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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성경해석의 기초와 방법들
얼마 전 회원수만 해도 약 4만명을 육박하고 아주 큰 영향력을 나타내는 온라인의 한 기독교카페에 어느 분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주기도문(헬라어 원문해석)”이라는 글을 올리셨습니다. 다행히 현명하신 그 카페의 운영자께서 그 글을 삭제해 주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동일한 내용이 여기 저기에 올려져 있었고, 2013년도에 회원수 14만명이 넘는 모카페에도 그 동일한 내용이 이미 올려져 있었습니다.
-다 음-
헬라어 주기도문에 대한 한글성격에 해석과 원문 직역한 문장을 서로 먼저 비교해보기로 합시다.
이것을 통해 개역성경의 주기도문의 번역이 원문직역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헬라어원문 : 파테르 헤몬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헬라어폰트가 깨져 단어의 발음만 한글말로 옮김)
개역성경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원어 직역 : 하늘 곧 여호와로 둘러싸여 있으며 내 안에 여호와의 신 자체로 된 아버지여
원어 의역: 하늘 곧 여호와이시며 내 안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계신 아버지여
헬라어원문 : 하기야스테토 토 오노마 수
개역성경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원어 직역 : 개체로 이루어진 존재 속에서 두 이름으로(양면적인) 구별되어 주시어
원어 의역: 우리의 삶 속에 선과 악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헬라어원문 : 엘떼토 헤 바실레이아 수
개역성경 : 나라이 임하옵시고
원어 직역 : 한 개체에서 먼저 듣는 나라의 상태로 임하게 하시고(후에 전하여 이루어지게 하시며)
원어 의역 : 우리에게 창세전에 말씀하셨던 삶의 목적을
헬라어원문 : 게네떼토 토 텔레마 수
개역성경 :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원어 직역 : 완전히 내안에서 원하고자 하는 상태로 이루어지게 하시며
원어 의역: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알게 하시고
헬라어원문 : 호스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
개역성경 :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원어 직역 : 하늘이신 여호와 아버지의 뜻하는 바가 개체 속에서 같이 하나 되게 하소서
원어 의역: 아버지의 뜻이 지금 세상속의 우리에게 이루어지니이다
헬라어원문 : 톤 아르톤 헤몬 톤 에피우시온 도스 헤민 쎄메론
개역성경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원어 직역 : 내 안에서 중매자이시며 양식의 떡으로 오신 여호와로 하여금 하나되는 오늘을 이루게 하시며
원어 의역: 세상속의 모든 일을 양식이신 아버지께서 인도하시어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되게 만드시며
헬라어원문 : 카이 아페스 헤민 타 오페이레마타 헤몬 호 카이 헤메이스
아피에이멘 토이스 오페이레마타 헤몬
개역성경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원어 직역 : 창조자이신 그 분과 함께 선택하여 나온 우리의 여러 상태의 모습을 순서대로 이루게 하여 주시며
원어 의역 : 아버지 하나님과 약속한 삶의 체험들을 나날이 이루며
헬라어원문 : 카이 메 에이세넹게스 헤마스 에이스 페이라스몬
개역성경 : 시험에 들게 마옵시며
원어 직역 : 사단으로부터 오는 상태의 시험과 그리스도 오는 모든 시험을 끝까지 이루어지게 하시며
원어 의역: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한 선과 악의 모든 시험을 온전히 감당하게 하시며
헬라어원문 : 알라 흐루사이 헤마스 아포 투 포네루
개역성경 :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원어 직역 : 모든 상황의 극과 극에서 우리를 충분히 훈련하게 하소서
원어 의역: 그 시험 속에 선과 악의 체험을 충분하게 하시며
헬라어원문 : 호티 수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카이 헤 두나미스 카이 헤 독사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아멘
개역성경 :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
원어 직역 : 그리하여 아이온이라는 연결된 열방의 모든 세계 안에서 나라, 권세, 그리고 영광의 상태를 나의 체험의 삶속에서 온전히 이루게 하소서. 아멘이신 존재여!
원어 의역: 약속한 모든 생들에서 체험하는 삶의 목적(나라, 권세, 영광)을 완전히 이루게 하소서. 아멘이신 아버지여!
(정리해 봅니다.)
하늘 곧 여호와이시며 내 안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계신 아버지여
우리의 삶 속에 선과 악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우리에게 창세전에 말씀하셨던 삶의 목적을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알게 하시고
아버지의 뜻이 지금 세상속의 우리에게 이루어지니이다
세상속의 모든 일을 양식이신 아버지께서 인도하시어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되게 만드시며
아버지 하나님과 약속한 삶의 체험들을 나날이 이루며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한 선과 악의 모든 시험을 온전히 감당하게 하시며
그 시험 속에 선과 악의 체험을 충분하게 하시며
약속한 모든 생들에서 체험하는 삶의 목적(나라, 권세, 영광)을 완전히 이루게 하소서.
아멘이신 아버지여!
-이 상-
신학을 전공하고 헬라어를 공부한 목회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상의 글은 학문성과 객관성이 전혀 없는 너무도 황당무개한 글이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ㄱㄹㅎ ㅂㅂ”라는 닉네임을 가지신 분이 “이런 깊은 뜻이...! 감사합니다.”라는 리플을 달으셨고, “ㅂㅇ ㅇㅇㅅ”라는 닉네임을 가지신 분이 “내용과 의미도 많이 다른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개역개정성경은 헬라어를 바탕으로 번역된 것이 아닌가요? 궁금합니다.”라는 리플이 달린 것을 보았습니다. 혹여 헬라어를 모르시는 평신도분들이 혼란스러워할 것이 우려되어 답글 “Re:주기도문(헬라어 원문 해석)”으로, 이상과 같은 내용은 학문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전혀 사실 무근한 것이라 해야 할 것임을 밝힌 후, 주기도문의 “헬라어원문”과 그 원문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개역개정번역”과 “영어성경KJV”와 가능한 한 직역에 가까운 “이병천번역”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였습니다.
-아 래-
Pavter hJmw'n oJ ejn toi'" oujranoi'":
그 하늘들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
@Agiasqhvtw to; o[nomav sou:
당신의 그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ejlqevtw hJ basileiva sou:
당신의 그 나라가 오게 하옵소서.
genhqhvtw to; qevlhmav sou, wJ" ejn oujranw'/ kai; ejpi; gh'":
당신의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To;n a[rton hJmw'n to;n ejpiouvsion do;" hJmi'n shvmeron: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그 양식을 주옵소서.
kai; a[fe" hJmi'n ta; ojfeilhvmata hJmw'n, wJ" kai; hJmei'" ajfhvkamen toi'" ojfeilevtai" hJmw'n:
그리고 우리의 채무자들을 우리가 용서하는 것처럼 우리의 채무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kai; mh; eijsenevgkh/" hJma'" eij" peirasmovn,
그리고 우리를 시험으로 인도하지 마옵소서.
ajlla; rJu'sai hJma'" ajpo; tou' ponhrou'.
오직 우리를 그 악으로부터 구원하여주옵소서.
(o{ti sou' ejstin hJ basileiva kai; hJ duvnami" kai; hJ dovxa eij" tou;" aijw'na". ajmhvn.)
(왜냐하면 그 나라와 그 권세와 그 영광이 영원까지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이 상-
그리고 그 글을 올리신 분께 “제가 정말 궁금해서 여쭙는데요, 먼저 올리신 글의 내용은 "ㅂㅈㅎ ㅈ"님 스스로의 글이 아니라, 원어를 그런식으로 해석하시는 어떤 분의 말을 듣고 옮기신 듯하시던데,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요? 리플에서 그분을 언급하신 듯해서 여쭈어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저에게 쪽지를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진지하게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리플을 달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아...... 제가 헬라어의 아무런 지식이 없습니다..ㅠㅠ 헬라어의 뜻도 모르고 원문의 의미라 풀이되어 달리 보게 되었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그 분이 직접 쓴 것인지 받은 것인지는 저도 확인한 바가 없습니다, 샬롬^_^”이라는 답댓글이 달렸습니다.
이글의 원출처가 궁금하여 여기저기 검색을 하였습니다. 의외로 여러 곳에 이 동일한 내용이 올려 져 있었는데, 어느 곳에는 본인의 글처럼 무단 도용으로 올린 곳들도 있었고 또 어느 곳에는 이 글의 원출처인 “** **신학, 신학대학원”이라는 카페에서 스크랩으로 올린 곳도 있었습니다. 그곳을 통하여 이 글의 원출처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너무도 황당무개한 그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들이었습니다. 이런 황당무개한 글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등의 긍정적인 리플들이 달렸고, 회원수 14만명이 넘는 한 카페에 올려진 그 글은 48번이나 스크랩이 되어 있었습니다. 신학과 헬라어를 공부한 수많은 사역자들도 그 글을 보았을 텐데 어떻게 그런 황당한 글에 대하여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수수방관하거나 귀한 자료를 주셔서 고맙다는 반응의 사람들이 주류를 이룰 수 있는 것인지...
어찌되었거나 그 글의 원출처를 추적하다보니 그 글의 원출처가 “** **신학, 신학대학원”이라는 카페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고, 아마 독자들은 ㅇㅈ ㅂㅅ측 총회에서 운영하는 “** **신학, 신학대학원”이라는 카페에 올려진 내용인지라, '전문적인 신학자들이 올린 수준 있는 글이라는 착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매우 우려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원글에 다음과 같은 정중한 리플을 달았습니다.
-다 음-
“샬롬!!! 주님의 평강을 빕니다.
상기의 글을 보고 정말 궁금한 마음이 들어서 리플을 남깁니다.
상기 본문의 원어직역과 원어의역이 어떤 의미에서의 원어직역과 의역인지가 사뭇 궁금합니다.
원어직역이라 함은 원어의 자구적인 의미를 그대로 살리는 번역이고, 원어의역이라 함은 직역을 알기 쉽게 확대 번역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상기에 올려진 내용들은 저의 입장에서 볼 때, 영적인 해석이라든가 상징적인 해석이라고 해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수준인데 어찌 그런 내용을 원어직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정말 궁금하여 정중하게 질문 드리오니 답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상-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간단한 답리플이 달렸습니다.
-다 음-
“본 카페의 특별 공지사항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이 상-
휴~~~
그래서 그 카페의 특별 공지사항을 읽어보았더니 그 내용이 다음과 같았습니다.
오타들도 있으나 그 카페의 글을 있는 그대로 옮기기 위하여 오타도 그대로 인용함을 밝힙니다.
-다 음-
공지사항
본 카페의 컨텐츠(contents)속에 있는 자료들은 두 가지의 사용에 따라 그 효력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목적(目的)에 관계되지 않은 게시물은 카페의 이용 목적을 보존하고자 즉시 삭제됩니다.
첫째로는 기독교 교육 자료의 보존(保存)과 공유(公有)하는 데 있으며
둘째로는 본 카페 관리차원에서 자료를 쉽게 유출해 가는 ‘펌킨’들의 그 방법을 보호하고자 다음과 같이 공고합니다.
*스크랩(scrap)해 가시는 분께서는 다른 블로그(blog)나 카페(cafe)에 올릴지 않는 조건에서 본 카페에 있는 자료의 유출(流出)을 허락해 주고 있습니다.
댓글을 남기는 것은 아름다운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아닐까요?
지나친 자료 펌은 자제해 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자료는 개인소장(個人所長)으로 사용할 것에 그 목적이 되고 있습니다. 모든 게시자와 저작자(著作者)를 보호해주는 것은 당연한 처사입니다. 본 카페는 이런 점은 감안(勘案)하여 여러분께 부탁을 드립니다.
많은 자료가 유출하고 있는 데........ 예수님을 닮아가는 여러분께서 인사도 없이 오고간다면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어떻게 변호(辯護)할 것인가요? 필요하면 등록(燈錄)하고 아니면 탈퇴(脫退)하는 그 모습들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함께 공유(公有)하고 믿음으로 삶을 개척하는 여러분의 수고와 사랑에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입은 자로 이 카페가 오래 동안 공종(共存)해지길 기원합니다.
(중략)
본 카페의 참 목적은 본교 신학생들의 교육 자료들을 공급해주는 매개체(媒介體)으로서 목적을 두고 그렇게 이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 카페의 게시물은 사실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게시물을 신학공부에 위한 참고 자료로만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신학과 신앙에 대한 질문은 일체 받지 않습니다. 본 카페의 회원이 되시는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그리고 학생 여러분께서는 신앙의 다른 목적을 가감에 대하여 자제를 하시고 한국교회의 회복(回復)과 부흥(復興)을 위해 늘 기도하시고 문제는 작은 일에서 일어남을 깊이 생각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섬기시는 교회와 목회와 가정에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와 은총(恩寵)이 늘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름다운 발전에 진보할 수 있도록 이 목적에 동참(同參)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카페지기 : 푸른 소나무가 부탁드립니다
-이 상-
이 공지사항을 읽는데 참으로 참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개 이단 나부랭이도 아닌 우리나라의 굴지 정통교단의 총회에서 운영하는 “** **신학, 신학대학원”이라는 곳에서 이렇게 무책임한 글을 올릴 수 있는 것인지..., 그냥 일개인의 카페나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타인에게 오픈되는 순간 그것에 대한 질문이 있다면 정중하게 답변을 해야 하는 것이 기본예절일진대, 군소교단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굴지 정통교단의 총회가 운영하는 “** **신학, 신학대학원”이라는 공식 카페에 올려진 글에 대하여 어찌 그리도 무책임한 반응을 할 수 있는 것인지..., 공지사항으로 한다는 말이 “본 카페의 게시물은 사실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게시물을 신학공부에 위한 참고 자료로만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신학과 신앙에 대한 질문은 일체 받지 않습니다.본 카페의 회원이 되시는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그리고 학생 여러분께서는 신앙의 다른 목적을 가감에 대하여 자제를 하시고 한국교회의 회복(回復)과 부흥(復興)을 위해 늘 기도하시고 문제는 작은 일에서 일어남을 깊이 생각하여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말로 신중하게 검증을 요하는 정당한 질문까지도 어찌 그리 원천봉쇄를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래도 명색이 우리나라의 굴지 정통교단의 총회가 운영하는 "** **신학, 신학대학원"의 홈페이지용 카페인데 어떻게 사실과 다른 내용을 올려도 되는 것인지...,
요즈음 여기저기에 성경원어를 운운하면서, 성경본문의 진리와 상관없는, 황당무개한 주장들을 펼치시는 분들은 또 왜 그리 많은지... ㅠㅠ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들은 “객관적 문법구조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때때로 상징적인 언어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런 상징적인 언어들일지라도 “객관적 문법구조의 틀”안에 있는 상식적인 상징이지 “객관적 문법구조의 틀”을 벗어나는 추상적, 혹은 비상식적 상징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상징적인 언어일지라도 "객관적 문법구조의 틀 안에서 객관적, 상식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지는 일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인생은 가시밭길이다.”
이상의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인생은 힘들고 고달프다.”라는 의미임을 누구나가 공감하고 인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 말을 들어 “인생은 뽀쪽뾰족하고 단단한 가시와 같이 타인을 괴롭히며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라든가, “'인'생이란 '생'색을 냄으로써 '은'과 같이 '가'치 있는 '시'절을 만들 때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은 '길'조가 들 것이고 '이'상적인 '다'시다와 같은 맛있는 결과를 도출할 것이다.”와 같은 의미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아마 무지몽매한 사람이거나 정신병자로서의 취급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일개 코메디로도 봐 줄 수 없을 정도의 저급한 수준의 망언 취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그런식으로 황당하게 해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성경구절을 그와 같은 식으로 해석하는 분을 저는 보았습니다(http://cafe.daum.net/gvlove0691/K3nD/1039 참조).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말들은 누구나가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 문법구조의 틀 안에서 객관적, 상식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라어 주기도문을 이상과 같이 번역(?)하신 분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다 음-
“만일 주기도문에 나와 있는 단어들 하늘, 이름, 나라 등이 원어성경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국어사전식으로 뜻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찌하겠는가?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으며, 비유가 아니면 어떤 말씀도 안하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비유로서 그 속뜻을 감추시기 위해 세상의 것들 안에 하나님의 참뜻을 숨겨놓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이 단어들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 우리 나름대로의 해석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가 된다. 모든 것은 세상 것을 택하여 말씀 하셨으되 그 안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성경인 것이다.
여기서는 간단히 전체 주기도문의 뜻을 살펴보고 구절별로 설명하는 부분에서 그 비밀을 자세히 살펴보자.”
-이 상-
정말로 그런 것일까요?
상기의 말대로 주기도문에 나와 있는 단어들 하늘, 이름, 나라 등이 원어성경에서 국어사전식으로의 뜻이 아니고 비유로서의 의미로 그 속뜻을 감추시고 하나님의 참뜻을 숨겨놓은 것일까요?
만일 정말로 그렇다면 성경에 나와 있는 다른 모든 단어들도 그런 식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성경말씀에 때때로 비유의 언어들이 등장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비유도 누구나가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 문법구조의 틀” 안에 있는 상징적 언어로서의 비유이고 감추인 것들을 밝히 드러내기 위한 비유의 언어이지, 어떤 특별한 사람들만 깨달을 수 있는 비밀을 만들고 일반인들에게는 그것을 숨기기 위한 비밀의 언어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합니다.
(시 78:2)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마 13:34-35) 『[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35]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성경을 올바로 읽고 이해하여 올바르게 삶에 적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올바른 성경해석과 적용의 기초는 문맥과 문장, 단락이 될 것입니다. 문맥과 문장, 단락과 상관없이 아무 관계도 없는 이런 저런 의미들을 한 철저나 한 단어 등에 부여해서 엉뚱한 상징적인 의미를 마음대로 막 갖다 붙여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가능한 한 성경의 모든 구절은 자구에 담겨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해석하고 적용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문자적 의미가 충분히 전달된다면 더 깊은 무슨 뜻이 있지 않을까를 찾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구에 담긴 문자적 의미를 떠나서 뭔가 영적으로 더 깊은 뜻이 있을까 찾다보면 성경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 구절이 분명히 비유가 아니라면 늘 쉽고 평범한 문자적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건전한 성경해석의 기초라 할 것입니다.
모든 성경의 해석과 적용은 항상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특별히, 본문이 비유적인 표현 등과 같이, 문자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문자적인 해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비유적인 표현의 말씀일지라도 그 비유의 해석은 반드시 “객관적 문법구조의 틀” 안에 있는 객관적, 상식적, 문자적 해석이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인간언어의 제약을 받으며, 문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기록된 것입니다. 문자적인 의미란 자구적인 것은 자구적인 의미로, 상징적인 것은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자구적인 의미를 떠나 영적인 것을 의미하고 상징적인 것을 의미하는 성경구절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는 갈4:21-31, 마13:1-23, 단7:1-28 등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경본문 자체에서 그런 것들이 그 어떤 영적인 의미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비유라고 곧 바로 해석해주거나 그러한 의미를 규정해 주고 있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게 됩니다. 그와 같이 성경의 그 본문 자체가 영적인, 상징적인, 비유적인 의미로 규정해 주는 특별한 경우들을 제외하고, 성경말씀을 너무 영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보려는 실수와 만용을 허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 66권은 각권의 저자와 주제들이 각각 다르기에, 동일한 단어이지만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반대로 서로 다른 단어지만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성경저자들 각각의 성향과 기록목적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한 성경의 한 단어가 갖는 의미를 66권 전체로 무리하게 확대시키거나 획일화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예로, 마태가 말하는 “천국”(마4:17)은 마가와 마태 이외의 성경 기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막1:15,눅4:43,요3:3,행28:23 등)와 그 표현의 방식이 서로 다르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동일한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표현은 정통 유태인이었던 사도바울이 역시 유태인이었던 디모데에게 딱 한 번 사용한 것(딤후4:18) 이외에, 유태인들을 향한 복음서인 마태복음에서만 사용된 독특한 표현법인데, 그것의 구체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임을 마태자신이 밝히고 있고(마19:23-24), 사도바울도 유태인이었던 디모데에게 보내는 서신 디모데후서에서만 “천국”이라는 표현을 단 한 번 사용하였고 그 이외의 모든 서신들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http://cafe.daum.net/gvlove0691/K3nD/935 참조).
이상과 같이 표현의 방식이 서로 다르지만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있는 반면에 표현의 방식과 단어가 똑같지만 의미하는 바는 전혀 다른 것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동일한 단어인 “육체(헬. 사르크스, sarks)”라는 말이 갈라디아서3:3과 요한일서4:2에 사용되었지만, 갈라디아서3:3에서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의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고, 요한일서4:2에서는 인간의 영과 구분되는 “인간의 순수한 몸”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상과 같은 차이점을 정확하게 찾아내고 따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자체의 문맥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단 ㅅㅊㅈ에서 말하는 것처럼, 창세기 2:7에 “‘땅’의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했기에 성경에서 말하는 땅은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고, 그렇기에 계16:1에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을 ‘땅’에 쏟는다.”는 의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식으로 성경 66권이 각각 가지고 있는 그 자체의 문맥들을 무시한 상태에서, 어떤 단어나 어구를 성경전체에 획일적으로, 적용하거나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두에 소개한 바와 같이 “주기도문(헬라어 원문해석)”이라는 글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많은 경우 수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그러한 성경해석의 기본적인 원리를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안타까운 경우들이 있음을 봅니다.
올바른 성경의 해석과 적용을 원한다면
첫째, 본문이 속한 책의 기록목적에 대한 개론을 먼저 공부해야합니다.
예1)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1:23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
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의 승천기사를 생략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2)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16:15-18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회복될 것이다.
16:19-20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표적으로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예3) 눅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의사의 눈으로)...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예4)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둘째, 본문과 연관된 역사적 배경을 조사해야합니다.
(갈 4:13-15)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갈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수 23:13)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 민33:55, 삿2:3
사도바울이 말한 육체에 가시는
a. 안질이나 간질과 같은 육체의 질병이었다.
b. 그의 사도직을 공격하였던 사탄의 사자, 즉 사탄의 일꾼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상의 두 가지 견해 중 어느 것이 합당한 해석일까요?
저는 후자인 b의 해석이 맞다고 봅니다.
셋째, 본문이 위치한 문맥을 살펴야합니다.
예1) 마12:30과 막9:40은 상호모순일까요?
(마 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막 9: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서로 모순처럼 보이는 이상의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각각의 문맥과 함께 볼 때, 마12:30은 (사탄과의 영적전투)에 있어서는 그 어떤 것도 절대로 포용할 수 없다는 것을, 막9:40은 (섬김의 도)에 있어서 기독교 공동체는 서로 포용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문맥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마12:30은 마12:22-30의 전체문맥에서 보자면, (사탄과의 영적전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탄과의 영적전투에 있어서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님을 반대하는 자요, 주님과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입니다.
막9:40은 막9:33-40의 전체문맥에서 보자면, 섬겨야 한다는 예수님의 제자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코 앞의 문맥인 막12:38-39만 보자면 이 말씀도 역시 영적전투에 관한 말씀처럼 보이지만, 그 앞의 문맥인 막12:33-37을 보시면,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는 제자들을 보신 예수님께서 섬기는 제자도를 가르치셨고 그 사건에 계속 이어지는 말씀임을 알게 됩니다. 섬김의 도라는 문맥에서 “우리는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에 있어 서로 포용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탄과의 영적전투에 있어서는 그 어떤 것도 절대로 포용할 수 없지만,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는 서로 포용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문맥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예2) 눅13:18-21 하나님의 나라 겨자씨와 누룩비유의 핵심은
(눅 13:18-21) 『[18]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21]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a. 적은 말씀에 의한 천국의 강력한 확장이라는 비전선포인가,
b. 적은 미혹에 의한 사탄의 심각한 장악결과라는 경고의 메시지인가?
전문맥인 눅13:10-17,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아브라함의 딸과 연관지어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라는 전체주제가 시작되는 눅8:5 “공중의 새들”이 눅8:12에서 “마귀”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직접 연관지어보십시오.
저는 하나님의 나라 겨자씨와 누룩비유의 올바른 해석은 a. 적은 말씀에 의한 천국의 강력한 확장이라는 비전선포가 아니라, b. 적은 미혹에 의한 사탄의 심각한 장악결과라는 경고의 메시지라고 봅니다. 본문의 전후문맥이 그점을 확증해주기 때문입니다.
넷째, 본문의 구조를 분석해야합니다.
1. 명사의 수를 살핍니다.
(고전 12:31, 개정)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2:31, 우리말) 『그러나 더 큰 은사들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고전 12:31, 킹흠정) 『오직 너희는 가장 좋은 은사들을 간절히 사모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또한 너희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리라.』
(인용된 고전12:31 “은사”의 헬라원어. “karismata”는 복수이고, “좋은 ‘길’”의 헬라원어 “huiperbole-n ‘hodon’”은 단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말성경과 킹흠정의 번역이 맞습니다.)
고전12:31은 고전12장의 은사에 대한 말씀에서 13장의 사랑에 관한 말씀으로 넘어가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사랑의 은사가 가장 큰 은사라는 설명을 위한 도입부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은사들은 복수이고 좋은 길은 단수인 것만 보아도 그것이 잘못된 해석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은사들은 사랑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고, 사랑을 추구하며 사모해야 할 더욱 큰 은사들은 “예언과 더불어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방역통역”(고전14:1,26)들이라고 하는 것이고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14:40)는 것입니다.
2. 접속사를 살핍니다.
(눅 1:68, 개정)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눅 1:68, 킹흠정)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 까닭은(헬. gar, 영. for)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을 돌아보사 구속(救贖)하시고』
3. 동사의 태, 시제를 문맥과 함께 살핍니다.
(마 11:12, 개정)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헬. Biazetai)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헬. harpazo-)』
헬라어 “Biazetai”는 중간수동디포넌트동사이기에 “중간태로 보자면, 강력하게 밀고 들어가다, 침노하다”를 의미하고, “harpazo-”는 “훔치다, 잡아채다, 데려가다”라는 기본뜻을 가지고 있지만, 히브리어의 “가잘(데려가다, 강탈하다)”과 “타라프(찢다, 찢기다, 갈기 갈기 찢다)”의 번역어로 쓰이는 단어이기에, “방해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상을 마11:12의 전후 문맥에 적용해 보자면, 『침례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강력하게 전진해가고 있고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그것을 방해하고 있다.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NIV)』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독설이 아니고 George Ladd, G.R. Beasley-Murray박사님과 같은 여러 성서신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견해임을 말씀드립니다.
다섯째, 본문에 나오는 주요단어의 의미를 파악해야합니다.
1. (엡 5:16, 개정) 『세월을 아끼라(헬. eksagorazo-) 때가 악하니라』
(엡 5:16, 한글킹) 『시간을 사서 얻으라. 이는 그 날들이 악하기 때문이니라.』
(엡 5:16, KJV) 『Redeeming the time, because the days are evil.』
“아끼라”는 이 말의 헬라원어 “eksagorazo-”는 “‘구속하다. 속량하다’. 라는 말로 ‘노예들을 속전을 주고 구해내는 것’에 적용 가능한 말”이었습니다. 갈3:13 “속량하셨으니”, 갈4:5 “속량하시고”가 이 단어입니다. KJV처럼 시간을 구속하라, 혹은 구원하라는 말로 설명한다면 한 층 더 그 의미가 잘 전달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갈 3:3, 개정)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헬. sarks)로 마치겠느냐?(헬. epiteleo-)』
(갈 3:3, 현대인)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여러분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여러분 자신의 노력으로 완전해지려고 하십니까?』
바울은 “몸”을 의미하는 “so-ma”(살후5:23)와 다른 의미로 “육체”를 의미하는 “sarks”를 사용했는데 이는 영혼과 구별되는 몸이 아닌 “인간의 의지”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마친다(헬. epiteleo-)”는 “성취하다. 실행하다. (제사장이 제사를) 집전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여섯째, 지금까지 연구한 것을 종합하여 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찾아야합니다.
물론 항상 일정하게 이런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종합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때로는 이 여섯 가지 단계 가운데 어떤 특정한 단계에 더 집중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원칙적으로 본문을 해석할 때는 이런 단계를 두루 거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Tip 1.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으로 최종점검을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의 기준에 부합하는 교훈만이 바른 교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른 바른 말이 아닌, 다른 교훈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딤전 6:3-5)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요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Tip 2. 신약과 구약은 연속성과 통일성을 지닌 한 하나님의 연결된 진리임을 확증하십시오.
구약과 신약은 전체적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한 말씀이며, 영원무궁토록 변함없는 하나님나라의 원리와 본질에 관한 진리의 말씀으로, 구별된 각각의 말씀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영원무궁토록 변함이 없으신 진리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의 말씀도 그 내용과 기준에 있어서 영원무궁토록 변함이 없는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영원무궁토록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과 신약은 점진적인 계시로 이루어져 있기에 부분적으로 보면 다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전체적인 조합으로 볼 때 완벽한 하나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은 그 본질과 원리에 있어서 영원무궁토록 동일한 것이며, 전체적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계시이지 시대에 따라 그 기준과 내용 혹은 요구조건이 바꾸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말씀들은 히브리인들을 포함한 모든 시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지, 구약은 히브리인들에게만 주어진 별개의 말씀이 아닙니다.
구약의 절기들은 단지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절기들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포함한 온 인류의 주가 되시는 여호와하나님의 절기이기에 구약과 신약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효하게 적용되는 것들입니다. 물론 신약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구약절기들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절기들이 완성되어졌기에, 구약과 같은 절기의 외적인 형식들에 얽매이지는 않지만,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 속에서 그 모든 절기들의 실제들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골2:16-17). 절기들의 실제가 완성되었기에 그 외적절차들은 폐지되었지만 절기들의 실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전히 동일하게 유효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은 율법을 지킴으로 행위의 구원을 받았지만, 신약의 교회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은혜의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약도 신약도 모두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롬4:1-3).
구약은 흠 없는 짐승의 피를 힘입고(들고) 하나님께로 나아갔지만, 신약의 교회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으며 다만 믿음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교회도 흠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고(들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히10:19).
이상과 같은 전제와 원리는 “십일조와 헌금원리”에도 여전히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완성하러 오신 분이시지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마5:17). 구약의 십일조는 신정국가체제의 이스라엘에게 적용되었던 율법의 강제규정이었지만, 신약의 교회에서는 더 이상 강제규정이 아니며 은혜 안에서 자율적으로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마23:23). 구약에도 십일조와 헌금은 자율성과 강제성이 함께 있었으며 신약에도 그 부분은 여전히 동일한 것입니다(고전9:13-14).
II. 성경의 기록목적은?
(딤후 3:15-17)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의 기록목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려 함입니다.
※ 구원(롬1:16) = 영생(요3:16) = 천국(마19:23) = 하나님의 나라(마12:28,19:24,막1:15) = 치유(눅8:48) = 하나님의 형상 회복(창1:27-28) = 자유(요8:36,갈5:1) = 풍성한 삶(요10:10)
III. 복음의 이해와 적용
창조주이신 여호와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후 홍해에서 침례를 베푸시고(고전10:2) 법도와 율례를 정하신 후, 그들에게 첫 번째로 계시하신 자신의 이름은 치료하는 여호와였습니다. 그들을 마라의 쓴물로 인도하시고 그 물을 치료하신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출 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이 사건 이후 가나안을 향하는 그들의 광야여정 속에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의 물,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주신 후 십계명과 여러 율례들을 주신 후 첫 번째로 주신 언약이 다음의 말씀이었습니다.
(출 23:25-26) 『[25]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26]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이상과 같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그리고 선포하신 말씀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포되고 확증되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가리켜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롬 1:1-18) 『[1]...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16] ...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고전 15:1-4)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구속의 사건과 그 결과들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두 개의 구약사건과 그 결과들을 소개해 봅니다.
1. 유월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고전 5:7) 『...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시 105:36-38) 『[36] 또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력의 시작인 그 땅의 모든 장자를 치셨도다 [37] 마침내 그들을 인도하여 은 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의 지파 중에 비틀거리는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38] 그들이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그들이 그들을 두려워함이로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1:27-30)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2. 광야에 들려진 모세의 놋뱀
(요 3:14-16)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민 21:8-9)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IV.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음과 복음의 실제
(눅 4:18-30)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눅 6:17-19) 『[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V.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확증된 복음의 실제
(행 5:12-16) 『[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16]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 복음이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것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롬1:16).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란 영과 혼과 육과 현세와 내세의 총체적, 전인적 회복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바로 그런 사역이셨습니다. 죽음 이후에 낙원에 들어간 거지 나사로처럼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주님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총체적인 구속 안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온 세상의 상속자답게 살아갈 것을 기대하시는 분이십니다(롬4:13).
문맥으로 본 사탄의 겨자씨와 누룩
☞ http://cafe.daum.net/gvlove0691/K3nD/1311
올바른 사역과 성경해석의 검증기준은?
첫댓글 성경을 정확하게 보려는 시도가 가히 존경이 갑니다. 그리고 오류를 시정해보려는 시도도 가히 존경이 갑니다. 그런데도 모 카페의 글쓴이가 어떤 글에 대하여 문제가 되거나 혼란을 일으켰을 때 사실과 다를 수 있다라고 말하지 않았는냐며 책임을 지지 않겠다면 그것이야말로 주님 앞에 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 봅니다. 앞으로 우리 기독교가 좀더 바르게 주님 앞에 설려면 정확한 글을 올려야 하고 혹이라도 혹자가 질문을 하면 성실하게 답변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진리가 왜곡되고 있는 이런 시대에 이런 노력은 절실히 필요하다고 봅니다.
귀하신 격려의 말씀에 감사를 드립니다.
힘과 격려가 됩니다.
다시 한 번 더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그 학교를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데 이렇게 심각한지는 몰랐습니다 이제 점점 변질되 가는 우리네 교희의 모습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감사합니다 성경을 다시 바라보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