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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지방 관료들의 의식구조-방임과 간섭의 체제
Ⅰ. 서론
Ⅱ. 본론
1. 지방관료와 황제
2. 一視同仁과 因地制宜
3. 지역 문제와 지방 관료
Ⅲ. 결론과 전망
Ⅰ. 서론
아주 먼 원시시대를 제외한다면, 최고 통치자를 정점으로 한 관료체제와 하위 관리 그리고 일반 피통치자들의 존재를 대부분의 역사 시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통치체제는 효율적인 시기도 있었지만, 역효과를 가져온 경우도 있었으며, 때에 따라서는 그 부정적인 영향이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현실적인 측면을 좀 더 고려한다면 과거의 관료제를 통하여 오늘날 관료들의 행태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으며, 권력 존재 형태의 속성은 다르지만 역사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저항과 안일, 그리고 성실성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혼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그러한 우리 현실에 대한 성찰의 기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 변화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는 일종의 동일현상이 재현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역사 시대 관료들의 의식구조에 대한 고찰은 현재에 대하여 많은 암시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명청시대 연구의 중요한 조류 중의 하나가 지역적인 접근방법을 택하고 있다는 것은 현실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시간과 공간의 교차 접근을 통해서 동일한 현상을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근래에 이르러서는 특히 사회경제사의 경우 거의 지역연구를 하고 있으며, 그 연구 성과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경제사 분야의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지방을 책임지고 행정을 운용하며, 결정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순간적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지방 관료의 의식구조에 대해서는 의외로 연구에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황제 혹은 관료제라는 국가 전체의 틀에 지방 관료를 함몰시킨 결과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의 지역사 연구가 지나치게 사회경제사의 성과에 집착하여 그 배후의 실질적인 책임자를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사회경제사 연구가 이룩한 지역사회 혹은 지역사회론이라는 것은 지역 엘리트, 신사층 등이 주도하는 사회적 권력에 주로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럴 경우 당연히 지역과 청조 혹은 국가라는 이중적인 구조체제가 성립될 수 있으며, 각각의 지역 연구자들에 의해 설정된 지역사회가 국가와 별개로 존립할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국가와 지역사회를 대립과 병렬로 생각하거나 또는 지역과 국가의 계서적 성격에 대한 입장도 중요하지만, 국가권력의 실질적인 행사주체인 관료들의 행태 역시 지역사회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지역 사회 혹은 지역 사회론에 관료라는 또 하나의 주인공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청대 이후에 나타나고 있었던 공적 분야에 대한 비관료 계층의 개입을 강조하는 입장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료에 대한 관심이 그리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수리, 育瓔堂과 같은 공공사업, 구휼에 있어서 지역 유력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명대에 비해 청대에 현저히 증가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축적되어 있지만, 상대적으로 관료들의 역할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이러한 기존의 연구는 국가와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제3의 영역으로서의 공적인 영역을 상정하고 특히 그 의미를 관료외적인 계층의 활동에서 찾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공적인 영역(public sphere)과 사적 영역에 관계없이 특히 정책 운용에 있어서 당시 관료들의 의식구조와 그의 행동방식에 대한 고찰은 지역적 연구 방법론에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특히 중국의 18세기는 관료체제가 상당히 효율적으로 운용되었다고 생각되어 왔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적극적인 현장 관리들의 활동이 상당히 상당히 주목할만 했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 경우 관료외적인 활동을 통해 형성된 공적인 영역이 지니고 있는 성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대두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관료제가 지니고 있었던 효율성이라는 측면과 관료외적인 분야에서의 활동 성과 양자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관료로서의 자격이 아니라 지역 엘리트로서 지역을 담당하는 사람들과 관료 사이에는 일종의 긴장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관료들의 반응이 상당히 흥미로울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전체적인 측면 외에도 청조의 제도와 연관시켜 관료를 고찰한 연구는 많이 있지만, 지역사회에서의 관료들의 행동양식 특히 그들의 의식구조를 고찰하고 있는 연구는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를 검토해보기로 하겠다. 다만 관료들의 의식구조에 대한 좀 더 심층적인 분석을 위해서는 개별적인 사례에 대한 사례연구가 필수적이며, 또한 의식구조라는 말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정의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시론적인 입장에서 본고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제를 개괄적으로 다뤄보려 한다.
첫째 정책 운용에 있어서 중앙정부의 태도와 지방 관료들의 태도가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지에 대한 검토이다. 널리 지적되고 있는 바와 같이 청대의 제도와 법률은 제반 사안을 매우 포괄적으로만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정책 운용의 자의성이 수시로 제기될 수 있었다. 이 자의성은 기존 제도의 연장이라는 누층적 구조를 가질 때도 있지만, 기존의 제도나 정책 방향과는 상이한 단절적 양상을 띄는 경우도 있었다.
둘째 한 지방 관료가 지니는 다의적 성격이다. 지방 관료는 자신이 행한 책임을 지는 한 개인임과 동시에 지방민에 대해서는 국가권력를 구체적으로 강제하는 국가권력의 구체적인 한 단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지방관은 항상 괴리와 조화 양면에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출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셋째 전혀 다른 면에서 지금까지 중국사 분야에서 소홀히 해온 의식구조, 이른바 망딸리떼에 대한 시론적 접근을 위한 것이다. 이 문제는 상당히 방대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관료들의 생각을 좀 더 총체적으로 접근해야 비로소 분명한 이해를 가질 수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본고에서는 국가 시책에 대한 관료들의 생각, 지역과 국가 사이의 갈등에서 관리들의 선택 등을 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존의 지역사 연구가 이룩한 토대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위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지역연구를 통해 설정된 이른바 지역사회라는 것이 중국이라는 국가체제와는 동떨어진 새로운 세계로 비춰져서는 안된다는 가설 위에서 새로운 요소를 가미해야 한다는 시론을 위한 것이다. 다만 그 주된 연구 대상 지역은 양자강 중류 지역과 그 주변 지역으로 한정하였다.
Ⅱ. 본론
1. 지방관료와 황제
청대 전체를 고려하건데 18세기는 번영의 시기라고 규정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시기는 중앙정부의 정책적 효율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중앙정부가 제반 정책을 효율적으로 실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른바 현장 관리들의 도덕성, 적극성, 실질적인 문제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 등이 모두 어우러진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양자강 중류 일대의 사회경제적 특징과 그 사회경제적 특징에서 비롯되는 정치적 특성을 다 담기는 어렵지만, 개괄적으로 이 지역이 여타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몇 가지 사항을 추려낼 수 있을 것이다. 양자강 중류 지방 전체를 포괄하는 문제로서 이 지역에는 漢口라는 당시 최대의 무역항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대체로 도시문제라고 규정할 수 있는 여러 사안들, 도둑, 화재, 풍속 등의 문제가 이 지역의 주요한 관심사 중의 하나였다.
둘째로는 이 지역이 특히 명 중엽 이후부터 양자강 하류지역으로 상당량의 미곡수출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미곡 유통을 둘러싸고 발생했던 제반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유통 문제를 새로운 구도에서 접근하고 있는 연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른바 出境의 문제는 당시 지방관들이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였다. 대체로 중국 전통 경제에서 미곡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출경의 문제와 아울러 社倉과 義倉 등의 미곡관리에 대한 문제는 항상 중요한 사안 중의 하나였다.
셋째로는 水鄕이라 불리운 이 지역에서의 수리문제는 생존의 문제와 연결된 매우 중대한 사안이었다. 역시 많은 연구가 있지만 수리가 중요하다는 당위성이라는 측면 외에는 수리 문제를 중심으로 한 관료들의 입장이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었으며, 특히 水災와 같은 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荒政의 실시가 매우 미묘한 사안이 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변방 지역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전체를 놓고 볼 때 중심지와 주변부가 존재하고 있지만 일정 지역 내에서도 역시 중심지역과 주변지역이 존재하고 있었다. 양자강 중류 지역의 경우 삼성교계지역 외에도 호남성 북서부 일대와 남부 지역 강서성 동부 지역, 그리고 호남성과 강서성이 맞닿아 있는 호남성 동부 지역과 강서성 서부 지역과 같은 대표적인 산악지역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양자강 중류 지역은 그 지리적 위치만큼이나 사회경제적으로도 중간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상품경제의 발달을 대표하는 중국 최대 무역중심지를 지니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재해와 변방지역의 사회적인 문제로 항상 시달려야 했던 양면적인 모습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아주 일반론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회조직 혹은 정치조직을 상정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18세기 중국은 전반적으로 행정의 효율성이 극대화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번영의 이유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지만 본고의 주제와 관련시켜 생각한다면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체제의 효율성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황제와 지방관료들의 입장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권을 대표하여 일선에 나아가 직접 행정을 펼쳤던 지방관료에 대한 황제의 태도는 의외로 그리 긍정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황제는 巡撫 혹은 總督과 같은 고위관리와 知縣과 같은 하급관리들의 무능을 항상 걱정하고 있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능력 자체를 매우 의심하는 태도를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황제는 각 관료들의 유능과 무능한 점을 서슴지 않고 비교하고 있으며, 그 비교를 통하여 각 지방관료들이 자신의 책무에 힘 쓸 것을 강조하고 있다(當竭力勉之).
이와 같은 사실은 황제 측에서 관료들을 독려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황제가 각 지역의 실질적인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 관료들에게 내렸던 명령은 본질적으로 의례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다. 즉 황제 자신의 포괄적이고 자의적인 명령을 수행하는 관료들이 정상적인 정책 시행에서 벗어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청대의 황제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명령을 서로 다른 지방관들에게 내릴 경우 해당 지방관들의 입장에 따라 그 어조가 상당히 달랐다는 사실이다.
명대 이래로 황제의 명령을 의미하는 다양한 용어들이 존재해왔고, 명조 제도의 상당부분을 이어받았던 청조 역시 그러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용어 차이는 두가지 측면의 계서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의례의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는 해당 사건이 지니는 정치적 의미에서의 계서성을 의미하며, 다른 하나는 해당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인물, 혹은 그 사건에 포함되어 있는 인물에 대한 지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황제의 지방관료들에 대한 태도는 매우 차별적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황제 자신이 그처럼 차별성을 가지고 관료를 대하는 한편, 관료 개개인에게 엄격한 도덕성과 임무에 힘쓰도록 한 것은 한 관료로서의 책임의식의 강조에도 그 이유가 있지만, 청대 행정 운용의 특징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체로 청대의 제반 규정들이 매우 포괄적으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안은 지방관료 자신들이 내려야만 하였다. 황제 자신도 이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한 상황에 부합되는 것이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못하며, 또한 어떤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다른 정책의 운용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황제는 지방관료에게 圓融體會, 다시 말해서 정책 시행이 황제의 의도와 백성의 이익에 부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동시에 膠株鼓瑟의 상황, 즉 형식에 얽매여서 그 근본을 놓칠 수 있는 위험을 황제는 항상 경계하였다.
한편 황제는 각 지방관들 사이를 견제하는 정책도 아울러 시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견제 정책은 한 지방관이 두가지 업무를 관장할 경우, 그리고 상대적으로 신뢰가 덜 가는 관리들에게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옹정7년 옹정제는 호북순무 馬會伯을 辦理西路軍에 동시에 임명하면서 당시 서북 지역 일대의 군사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던 大將軍 岳鍾琪와의 협력을 당부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지방관을 대하는 옹정제의 태도는 매우 흥미롭다. 실제로 악종기는 서북 지역의 군사 작전의 실패로 인하여 옹정제의 미움을 받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마회백을 그의 협력자로 임명하면서 악종기에 대한 마회백의 적극적인 협조와 악종기의 정책 운용에 대한 순종을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다. 즉 마회백의 자리에 만주인을 임용하려했지만, 만주인이 악종기의 행동을 견제할 우려가 있으며, 문관에게 그 자리를 위임하면 군사업무에 밝지 못해서 일을 그르칠 염려가 있으므로, 옹정제의 표현을 빌자면 어쩔 수 없이(再四躊躇) 마회백을 임명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직접적으로 황제 자신이 다른 지방관료의 보고를 받기 전에 특정 지방관료의 보고를 먼저 받기를 원하고 있는 장면도 목격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옹정제가 총애했던 지방관료 중의 한 사람인 朱綱이 湖南布政使로 임명되었을 때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주강의 전임인 호남포정사 宋致가 재임기간 동안에 10만여량의 지방재정을 손실했을 뿐 아니라 각 州縣에 대한 제반 업무도 미진한 점이 많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 혁직을 요구한 주강의 상주에 대답하면서 지방의 吏胥들이 연줄을 이용하여 북경에서 그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일 것을 경계하여 미리 주지를 내려보낸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덧붙여서 사사로운 감정을 내세워서 상주문에 사실을 숨긴다면 다른 지역에서 올라온 상주문과 비교하여 은익한 사실이 있다면 안될 것이라는 사실을 주강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전반적으로 황제는 지방관의 정책 운용이나 그 능력에 대해서 많은 의심을 품고 있었으며, 항상 경계하는 마음으로 지방관을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주접제도라는 틀 자체가 지방관들의 상호경계를 자동적으로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주강이 부임하여 이전의 포정사와는 달리 公費銀을 더 많이 걷는다는 다른 사람의 밀주(有人密奏)가 올라왔다. 황제 자신이 신임하는 지방관이었기 때문에 황제 자신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다시 이 문제를 살펴볼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朕亦再加訪察).
황제는 각 지방관료들이 행하는 통치상의 문제를 매우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옹정제의 경우 지방관들이 구태의연한 태도로 지방관아에 앉아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항상 경계하면서 현장에 대한 직접 방문을 항상 독려하고 있었다.
황제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당시 지방관들은 행정운용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으며, 제반 문제에 대해서 유보적인 태도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주강의 경우에도 호남성에 부임한지 이제 반년 밖에 되지 못하여 省 정책 운용의 전체적인 틀이나 개개 관리들의 자질을 아직 파악하고 있지 못함을 밝히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일종의 책임회피라고 할 수 있는 위와 같은 언급 외에도 당시 지방관들이 황제에게 거짓보고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사실이다. 주접제도 틀 안에 密奏제도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제도를 통하여 종종 지방관료의 거짓이 들통나곤 하였다.
따라서 황제와 지방관료 사이에는 황제의 불신과 엄격한 정책 운용의 강조라는 양자의 틀이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황제의 불신은 관료 자체에 대한 불신이라기보다는 당시 청조가 지니고 있는 정책 운용의 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황제는 계서적인 관료제도의 최고위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정책결정을 위한 명령은 대부분 매우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그 상징성은 종종 현실 인식의 한계로서 황제 스스로에게 각인되었으며, 이것이 관료들을 채찍질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이를테면 심한 경우 황제는 지방관료들에게 가소롭다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쓰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본다면 황제가 의도했던 것은 자신의 매우 포괄적인 명령이 궁극적으로는 제도적인 혹은 개념적인 외피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황제의 의도가 각 지방 관리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투영되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지방 관료에게는 황제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점과 해당 지역의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중의 짐이 되고 있었다. 특히 해당지역의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雍正硃批諭旨와 같은 奏疏類의 사료에서는 인지제의라는 말로 표현되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2. 一視同仁과 因地制宜
一視同仁이라는 용어는 매우 상투적인 용어로써 모든 백성과 지역은 황제의 염려 하에 놓여 있으며, 따라서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차별없이 모든 사건을 동등하게 처리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황제의 온정주의적인 입장, 다시 말해서 황제는 모든 백성을 자신의 친자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거꾸로 因地制宜라는 표현은 사안의 처리를 해당지역의 형편에 따라 처리하라는 방임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지제의라는 표현은 각 지역이 독립적으로 행정을 실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옹정4년 호광총독의 자리에 있었던 福敏의 예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인지제의라는 원칙이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총독 복민과 호북순무 憲德이 제기한 문제는 대도시 지역(衝繁之府州縣) 못지 않게 외진 지역(偏僻之府州縣)에서도 역시 유능한 인재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들을 잘 이용하면 행정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논지였다. 이것을 옹정제는 調繁調簡之例로 칭하면서 그러한 제도가 제대로 시행된다면 훌륭한 제도하고 할 수 있지만, 오히려 사사로운 것에 대한 간섭이 될 것을 우려하여 함부로 그러한 정책에 동의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일단 지방 관료들의 일선 행정에 황제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다는 입장을 황제는 밝히고 있다. 실제로 이 문제를 언급한 까닭은 과중한 업무에 비하여 그 사람의 재능이 부족하거나 반대로 재능이 출중한데도 불구하고 하릴없는 지방에서 그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관료들이 모두 유능하고 정직해야 하지만 그 인물의 됨됨이를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우선 지방 행정의 요체가 된다는 사실을 옹정제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인지제의라는 원칙은 업무에 맞도록 지방관을 배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인지제의는 해당 지역의 분위기를 적절하게 고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옹정제는 위에서 언급한 능력의 차이와 함께 각 지방관료의 위계질서와 그에 따른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아울러 해당지역이 지니는 특성에 따라 일의 경중을 나누고(要缺, 中缺, 簡缺) 그에 따라 인원을 배치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이 대목은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데, 원문을 그대로 옮긴다면 “如遇要缺則於中簡之中 擇才守兼優者 一面題達 卽一面調補所調之缺”이라고 되어 있다. 만약 매우 중대한 일(要缺)이 발생했을 경우 비교적 덜 중요한 일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 가운데에서 재질이 있는 자를 택하여 지방관이 정식 관리로 임명하거나(題達) 혹은 결원을 보충하는 관리(調補)로 임용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어 四川按察使 呂耀曾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자신 휘하의 관리들을 살펴보건데 주현 가운데에서 특출한 사람은 10명 중 1,2인을 얻을 수 있고, 雜職 가운데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10명 가운데 3,4인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이들을 자격에 따라 직급을 올려준다면 2,30년간 온 힘을 다해 일을 할 수 있을 것임(若循資格陞遷 則竭二三十年之力)을 상주하고 있다. 이렇게 한다면 재주는 있지만 윤리적으로 타락한 正印官보다 훨씬 났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상주에 대하여 옹정제의 비답은 당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행정 운용의 한 단면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단 지방 독무들의 그러한 생각에 동조를 하면서도 “永著爲例 則萬萬不可”, 다시 말해서 그러한 사례를 고정된 법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옹정제의 이러한 태도는 각 지역의 필요에 따라 일시적으로 사람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일을 시키는 것(一番鼓舞激勤)은 가능하지만 그것이 정례화되면 많은 사람들이 쓸데없는 경쟁을 벌일 수 있음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계를 지적하면서도 말미에서 옹정제는 대체로 지방 고위 관료들의 자율적인 정책 시행을 강조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된 모든 사실은 지방관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한편으로 모든 일을 각 지역의 형편에 맞춰 처리하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좀 더 분명하게 각 지역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귀주부의 예이다. 귀주부 역시 사천성과 마찬가지로 陞用의 문제를 당시 貴州巡撫 毛文銓이 주청한 바 있다. 귀주성 역시 호남성과 마찬가지로 묘족 때문에 사회적으로 상당한 문제가 제기 되고 있었으며, 모문전은 귀주지역이 지형적으로 매우 험하여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결원을 보충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옹정제는 귀주성 자체의 업무가 그리 많지 않으며 추승의 예 역시 그리 적체되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새로운 예를 정해 결원을 보충할 필요가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귀주성의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예외적인 선례를 남긴다면 邊缺, 海缺, 河缺 등의 문제를 지니고 있는 지역이 어디 귀주성 하나 뿐인가 하고 반문하고 있다.
인지제의 정책의 또 다른 특징은 지방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배려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방관료가 부임할 경우 대체로 다음 사항을 유념하고 있었던 듯 하다. 첫째 전임 지방 관료가 해결하지 못한 사안을 처리하는 문제였다. 이 경우 사건의 처리 기한을 展限과 原限으로 구분하여 사건의 처리 기한을 좀 더 융통성있게 운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문자 그대로 전한은 처리 마감기한을 연장하는 것이며 원한은 원래 규정된 기간 안에 사건을 처리하는 것이다. 4개월의 원한은 2개월 연장하며, 6개월의 원한은 3개월 연장하는 방식으로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 사건의 처리기한을 연장시키는 것이 관례였다.
청 전기 행정의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지방관이 교체될 당시 전임 지방관의 관리소홀로 인하여 부정적인 사례가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미곡의 관리, 奏銷, 상평창곡의 보유 실태 등의 분야에서 그러한 예가 현저하였는데, 옹정제는 도임 초에 너무 가혹한 정책을 펴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다. 특히 새로 부임한 지역에 대한 사정이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처리기간에 얽매여서 일을 그르쳐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옹정제는 강조하고 있다.
둘째 해당 지역의 풍습, 혹은 특정 상황 등을 적절히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역시 인지제의라는 정책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호남성의 경우 호남성 서부 지역은 묘족이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었던 곳이었다. 묘족과의 분쟁이나, 묘족지역에서 소송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그 지역 사정에 밝은 사람을 앞세우는 것이 사건 해결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심지어 이 경우에는 관리들의 고유한 능력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어조로 옹정제는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인지제의는 특히 해당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당시 관리들에 의해서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불러 일으켜 중앙정부의 정책과 정면으로 상충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미곡수급에 있어서 지방관이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의 미곡을 다른 지역으로 수출하는 것을 제지했던 遏糴과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점에 대해서 옹정제는 다시 偏執不通之罪라는 이름으로 관리들을 엄히 꾸짖고 있다. 이미 이 점을 언급하고 있는 연구가 있지만, 대개 이 연구는 미곡수급이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보고 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당시 지방관들이 미곡수급을 개개 농가의 문제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일정지역(境)에서의 수급관계로 파악하고 그 지역에 미곡이 부족한 경우에는 미곡의 수출을 금지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한다면 이 境의 문제는 단순한 미곡수급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청정부의 전반적인 경제 정책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명청시대 민간 분야의 급격한 성장으로 인하여 사실상 경제적인 분야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가 불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거꾸로 상당 부분은 민간에 의해 운용되는 경제체제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 청대 경제의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출경을 금지한 것은 관할지역의 정치적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자기 방어적 논리라고 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一視同仁이라는 황제의 기본적인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출경의 문제도 중국 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황제의 전체적인 시각(販運流通)과 지방을 실제 다스리고 있는 지방관료의 입장이 서로 상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묘족 이외에 당시 특히 강서 지방을 중심으로 많이 언급되고 있었던 붕민의 문제에 대해서도 옹정 2년 江西巡撫 裴彳率 度는 강서 지방에 編甲을 명령하면서 각 지역의 실정에 맞도록 융통성을 적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즉 부임한 지방의 사정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身任地方細訪 情形各有不同) 붕민의 처리는 마땅히 인지제의에 따라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지제의에 따라 사정을 고려하여 법을 정한다면 지방관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훨씬 손 쉬울 것이라는 점(順情立法 地方官得人方能有益)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
이처럼 인지제의로 표현되는 당시 지방관료의 대표적인 행정정책은 당시 관료제의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중요한 암시를 내포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황제는 매우 포괄적인 정책 운용을 일시동인이라는 온정주의적 입장에서 펼치고 있지만 황제의 국가적 단위의 통합성과 지방관료의 지역단위를 중심으로 한 통합성 양자가 종종 충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황제와 관료 사이는 직선적인 관계였고 지방관리와 현장은 사슬 혹은 곡선적인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동적인 관계에서 나온 명령을 지방관리들은 자신의 업무를 중첩적으로 수행할 수 밖에 없는 고민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황제는 황제대로 최고위의 황제가 계서상 하위에 있는 다수를 고려해야 할 필요는 분명히 있었다. 결국 계서상 하위에 있는 다수가 본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관료제 운용의 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허점과 모순 그리고 비능율이 자리잡을 수 있는 여지가 항상 상존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지방관료가 자신의 관할지역이 지니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러한 모순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3. 지역문제와 지방관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방 행정에 있어서 황제와 관료 사이의 관계는 느슨함과 압력, 그리고 방임과 간섭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모순 속에서도 고위 지방관료는 해당 지역의 사회적 통합이라는 문제에 많은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각 지역의 문제를 당시 지방관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또 처리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물론 이 문제는 각 문제별로 좀 더 심도있는 검토가 필요한 주제이지만 여기서는 구체적인 사안이나 사건에 대해 그것을 관료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점과 관련하여 주목할만 한 사실은 당시 황제나 지방관들은 관할지역의 풍토나 지역 주민의 기질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언급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황제나 관료들이 일반민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느냐의 문제는 따로 논의해야 할 사안이지만 전반적으로는 거의 상투적이라고 할 만큼 일반 백성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언급하고 있다.
다른 지역에도 비슷한 상투어가 나오기는 하지만 유난히 호북성 사람들의 기질을 나쁘게 평가했던 것이 당시 청대의 분위기였던 것처럼 보인다. 앞의 각주에서도 지적했듯이 그것이 당시 위정자들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해도 호북성의 경우는 예외적이라고 할 정도로 호북성 주민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호북성 지역에 부임하는 관리들은 호북성 주민들의 그러한 기질 때문에 그 지역을 다스리기가 어렵다는 언급을 자주 내비치고 있다.
그러한 언급은 호남성의 경우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호남성 주민들 역시 그 성질이 매우 사나워 관리들의 교화가 효력이 없음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관리들은 백성들의 교화를 위한 실제적인 행동은 하지 않은체 생색을 내는데 그치고 있으며, 하리들은 거짓을 꾸미는데 급급하다고 하였다. 당시 관리는 호남성 주민들의 성질이 사나운 이유는 인구가 증가하여 의식주의 해결에 급급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반대로 일반화시키기는 어렵지만 호북성 인접 지역의 지방민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
그러면 당시 양자강 중류 지역을 담당했던 관리들이 그 지역이 지닌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 지역의 문제점 모두를 파악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당시 현장에 있었던 관리들이 올린 상주는 나름대로의 구체성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당시 해당 지역의 실질적인 문제점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옹정 3년 호북순무로 재직했던 法敏은 당시 부임후 호북성이 지니고 있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첫째 호북성 사람들은 성격이 거칠어 소송을 일삼는 자가 많아서 사소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독무가 근무하는 아문에 와서 소송을 제기하는 일이 많다는 점이다. 둘째 조량 부문에 있어서 폐해가 많아 일반 서리들의 부정이 많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셋째 호북 지방은 그 관할하는 지역이 넓어 행정력이 두루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耳目難周) 새로운 관리가 부임해도 이전의 악습을 모두 은폐하여 행정의 폐단이 심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넷째 사소한 일에도 문건을 만들어 보고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모든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는 단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섯째 각 아문의 차역인들이 성관리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귀담아 들은 연후에(探廳各上司擧動) 그것에 일시적으로 대처할 방도를 꾸미는(打點彌縫) 이른바 坐省이라고 불리는 악폐가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행정을 펴나가는데 가장 나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여섯째 감옥에 병든 죄수들이 많이 있음을 지적하고 경죄인은 그 상태를 일일이 살펴보고 중죄인을 옥졸들이 함부로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일곱째 한구 등을 중심으로 한 도시에서 발생한 제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즉 한구에는 많은 화물이 도착하는 곳이기 때문에 姦牙들의 피해가 많다는 점과 아울러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인신매매가 성행하고 있음을 밝히면서 그 엄단을 촉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社倉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사창을 건립하기 위해 돈을 기부한 사람들의 명단 작성을 명령함과 동시에 사창의 건립을 약속하고 아직 그것을 시행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풍년이 오는 때를 기다려 그것을 시행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호북성을 다스렸던 또 다른 관리 중의 하나였던 옹정 9년의 호북순무 王士俊의 언급 역시 위 내용과 비교하기 위해서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호북성 주민들의 성질이 매우 험하다는 말과 함께 武漢, 黃安, 荊襄 등지에는 본래 도둑이 많으므로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保甲民壯을 강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그는 여러 사건의 문건이 누적되어 여러 문제에 대한 정확한 사실 규정이 어렵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심지어 100여건의 문건이 서로 뒤섞여 있는 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한구와 같은 대도시의 行에는 무뢰들이 득실하여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해 내기가 어렵다는 말과 아울러 그러한 상황은 지식인들이 제몫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또한 지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지역의 水利와 社倉의 문제 역시 제대로 운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황제에게 주청하고 있다.
지방 관리들의 위와 같은 지적은 굳이 호북성 한 성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새로 부임한 이상 해당 지역의 실상 파악과 아울러 좀 더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으려 했던 것이 당시 관료들의 대체적인 생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호북지역의 경우 다른 지역과 다른 몇가지 상황을 엿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당시 순무 혹은 총독들이 관할 지역에 부임하여 부딪혔던 문제들을 알 수 있다는데서 위 언급은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전반적으로 지방관리가 부임하여 그 지역 사정을 살펴볼 때 그 지역의 서역들의 행정 운용과 그들의 능력, 청렴도 등을 우선 고려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서리 계층은 지역 사정에 어두운 독무보다 현지 사정에 밝았을 뿐 아니라 원칙적으로 그 재임기간이 5년으로 한정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임무가 끝난 다음에도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업무에 상당히 능숙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경험이 없는 독무들은 이들에게 행정의 많은 부분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으며, 자연히 그들에 대한 장악 혹은 업무 협조의 부탁이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호북성은 당시 지방 관료들이 행정을 수행하기가 수월한 지역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지역이 서리들의 행정 근무 태도가 그리 좋지 못하였으며, 또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역 주민의 성격이 다른 지역보다는 상당히 거친 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리, 아역의 문제에 있어서도 궁극적으로는 그 지역의 상황에 맞춰 그들을 선발하고 특히 그들을 자주 바꿔 폐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황제의 포괄적인 정책 지시가 독무 수준에서 그 지역에 맞도록 변하고 있으며, 다시 독무는 해당 州縣의 하급관리에게 다시 행정의 상당부분을 위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이런 종류의 방임은 지방 행정에 상당히 보편화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당시 지방행정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사창의 문제나 지역 수리 문제에 있어서도 청조의 입장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지역의 예이기는 하지만 관리들이 수리 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며, 심지어 황하의 경우에는 그 황하의 수리문제를 총괄적으로 관장하는 지위가 상당히 위험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 지위를 회피하는 경우도 있었다. 호북성을 중심으로 한 양자강 중류 지방 일대의 수리 문제에 대한 연구는 많지만, 수리문제에 대한 관료들의 태도를 명백히 밝히고 있는 연구는 아직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상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좀 더 천착해야 할 주제라고 생각되지만 수리문제에 대한 옹정연간의 적극적인 관료들의 태도와는 달리 건륭연간에는 몇가지 중요한 태도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이미 많은 연구가 나와 있는 바와 같이 특히 사완의 무분별한 건설로 인하여 홍수의 위험이 증대되었기 때문에 특히 양자강 중류 지역의 경우 거의 모든 지방 관료들이 사완의 축조를 금지하거나 또는 기존의 사완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지역에 따라 수리문제에 대한 입장도 역시 달랐다. 일단 전통적으로 수리문제는 官督民辦의 형식으로 진행되었지만, 국가의 수리문제 개입이 일반 백성들에게 해가 될 경우에는 백성들이 독자적으로 관리를 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편 위에서 든 국가 권력에 대한 민간차원의 수리권 문제의 확보라는 오래된 연구 결과 외에 수리문제의 심각성이 한층 극명하게 드러났던 건륭연간에도 일부 관료들은 私垸의 개축 등에 대해 여전히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사완 주변의 경작지는 생산성이 높았기 때문에 징수하기가 용이하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이런 점에서 건륭연간은 수리문제를 두고 관료들 사이에 매우 극단적인 태도를 볼 수 있는데, 건륭연간의 경세관료로 널리 알려진 陳宏謀 역시 한결같이 제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제완의 튼튼한 수축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진굉모의 경우처럼 수리문제에 적극적인 경우에도 여전히 해당지역의 여론을 고려하는(參酌輿論)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볼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매우 많이 있지만, 예를 들어 어느 지역의 수리문제가 더 긴박한지를 살펴보기 위해 시찰을 할 경우에도 항상 그 지역의 傳紳耆人을 대동하였다.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수리사업의 규모가 각 지역마다 차이가 있고 그 위험성 역시 그러하다는 점을 인정하여 가장 긴급한 지역부터 수리사업을 시행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는 한편으로, 그 수리사업을 용이하게 전개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그 지역의 분위기와 함께 고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수리사업 전개의 용이성 여부는 앞서 언급한 대로 해당 지역의 지형과 그 긴박성에도 달려있겠지만, 여론이라는 좀 더 복잡한 과정을 여과시켜야 했던 것이다.
많은 경우 지방관리는 지역사회와 국가라는 두 개의 영역 사이에 위치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황제의 권한을 대변하는 사람으로서 지역사회와 대립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과 지역 사회를 위해 국가 권력에서 괴리되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지방 관료들은 국가와 지역사회라는 이중체제의 중간 단계에 있었던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그들의 행동방식에 선택을 부여했던 요인은 상당히 다양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순무들이 지역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피상적인 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앞에서 예를 든 진굉모나 그 밖의 당시의 저명한 경세관리들의 文檄 형태의 글이 많이 남아 있지만, 실제로 이들이 구체적인 정책 실시에는 관료 외적인 형식을 빌려야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또한 순무 사이의 情誼라는 개념 역시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경우 지역의 폐단이 그대로 존속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예를 들어 도시문제의 경우 위 호북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姦商이나 牙行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호북성 한구에만 그치고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 결국 순무들은 어느 지역에 가더라도 동일한 문제점을 전시효과를 위해서 나열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상존하고 있었으며, 고위 관리 교체시 전임 관리가 저지른 비행을 철저히 파악하는데는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이와 같은 악순환은 각 지역에서 운용되고 있었던 창곡문제에서도 전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적어도 필자가 살펴본 자료에 의한다면 어느 시기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창곡이 제대로 관리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관리들은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특히 각 지역에서 운용되고 있었던 사창의 문제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창은 그 성격상 민간이 주도했던 창곡이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관리들의 개입이 용이하지 않았던 제도였다. 진굉모의 건륭 12년의 진술에 의하면 호북성 社穀量은 477,600석이었으며 많은 양의 창곡을 보유했던 현이 2-300,000, 그리고 적은 현의 경우에는 천석 미만이었다. 그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상평창곡을 이용할 수 없는 주민들이 사창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이 제도는 구황제도의 중요한 근간이 되었던 제도였다. 하지만 민간주도로 운용되었기 때문에 사창의 책임자들이 사창 운영에 있어서 제일 큰 문제점은 이른바 虧空의 문제가 아니라 관민 양자 입장을 여하히 조절하느냐가 좀 더 커다란 문제였다.
사창의 곡식을 빌려가고 난 후에 갚지 못하거나 곡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저장할 장소가 마땅치 못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殷實良民들이 사창의 관리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이 경우 지방의 游棍들이 사창의 책임을 자임하고 나서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려 하기 때문에 관리들은 대개 건실한 양민들에게 강제로 책임을 떠맡길 수 밖에 없었다. 한편 경우에 따라서는 사창의 곡식을 여러 곳에 나누어 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일이 그 실상을 조사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書差를 이용할 경우 역시 비용이 들기 때문에 그 부담이 고스란히 백성에게 되돌아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대체로 이러한 사창의 문제에 대해서 당시 지방관료들이 시행했던 정책은 실제로 단순한 미봉책에 불과하였다. 우선 그 실태를 전부 파악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선별조사하는 방법인 抽査를 실시했으며, 해당 지방관리가 부임하기 이전에 있었던 여러 문제점에 대해서는 因地土所宜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무마하는 선에서 그 조사를 그치고 있었다. 다만 앞으로는 실정에 맞는 규칙을 정하여 관민이 그 규칙을 성실히 이행하는 한편, 새로운 규칙의 제창 등을 다시 논하지 말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것은 官民의 一心體察을 강조하는 한편으로 민간주도의 사창 관리에 관이 적극적으로 혹은 빈번하게 개입하는 것을 그리 환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었던 상평창곡의 경우도 역시 사창과 비슷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상평창곡은 전적으로 관료들이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자세한 규정과 황제의 빈번한 언급이 있는 제도였다. 하지만, 현실적인 측면에서 각 지역의 기후에 따라 그 보존량에 차이를 두어야 했으며, 특히 해당 지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종류에 따라 米麥 이외의 것을 좀 더 융통성있게 저장하는 탄력성이 필요한 제도였다. 특히 상평창 운용에 있어서 성 단위의 고위직 관리와 황제로부터 상평창 운용에 대한 실사를 명령받아 이른바 ‘交代’를 실시했던 관료 사이의 갈등은 중앙과 지방 사이에 놓여있는 감독체계와 지방관료의 실질적인 운용체계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역설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인 측면에서 지역문제는 지방관료의 평가와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역으로 말하자면 지역에서 발생한 혹은 그 지역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문제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것이 행정의 일반적인 원칙이라 하겠다. 결국 지방관료가 자신의 관할구역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신분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문제였다. 행정 운용의 안일과 경우에 따라서는 분식도 서슴지 않았던 관료들의 행동에는 그러한 현실적인 고려도 분명히 작용하고 있었다. 옹정제의 거듭되는 강조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관료들이 거짓보고를 올린다는 불만은 바로 그러한데서 비롯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건데 지역 문제 해결에 있어서 황제의 원심력을 강하게 느꼈던 지방 관리들은 사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라는 한 측면 외에 국가 권위의 사회적 적응이라는 또 다른 측면을 고려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사안에 따라 관리들의 대응방식이 전혀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추상적인 형태의 지역 문제라고 할 수 있는 풍속의 문제 혹은 그 지역의 분위기, 한 관료로서의 충성을 다짐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기술적인 문제나 구체적인 현안, 그리고 특히 그 지역의 이해관계와 밀접한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 통합이라는 명제를 항상 생각해야만 하였다. 결국 후자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는 일시동인이라는 상위개념보다 인지제의라는 하위개념이 지방관들에게는 훨씬 더 중요한 요소였다.
Ⅲ. 결론과 전망
이 글은 행정의 효율이 중국 그 어느 시대보다도 효율적이었다고 알려진 18세기 당시 관료들의 행동양식과 의식구조를 시론적인 입장에서 다룬 글이다. 어떤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제기에 그치고 있는 글이기 때문에 결론은 아직 잠정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다음 몇가지 사실은 분명히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주목할만한 것은 황제와 지방 고위관리 사이의 심리적 간극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지 않지만 적어도 황제의 끊임없는 견제와 감시라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황제 자신이 이른바 관료화되는 것을 매우 염려했던 것처럼 보인다. 계서적인 관료체제를 황제 자신이 통괄하고 있지만, 자신은 결코 그러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자의식과 함께 결코 속해서는 안된다는 황제 스스로의 격리감이 상당히 작용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지방관료는 관할 지역 사회의 분위기를 일차적으로 고려하는 조심성과 함께 자신의 휘하에 있는 하위관리들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역시 시도하고 있었다. 관할하고 있었던 지역사회에 대한 고려는 인지제의라는 원칙에서 행해졌으며, 결국 황제의 포괄적이고 한편으로는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종종 대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황제의 구체적인 명령이나 정책 시행이 최하위까지 미칠 수 있는 영역은 주 혹은 현 단위였으며, 실질적으로 현에서 정책을 선전하고 펼쳤던 인물들은 관료체제 외부에 존재하고 있었던 서리계층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는 당시 지방 고위 관리들은 정책 시행자가 아니라 일종의 전달자였던 셈이다.
셋째 따라서 하향적인 정책 시행과 계서상 최하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일반 백성들로부터 나오는 상향적인 의사를 당시 관리들은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결국 중앙의 정책은 지역화(localized) 혹은 지방화(regionalized)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직은 미약한 결론이지만 관료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당시 사회의 이해를 위한 필수적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서구학자들의 연구결과를 그대로 수용한다면 관료 영역은 신사나 상인계층에 이은 제4의 영역이라고 부를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좀 더 심도있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즉 구체적인 정책이 각 지역별로 어떤 관련 하에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는지에 대한 천착이다. 본고에서는 단순히 문제제기에 그쳤지만 수리문제나 사창과 같은 제도와 관료의 행동방식을 연결시켜서 연구하는 것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 언급이 관료의식의 공간적인 연구라고 한다면 동일한 정책이 시간상의 차이를 두고 어떻게 변화되어 나타나고 그 기저에 잠재하고 있는 관료들의 사고방식을 연구하는 것 역시 매우 유용할 것이다. 특히 이경우 일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청 전기 국가 정책과 태평천국 이후 국가정책의 변화를 아울러 고려하는 것 역시 관료들의 의식구조 추적에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위 각주 21)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8세기라는 번영의 시기가 역으로 당시 관료들에게 안주의 태도를 심어주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며, 그러한 안일이 18세기 후엽 중국 쇠락의 한 원인으로도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지방의 고위 관료는 자신을 국가를 대표하는 존재로 자각하고 있었지만, 18세기라는 번영의 시기에도 관료들의 구체적인 정책 시행 대상이었던 일반 백성들의 생각이 반드시 그러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관료들의 의식구조 연구는 바로 이 공백을 메꾸는 것이며, 이 간극의 이해야말로 행정의 효율성이 최고조에 달했던 18세기 이해의 한 단서가 될 것이다.
A Preliminary Approach to the Bureaucratic Mentality in the Eighteenth Century China
CHUNG Chul-Woong
In general, the scholars of the Chinese history agree that the Chinese bureaucratic system was highly effective in Eighteenth Century. But the results of the socio-economic history in Ming-Qing period forget the mentalities of bureaucrats who always confronted the real regional problems in thier jurisdiction.
This article aims at the primary understanding of the bureaucratic comportment, which will finally light on the reality of state power and its attributes as well as the bureaucratic relation to the local circumstances. In this point of view, this study is a little different to that of public sphere/civil society which stresses more or less extra-bureacratic activities in particular areas in Qing dynasty.
In spite of short and still incomplete study, we can see some characteristics of bureaucratic mentality from the bureaucratic policy decision and emperor's attitudes toward his own officials. First of all, there existed a psychological discrepancy between emporers and high regional officials. We can hypothesize some reasons to this emporers' attitude, one of which is a check and balance for realizing the more effective government. More important is that the emporer in this period was probably afraid that he becomes a part of hierachical system. That is, he ordered but he wanted himself to feel that he is an only personality above all the bureaucratic organization.
Second, the regional officials had to resolve the two problems. One is that, as a representative of the emporer's power, he must perform his duties without causing any local resistances. Another is that the state power, arbitrary and inclusive in many cases, does not go along the local indigenous conditions. The local officialdom was obliged to choose an another principle so called "a policy for adaptable to regional variables(因地制宜)". The emporer's order ordinarily arrive at the zhou(州) or xian(縣) level below which clerks and government runners perform their miscellaneous but indispensable affairs like a collecting a land tax and a tribute grain. With some exceptions, the high official is only a transmitter of the emporer's order but not a concrete policy performer.
Third, if we can get in mind the second thing mentioned above, the regional bureaucrats in this period always consider the two ways of pressure, one is upward pressure from the local people and the other downward from the state power. After all, the order from the highest, the emporer or the state power, was localized by the regional bureaucracy.
For an understanding the bureaucratic realities in this period, we must deepen more concretely the bureaucratic responses to the same peroblem in a different space and time. Although the high regional official seemed to feel himself to represent a state authoities, the local ordinary people did not necessarily think so. In this view, we can fill this gap with the study of bureaucratic comportment, and the very understanding of the gap gives us a clue to discover the bureaucratic effectiveness of the Eighteenth Century Ch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