [촌닭]은 이미 오빠를 잊은 양 하와이 해변에서 웃고 즐기고~ 좋은것 즐거운것 다 만끽하고 있으니 분명 저는 오빠에게 빚을 너무 많이 진 염치없는 죄인입니다 극진한 사랑에 조금도 보답치 못하고 손윗사람은 당연한것처럼 나 만을 아는 Egotist 였으니까요~정말 정말 죄송해요 다음 세상에서 다시 오빠를 만나면 나의 사랑 천배,만배 더 갚아 드릴께요~ 주님의 품안에서 부디 행복 하세요~내 사랑 오빠여! 그대 너무 그립습니다 *** 지난밤 꿈속에서 오빠를 보고나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