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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괜찮다 다 괜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려온 한 가련한 여인, 죽느냐 사느냐 절체절명의 순간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반응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과연 뭘 쓰셨을까요?
많은 성경학자들과 교부들이 여기에 대해서 연구하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리셨습니다. 대체로 둘러서 있는 사람들의 이름, 악한 고발자들의 죄목들... 여러 가지가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귀신도 모른다는 것, 하느님 아버지도 모른다는 것, 오직 예수님만 아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적대자들에게 맞서지 않으십니다. 방어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가만히 계십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바닥에 뭔가를 쓰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방법은 김 빼기 작전이었습니다. 뭔가 대판 싸워야 되는데, 자신들이 짠 작전이 팍팍 진척될 것인데, 예수님은 완전히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시며 완전히 그들을 무시해버립니다.
갑자기 김이 빠질 데로 다 빠져버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 순간 엄청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고, 동시에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위기관리능력이 참으로 뛰어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맥 빠지고 허탈해진 적대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결정타 한방을 더 날리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 말씀 끝에 사람들은 하나하나 떠나가고, 결국 텅 빈 성전 마당에는 예수님과 그 여자 단둘만 남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그 순간에 대해서 아주 아름다운 주석 하나를 남기셨습니다.
“모두가 다 빠져나가고 오직 둘만 남았다. 우리를 대표하는‘비참한 여인’과 ‘하느님의 자비’ 둘만 남았다.”
하느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이 어처구니없는 사랑, 상상을 초월하는 사랑, 기막힌 사랑으로 인해 그 여인은 지금 눈보다 더 깨끗하게 변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여자의 상태를 가리켜 교회 전승은 ‘순결한 창녀’라고 했습니다. 순결한 창녀, 이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향해, 또 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언인가 쓰셨다고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는데 사실 땅바닥은 여인의 가슴이었습니다. 그 땅바닥은 죄와 타락과 방황으로 얼룩진 여인의 마음이자 우리 각자의 마음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땅바닥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들 마음 하나하나에 당신 손가락이 아프도록 꾹꾹 눌러 또 다른 한 말씀을 새겨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들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딸들아, 너희들이 아무리 죄가 많다 할지라도, 너희들이 아무리 부족해도, 괜찮다 다 괜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요한 8,1-11
자녀의 죄는 어머니가 낳을 때 그 흘린 피로 이미 다 씻겼다
영화 ‘더 스토닝’은 이란에서 아직도 은밀하게 벌어지고 있는 ‘투석형(投石刑)’을 소재로 한 실화입니다.
두 손목과 양팔이 뒤로 묶인 채, 도망가거나 피할 수조차 없도록 허리까지 땅에 파묻힌 상태로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돌을 맞으며 죽어가야 한다면?
그것도 자신이 직접 낳은 아들들과 남편, 아버지와 친척 남자들, 평생 한 가족처럼 얼굴을 보고 지낸 마을 이웃들이 던지는 돌이라면?
안구의 핏줄이 터지다 못해 돌출되거나 머리뼈가 깨졌는데도 무더기로 날아오는 돌을 맞으면서 자신의 무죄와 억울함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아이 넷을 키우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소라야의 결혼생활은 남편의 폭력과 폭언 탓에 몹시
불행합니다.
자식들을 생각하며 힘겨운 결혼생활을 버티던 그녀는 14살 소녀와 결혼하기 위해 위자료를 주지 않고 이혼하기를 원하는 남편 알리가 꾸민 잔혹한 함정에 빠져듭니다.
간음한 여인으로 몰린 것입니다.
그릇된 탐욕과 거짓은 들개 같은 사내들의 횡포로 이어지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가담한 죄악은 집단침묵으로 뒤덮여 묻힐 뻔하지만, 나중에 책을 쓴 자흐라의 용기 있는 목소리에 힘입어 마침내 소라야의 이야기는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잡힌 여자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이 용서하는 방식은 장차 예수님께서 어떻게 십자가로 우리 죄를 용서하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돌을 들고 있는 바리사이들의 죄를 땅에 쓰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당신 손가락은 땅에 박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죄를 흙에 쓴 글자처럼 사라지게 하시기 위해 우리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돌아가시고 묻히셨습니다.
우리 모든 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땅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하신 순간은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라고 물으시고 여인에게서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은 직후였습니다.
나를 단죄하는 이가 없다면 나도 굳이 다른 이를 단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심판관은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탓을 돌렸듯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이유는 자기 안에 자기를 단죄한 존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부끄러웠고 이미 두려웠습니다. 자아가 바로 그들을 단죄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를 판단하는 이유는 그 죄책감을 가리기 위해 방어기제 중 하나를 발동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위 영화에서 알리는 위자료를 주기 싫은 것과 14살 소녀와 결혼하고 싶은 죄를 용서받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것이 용서받았다면 소라야에게 돌을 던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알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믿지 않았기에 악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2018년 연말에 어머니를 살해한 30대 남성이 대법원이 징역 20년형을 확정했습니다.
38살 A 씨는 술에 취해 TV를 보다가 어머니로부터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A 씨는 평소에도 잦은 음주 등으로 꾸중을 들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날 꾸중을 듣는 과정에서 뺨을 맞은 A 씨가 급기야 어머니에게 의자와 흉기를 휘둘렀고, 의식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내버려 둔 채 달아나기까지 했습니다.
안타까운 건 아들의 흉기에 찔린 어머니가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옷을 갈아입고 도망가라.”
하고 말한 건데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들을 걱정했던 겁니다.
전에 사망 보험금 노리고 지인을 시켜 차 사고 내 어머니를 죽이려 한 아들의 선처를 호소한 노모도 생각이 납니다.
어머니는 내가 칼을 휘둘러도 죽어가면서 그 죄까지 가지고 가십니다.
자신이 낳은 존재이기에 그 책임을 자신이 껴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죄를 짓고 나에게 유일하게 심판하셔야 할 분이 나를 죄 없다고 하시는데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벌도 받고 죄책감을 느끼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더 큰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어머니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당신 책임으로 안고 대신 돌아가십니다.
부모는 낳을 때부터 그 피로 자녀의 모든 잘못을 용서한 분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그 죄책감 때문에 이미 용서한 분을 찌르게 됩니다.
어머니가 피를 흘리며 자녀를 낳을 때 자녀가 미래에 지을 죄까지 다 피로 보속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에덴동산에서 뱀을 놓아주실 때 이미 죄지을 것을 다 용서해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죄라는 것이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어 끝까지 하느님을 원망하고 칼을 들이댄다면 더는 구원을 희망할 수 없게 됩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8,1-11: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져라.
유대인들이 주님을 시험하려고,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십니까?”(4-5절) 한다. 이 말에는 교묘하게 함정을 만들어 예수님을 고소하여 없애려고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만일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셨으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한결같이 가르치던 사랑을 잊었다고 비웃었을 것이고, 돌을 던지지 말라고 하셨으면, 예수님께 노여움을 드러내며, 율법과 반대되는 사악한 행동을 하는 자라고 당당하게 단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6절) 예수님은 대답은 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혀 땅에다 무엇인가를 쓰신다. 이 행동은 지금 여자를 고발하는 자들과 죽을 운명으로 태어난 모든 이의 죄를 땅에 쓰신 것이다. 죄를 용서하러 오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7절) 예수님은 그들의 함정을 아시고 그 함정에 빠질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양심은 있었다. 그들은 혼란에 빠져 서로 마주 보기도 불편한 듯,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모두 떠나갔다. 예수님께서 다시 땅에 무엇을 쓰신 것은 그들이 도망칠 시간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자비의 눈길을 보내신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11절) 하신다.
우리는 과연 이웃의 잘못을 어떠한 눈으로 보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성급히 판단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라는 말씀과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5)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진정한 용서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셨다. 하느님 앞에 설 때까지 우리는 완성되지 못한 존재이다. 항구하게 우리 자신을 정화해 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4)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대학생 아들이 있는데 게임만 하면서 인생을 낭비합니다. 성인이니까 그냥 놔둬야 할까요? 아니면 게임을 못하게 일일이 따라다니며 잔소리해야 할까요?”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듭니다. 요즘에 취업하기 힘들다고 하니 그냥 꾹 참고 다녀야 할까요? 아니면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해야 할까요?”
이런 식의 흑백 논리를 말하면서 답을 이야기해 달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이것 아니면, 저것’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다양한 길이 있음에도 선택의 폭을 스스로 좁힐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이렇게 단순화하면 그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잠깐이나마 편안한 심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다시 더 복잡한 마음이 되고 맙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세상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답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답이 많은 세상에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근시안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준이 정확해야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긴다고 주장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 하나의 기준을 정확하게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율법이 먼저가 아니라, 사랑이 먼저였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벗어나는 다양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앞으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돌을 던져 죽이라고 했다면서, 예수님의 생각은 어떤지 묻습니다. 살려주라고 하면 율법을 어긴다고 트집을 잡을 것이고, 죽이라고 하면 이제까지 가르쳤던 사랑은 어디에 있냐면서 또 다른 트집을 잡았을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 같은 상황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떠나갑니다.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억지를 스스로 깨달았을 것입니다. 간음했다고 하는데, 혼자 그 자리에 온다는 것 자체가 큰 억지이요. 여자 혼자서 간음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그들은 사랑 없는 닫힌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을 먼저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야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으며, 이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사랑하는 법과 용서하는 법을 배우며 삶을 완성해 간다(케리 이건).
5)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요한 8,8)
누구든
불편한 진실과 마주치면
슬금슬금 피하게 되지만
우리도 주님처럼
불편한 진실 앞에서
몸을 숙이고
마음을 적어보는
침묵의 시간을 가져보아야 하리.
말씀을
마음의 땅에 한자 한자 새겨 넣으며
내면의 두려움과 마주하는
용기를 내어보아야 하리.
6)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원리원칙과 율법에 매여
마리아를 심판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고정관념과 선입과 편견의 3종 종합 선물 세트로
자신들을 치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정당하고 옳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무시하지 않으시고
모르는 체하지 않으시며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우리들이 지닌 상처와 일그러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가장 비천한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자리를 마련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통념에 사로잡히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법이 아니라
고통과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그들과 함께 삶의 중심에 서 계십니다.
오늘 하루 나는 어떤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지
곰곰이 나를 돌아보고
제 손에 쥐고 있던 돌을 내려놓고
주님의 따뜻한 시선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7)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 7)
저마다의
삶의 자리를
지켜내며
활짝 꽃을
피우는 봄꽃이
우리 곁에서
피고 있다.
삶도 사랑도
절제가 필요한
십자가의
관계이다.
십자가의
사랑은 유혹을
이겨내고
올바로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끈다.
사람은
죄를 묻고
하느님께서는
죄와 허물을
깨끗이
지워주신다.
참된 사랑은
죄와 허물까지
지워주는
것이다.
배신과
심판사이에
우리가 있다.
먼저
예수님께서
단죄의 돌을
우리 앞에
내려놓으신다.
단죄를 멈추면
사랑이 고픈
사람들이 보인다.
끝이 아름다운
사랑이 참된
사랑이다.
상처없는
사랑은 없다.
모든 사랑은
상처를 통해
하느님을
향한다.
소유와 집착
간음과 불륜은
스스로
돌무더기에
갇히는 꼴이
된다.
단죄의 돌을
던지는 사람은
다름아닌
우리자신이다.
참된 사랑은
욕구의 해소가
아닌 인격의
참된 존중이다.
하느님께서는
의심하고
질투하는
추한 욕정의
관계가 아닌
맑고 밝은
아름다운 관계를
원하신다.
죄(罪)를
치유하는 것은
아름다운
관계이다.
이제 아름답고
맑은 관계로
돌아서는
회심의 사랑이
필요한 때이다.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는 성장이
필요한 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건강하게
다시 고쳐주신다.
건강한 관계의
중심이신
예수님에게서
참된 사랑을
다시 배운다.
소중한 딸이며
소중한 아들이다.
봄꽃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겨울을 이겨내고
추위를 건너왔기
때문이다.
약한 부분이
유혹이 아닌
기도와 응원
지혜와 봉헌이길
진심으로
기도드린다.
아름다운
사람의 길을
봄꽃과 십자가가
다시 가르쳐준다.
삶의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이
가장 향기롭고
가장 빛나는
꽃이다.
그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자.
지워진 길에서
길이 다시
시작된다.
8)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8,7)
'주제에!'
오늘 복음(요한8,1-7)은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요한8,4)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십니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8,7)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다 떠나갑니다. 마침내는 예수님과 그 여자만 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물으십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요한8,10) 그 여자가 대답합니다.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8,11)
예수님께서 땅 바닥에 무엇이라 쓰셨을까?
왜 나이 많은 자들부터 떠나갔을까?
그들의 죄를 땅바닥에 쓰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그들의 죄 때문에 하나씩 하나씩 떠나가지 않았을까?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에 대한 율법 규정은 당연히 돌을 던져 죽이는 규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어기지 않으시면서 그들에게 명쾌한 답변을 내 놓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8,7)
누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저는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단죄할 수 없습니다.
복음 말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11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3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4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6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7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8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