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글을 읽으면서 필자는 주관적이지만 한국의 교육에 문제가 있음을 느꼈다. 짧게 말한다면, 논리와 과학성이 취약한 글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또, 일반적으로 자연과학계통의 학문을 하는 사람은 논리학을 배우지 않고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은 과학적 방법론을 배우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고 느꼈다. 프랑스에 유학한 한국인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어려움이 학문의 방법론에 대한 강조였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 교육에 논리나 방법론이 취약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므로 신과학 비판에 대한 글에 대한 반론을 겸하여 논리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글에 앞서 필자는 글 읽는 재미를 위해 논리학에서 가장 재미있는 딜레마와 패러독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논리학에서는 옳고 그른 것을 판정 가능한 진술을 명제라고 한다. 그런데 명제이면서 논리학으로 옳고 그른 것을 판정해야 하는데도 판정할 수 없는 것을 딜레마라고 하며, 명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명제가 아닌 것으로 무의미 한 진술을 패러독스라고 한다. 예를 들어보자. 갑과 을이 재판에서 변론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을은 최초의 재판변론에서 이기면 갑에게 100만원을 주기로 하였고, 갑과 을의 소송변론이 을의 최초의 변론이었다. 이에 대해 갑은 이 재판에서 자기가 이기면 당연히 100만원을 받아야 하고, 지면 을이 최초의 변론에서 이겼으므로 당연히 100만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을은 자기가 이기면 돈을 줄 필요가 없고, 지면 계약상 줄 필요가 없으므로 어느 쪽이든 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위의 딜레마는 논리학자들을 아직도 괴롭히는 것으로 논리학상 아직 미해결의 문제이다. 패러독스의 예를 보자. 유명한 역설로 거짓말쟁이의 패러독스가 있다. 즉 갑이라는 나라의 사람은 모든 말이 거짓말이고 갑의 나라의 을이 이렇게 말한 것은 참일까? 거짓일까? 을의 말: 갑나라의 모든 사람들은 거짓말만 한다. 이 패러독스는 얼핏보면 딜레마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명제가 아니다. 이 말은 다시 바꾸면 다음과 같은 말이 된다. " 이 진술은 거짓이다." 이 진술은 거짓이다는 진술이 옭고 그른 것을 판정할 수 있겠는가? 명제는 반대로 말해도 명제이므로 쉽게 알기 위해 반대로 말해보자. "이 진술은 참이다" 이제 무엇인가가 명확해 질 것이다. 즉 거짓말쟁이 패러독스는 명제가 아니다. 논리학에서는 이런 진술을 무의미하다라고 한다. 즉 참과 거짓을 판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어렵게는 상위언어와 대상언어의 구별이라는 개념이 필요하지만, 비유하자면 법정에서 피고가 아무런 근거 없이 " 나는 무죄다"라고 주장해도 이 주장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과 비슷하다. 필자가 딜레마와 패러독스를 말하는 것은 과학론(신과학 비판)에 대해 글을 올리면서 이런 딜레마와 패러독스, 즉 다시 말해 딜레마에 빠지는 주장과 의미 없는 글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영혼의 문제이다. 영혼이나 전생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 과학적으로 논증하려고 하면 딜레마나 패러독스에 빠지는 것이다. 영혼이나 전생은 물질이나 물질 현상이 아니므로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즉 과학의 대상이 아닌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고 하거나 부정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딜레마나 패러독스에 빠진다. 유신론을 증명하려고 100가지 증거를 말하면, 부정하는 증거도 100가지를 내놓을 수 있다는 말처럼, 과학이 아닌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면 딜레마와 패러독스가 초래되는 것이다. 과학적이라고 하면서 무엇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면 과학적 방법론에 따라 입증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이나, 심령학적 증거로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은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패러독스나 딜레마를 초래한다. 공을 손으로 골대에 넣어 골인시킨 것이 유효한 득점인가 아닌가는 그 경기가 축구인가, 농구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그 경기의 종류를 모르는 이상 골인이 유효인가 무효인가를 판정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딜레마, 혹은 패러독스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의 대상이 아닌 영혼이나 전생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데도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하는 것은 손으로 골대에 골을 넣었다고 유효한 득점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논리학에서 타당성과 진리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과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의 논법을 보자. 3 x 3 = 10 이라면 3 x 3 + 3 x 3 = 20이다. 이 명제는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한다. 즉 논리는 명제사이의 관계만을 말하고 추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명제의 결론이나 전제는 진리는 아니다. 즉 전제조건이 잘못되면 논리적으로 타당해도 논리적 관계의 어느 단계는 반드시 진리가 아닌 것이다. 신과학에서 주장하는 영구기관을 필자가 부인하는 이유는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즉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반드시 진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영구기관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만약 관성의 법칙이나 과학적 원인-결과론을 받아들인다면, 영구기관이 당연히 부정된다. 즉 영구기관을 주장하려면 힘에는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이 있는데 이 4가지 힘은 과학적 인과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데, 이 4가지 힘 외에 다른 힘(신과학에서 주장하는 기, 혹은 정신감응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영구기관을 다른 힘이 있다고 일단 인정하고 영구기관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타당하지만 애당초 다른 힘을 인정하지 않는 과학적 입장에서는 당연히 다른 힘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것을 요구하며,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기존과학의 법칙에 위배되므로 과학적으로는 부정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혹자는 필자를 합리주의자라고 하는데 유감이지만 필자는 오히려 감정에 더 치우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꽃과 바다를 이유 없이 좋아하고 가을에는 들판을 거닐면서 쓸쓸함을 유달리 느끼는 사람이기도 하다. 내 주위의 사람들도 감정이 풍부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필자는 주관적으로 자기자신을 감정주의자가 아닌가하고 생각한다. 필자가 객관성과 합리성을 주장하는 것은 과학에서이다. 사회과학에서는 필자는 변증법적 법칙을 믿으며, 신앙에 있어서는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신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이나 회의주의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과학적인 객관적이 없는 주관적인 인생관에서 전생이나, 영혼, 신의 존재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필자의 인생관에 있어, 전생이 있던 없던, 영혼이 있던 없던 중요하지 않다. 오늘을 성실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 세상은 현재의 문제만으로도 평생이 모자라는 데, 죽은 후의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노력의 낭비가 아닐까? 예수의 말대로 " 죽은 자는 죽은 자가 장사지내게 하고" 공자의 말대로 "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이 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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