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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는 곳 -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81번지
귀신사(歸信寺)는 676년(문무왕 16)에 의상대사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백제 법왕 때 왕실의 내원사로 처음 세워졌다는 주장도 있다.
창건 당시의 명칭은 국신사(國信寺)였다고 한다.
그 후 통일신라 말기 도윤(道允)이 중창한 뒤 귀신사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원명국사[1090~1141]가 중창하였다.
원명국사는 숙종의 넷째 아들로 8세 때 대각국사 의천에게 출가하여 1122년(예종 17)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었으나,
이자겸(李資謙)의 횡포를 보고 귀신사로 들어왔다.
이 무렵에는 구순사(狗脣寺) 혹은 구순사(口脣寺)로 불렸다.
이름이 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는데,
절 주위의 지형이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구순혈형(狗脣穴形)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전하지만 명확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1601년(선조 34) 승려 염화(拈化)·신허(信虛)가 부분 중수를,
1624~1633년 승려 덕기(德奇)가 대대적인 중창을 하여 여래삼존불을 봉안하고
승당· 정문· 미륵보전· 시왕전과 천왕문을 건축하였고, 승려 도헌(道軒)이 나한전을 지었다.
1657년(효종 8)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1680년(숙종 6) 전각을 중수하였으며,
1707년(숙종 33) 승려 두감이 대웅전을 중수, 1715년(숙종 41)에는 팔상전을 중수하였다.
1823년(순조 23)에는 대적광전을, 1873년(고종 10)과 1884년(고종 21)에는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1934년에는 대적광전 등을 중수한 뒤 다시 귀신사로 명칭을 바꾸었단다.
보물 제826호 귀신사 대적광전(歸信寺大寂光殿)과 전라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 귀신사 석탑(歸信寺石塔),
제63호 귀신사 부도(歸信寺浮屠), 제64호 귀신사 석수(歸信寺石獸) 등이 있다. <펌>
++ 귀신사 (歸信寺) ++
조선시대 사찰건물이다.
귀신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고려시대에 원명국사가 중창하여 구순사, 국신사, 귀신사 등으로 불리었다.
고려 말 당시 이 절의 규모는 300여 명의 왜구가 주둔할 정도였고, 임진왜란 때는 승병을 양성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것을 조선 후기에 중창하였다.
대적광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건물로,
법(法), 보(報), 화(化) 삼신불(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불)을 모신 곳이라고 전한다.
법당 안에 흙으로 빚은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등 삼존불에 금물을 입혀 모셔두고 있다.
+++ 상세설명
귀신사(歸信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8) 의상대사가 세운 절로 8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 절에는 예스러운 맛이 배어 있는 건물과 연꽃무늬로 된 받침대, 동물 모양의 돌 등 많은 석물들을 볼 수 있다.
지혜의 빛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은 17세기 경에 다시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앞면 3칸 문에는 빗살무늬 창호를 달았고, 오른쪽과 왼쪽 끝칸인 퇴칸은 벽으로 만든 점이 특이하다. <펌>
대적광전 - 법회를 하고 있습니다.
2012. 6. 3. 답사때 모습
명부전
삼층석탑과 석수가 있는 곳으로 올라갑니다.
귀신사 석탑
귀신사 3층석탑은 대적광전 뒤편 축대 위의 넓은 공간에 봉안되어 있으며,
현재의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층석탑은 높이 4.5m의 화강암재 석탑으로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고려 초의 석탑 양식을 보이면서도 백제탑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래서 7세기 중엽 귀신사의 창건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또는 그보다 앞선 6세기 후반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탑의 선은 정밀하고 옥개석의 곡선이 거의 평행을 이루면서도
신라시대의 미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빼어난 작품이다.
석탑의 양식은 한 단의 야트막한 지대석 위에 단층 기단을 쌓고
그 위에 4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갑석을 얹은 다음 3층의 탑신을 올렸다.
초층 탑신은 탱주 없이 각각 독립된 석재로 우주를 세우고 그 위를 역시 4장의 갑석으로 덮었다.
우주의 사이에는 1매석의 판석을 끼워서 면석을 구성한 반면,
2층과 3층 탑신은 양 우주를 모각한 단일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얇고 넓은 옥개석은 낙수면이 완만한 반면 처마 네 귀가 살짝 반전되었으며,
이를 받치는 4릉형의 옥개받침은 8매석으로 구성되었다.
이 옥개석 위에는 사각형의 별석제 탑신받침을 끼워서 탑신을 받치게 하였는데,
2층의 옥개석과 옥개석 받침은 각각 4매의 석재로 구성된 반면 나머지는 모두 단일석으로 이루어졌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는데 여기에도 별석의 노반받침이 끼워져 있다.
2층 탑신은 초층에 비해 거의 절반 정도 크기로 줄어들었으며,
우주가 새겨졌고 역시 옥개석 사이에 1장의 돌로 된 받침이 끼워져 있다.
옥개석은 초층 옥개석과 마찬가지로 1장의 돌로된 받침이 끼워져 있다.
옥개석은 초층 옥개석과 마찬가지로 4장의 돌로 이루어졌고 그 위에는 받침돌 없이 바로 3층 탑신을 올려 놓았다.
3층 탑신은 2층 탑신보다 조금 더 줄어 들었으며 탑신과 옥개석 사이에 2장의 돌로 받침을 끼웠다.
옥개석 위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노반이 있으며 그 위는 남아 있지 않다.
전체 높이는 545m이다.
수평적인 얇은 옥개석과 4릉형의 옥개받침 형태, 여러 매의 판석으로 짜맞춘 결구방식,
그리고 탑신 아래에 별도의 탑신받침을 배치한 형식 등에서 백제탑의 전통을 계승한 고려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특히 폭이 넓고 장대한 초층탑신에 비해 급격하게 줄어드는 체감율에는 익산 미륵사지석탑의 영향이 엿보인다. <펌>
귀신사 석수
귀신사 석수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 석수는 불교와 남근숭배사상이 어우러진 신앙 미술품으로
앉아 있는 사자상 등 위에 남근석을 올려놓은 조각품이다.
불교와 무속이 합쳐진 귀신사의 석수와 남근 조각품은
이곳 사찰명이 국신사(國信寺), 귀신사(鬼神寺), 구순사(拘脣寺) 등의 여러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풍수지리에 의해 이곳지형이 구순혈(拘脣穴)이어서 터를 누르기 위해 세워졌다는 설과
백제 왕실의 내원(內願) 사찰로서 남근과 합쳐진 돌사자상을 세웠다는 설이 있다."
바로 돌사자 위에 놓여 있는 남근석이었다.
위의 설명처럼 석수는 불교와 남근숭배사상의 합작품임에 틀림없다.
귀신사가 있는 김제시 금산면 모악산을 중심으로 김제 익산 지역은
광활한 평야를 끼고 있어서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그만큼 이 지역은 신성시될 수밖에 없었다.
풍요로운 자연 환경을 끼고 있다는 이유로 이 지역은 우리 역사에서 항상 수탈과 저항의 모습을 지녀왔다.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미륵신앙 운동, 동학혁명, 증산교, 보천교, 원불교 등이
이 모악산을 중심으로 태동했거나 성장했다.
그만큼 풍수지리 사상이나 무속이 잘 발달했던 곳이다.
불교와 남근숭배사상이 어우러진 것은 어쩌면 무리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곳이 구순혈형(拘脣穴形)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다름 아닌 여성의 음부를 상징한다.
이곳 지형이 개의 입술을 닮았다는 것이니까,
입술은 개의 음부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곧 여성의 음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지형이 여성의 음부를 닮아서 그곳에 남성의 성기를 세워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풍수지리에 입각했다고 하더라도,
불교가 지니는 엄숙주의 속에서 과감히 남성의 성기를 1m 이상 되는 돌조각의 모습으로 세웠다는 것
그 자체로 흥미거리였다.
내가 다녔던 적지 않은 사찰 중에서 남성의 성기를 세워놓은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풍수지리를 떠나서 인간 본성에 대한 과감한 표현이 석수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이런 솔직한 자연과 삶과의 조화가 어쩌면 도덕적 순수성의 발로가 아닐까?
귀신사가 백제의 내원 사찰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의상대사가 676년 창건하여 국신사(國信寺)로 불렀다는 말도 전한다.
의상에 대한 많은 일화들이 있는데,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선묘(善妙)라는 중국 신도의 따님과 맺은 인연이다.
의상이 입당(入唐)할 당시 등주(登州)라는 해안에 도착해서 유지인의 집에 며칠 머물게 되었다.
유씨에게는 선묘라는 딸이 있었는데, 선묘는 의상을 보고 한눈에 반해 의상을 모시겠다고 청했다.
그러자 의상은 자신은 출가한 스님이어서 그럴 수 없다고 선묘를 타일렀다.
의상의 부동심에 감복한 선묘는 세세생생 대승 공부하는 의상께 귀의하여 의상을 돕는 신도가 되겠다고 했다.
의상이 귀국할 때, 다시 등주의 유씨 집에 들렀는데 선묘는 출타 중이었다.
그래서 의상은 그냥 배를 타고 신라로 출발했다.
선묘가 돌아와 보니 의상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의상이 오면 주려고 선물을 준비해 놓았는데 이미 출발한 것이다.
선묘는 선창에 나가보았지만, 배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래서 선묘는 선물이 배에 닿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용이 의상을 안전하게 모시고 가도록 물에 뛰어 들었다.
의상은 안전하게 귀국한 이후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짓고 화엄을 크게 선양했는데,
이것을 두고 호법룡(護法龍)이 도왔다고 한다.
게다가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할 때도 절에 부랑아들이 많았는데
선묘가 신통을 부려서 큰 바위를 비행접시처럼 만들어 하늘에 둥둥 띄우자 부랑아들이 모두 도망쳤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부석사이다.
선묘는 석룡(石龍)이 되어 부석사를 수호했으며,
의상이 무량수전에서 독경하는 소리를 듣고 눈물이 고여 선묘정(善妙井)이 되었다고 한다.
의상과 선묘에 대한 일화는 수사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어쩌면 의상과 선묘는 스님과 신도 이전에 서로 연인 관계는 아니었을까 싶다.
이것이 지나치게 세속적인 해독일지라도. 어쩌면 의상은 선묘와 함께 신라도 돌아왔던 것은 아닐까?
선묘가 의상을 지키는 용이 되었다는 것은 의상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들의 사랑을 수사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그 당시에는 흔한 용의 상징을 썼던 것은 아닐까?
의상이 입당(入唐)할 때 선묘가 자신을 모시겠다고 했을 때
과감히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8년이 지난 후 의상은 왜 또 선묘의 집을 찾았을까?
의상의 마음 한 구석에 선묘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의상과 선묘는 단순하고 세속적인 사랑관계가 아니라 보다 높은 종교적 사랑의 관계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의상과 선묘가 세속적인 의미에서 연인관계였으면 희망해본다.
돌사자 등위에 서 있는 남근석은 풍수지리를 떠나
인간 삶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 같아서 세속적이거나 욕망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거기에서 세속과 욕망을 넘어선 자연스러움, 순수 그 자체를 만난다.
삶에서 욕망을 감추려 하기보다는 드러내놓는 것이 어쩌면 더 자연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폄>
영산전
모아놓은 석조 여러 부재들
귀신사 부도 - 금산사로 가는 길 옆에 있습니다. <펌>
귀신사 부도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3호 (1974년 9월 27일 지정)
* 있는 곳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205
<귀신사에서 남쪽으로 500m쯤 떨어진 청도리 입구 논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귀신사 부도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2.50m이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기본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지대석과 중대석은 모두 팔각형이고,
앙련(仰蓮)이 조각된 팔각 상대석 위에 탑신석(塔身石)을 얹고, 그 위에 역시 팔각의 옥개석(屋蓋石)을 얹었다.
옥개석은 팔각형으로 두껍고 투박하지만 각 모서리의 끝부분을 약간 반전(反轉)시켜 경쾌한 느낌을 준다.
옥개석 하단의 서까래 장식이나 지붕 위의 기왓골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정상부에는 앙화(仰花)와 보륜(寶輪) 대신 보주형(寶珠形)의 석재만을 올려 상륜부를 마감하였다.
중대석의 높이는 55㎝, 그 한 변의 길이는 20㎝, 상대석의 높이는 42㎝, 탑신부의 높이는 63㎝,
옥개석의 높이와 한 변의 길이는 각각 42㎝, 보주의 높이는 20㎝이다.
하대석은 땅에 묻혀 있다. <펌>
** 참고 하세요 **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며 그 유골이나 사리(舍利)를 모시는 묘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당나라로부터 선종이 들어온 9세기 이후에 각 구산선문(九山禪門)에서 법통(法統)이 이어지면서
불상 숭배보다는 조사(祖師)들의 사리와 유골을 담은 묘탑이 중요한 예배 대상이 되어 많은 부도가 건립되었다.
일반적으로 부도는 석탑과 마찬가지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