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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약의 독백
전 호준
뱃가죽이 등가죽에 착 달라붙어 허기가 진다.
원래 흰머리에 손때가 끼어 꾀죄죄하다. 어딜 봐도 볼품이 없다.
수술대 위에 누워 숨쉬기조차 힘들다. 창끝 같은 가위 들고 누군가 다가온다. 순간, 이제 끝장이구나. 모든 걸 체념했다.
나도 처음 태어 날 땐 이렇지 않았다. 매끈한 피부에 알록달록 색동옷을 입고 통통하게 살이 올라 볼만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놈의 집구석에 팔려온 이후 욕실 한구석에 처박혀 본의 아니게 다이어트가 아닌 억지 춘향이로 내 몸이 서서히 여위어 갔다. 내 몸을 유지하는 천금같이 소중한 뱃속의 진액을 도둑맞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에 수도 없이 이놈 집의 괴물들은 내 배를 꾹꾹 눌러 뱃속에 가득 찬 내 생명의 진액을 나의 입을 통해 강제로 토해내게 한다.
나의 머리를 비틀어 입을 연 뒤, 늙은이는 내 엉덩이를 누르고, 어린놈은 내 목덜미를 누른다. 최근 뱃살이 붙어 부쩍 허리가 굵어진 다 큰 딸년은 내 허리를 무지막지 누른다. 무슨 놈의 굵어진 허리가 나 때문인가?
어디를 누르든 나의 고통은 똑같이 참을 수 없다. 얼른 우윳빛 젤리 같고 레몬 향이 은은한 내 생명의 체액을 한 덩이 토해 낸다. 자루가 긴 솔 끝에 내 입을 쓱 문지르고 비틀어둔 머리를 다시 내 입에 처박아버린다.
이런 고통쯤 참을 수 있지만,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수시로 변형되는 나의 몸매다. 개미허리가 되었다가. 강낭콩이 되었다가 못생긴 만두처럼 울퉁불퉁해진 몸매 때문에 우울하다. 그래도 타고난 피부와 몸의 유연성 때문에 바람 빠진 막대풍선 신세를 면하고 이제까지 잘 버티어 왔다.
내가 토한 진액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아유! 비린내, 시큼한 김치 냄새, 진한 된장 냄새 속에 아우성으로 요동치다가 한 움큼 거품으로 변해 한 모금 물에 섞여 바닥에 버려진다.
“아유! 이놈의 치약 벌써 바닥이 났네!” 배가 남산만 한 뚱보 아지매가 들고 온 가위로 말라붙은 내 배를 가른다. 숨 쉴 틈조차 없이 말라붙어버린 배를 갈라 어찌하겠다고, 가른 배를 뒤집어 가죽 안쪽에 남은 마지막 진액까지 말끔히 닦아 내고 욕실 한구석 구린내 나는 휴지통에 버려지는 신세가 됐다.
내가 처음 세상 구경할 때만 해도 나는 제법 귀한 몸이었다. 나의 진액을 귀히 여겨 내 몸에 입을 내고도 입을 봉해 놓고 함부로 쓰지 못하게 했다.
나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취향에 따라 봉해진 입에 송곳이나 칼끝으로 엿 장수 맘대로 내 입을 찢어 사용했다. 어떤 자린고비는 내 입을 바늘구멍같이, 어떤 헤픈 놈은 하마 입같이 내 입을 엉망진창 구구 각색으로 만들었다.
잘못은 지들이 해놓고 답답하다느니, 너무 많이 나오느니, 나의 배를 못살게 눌러댔다. 나의 입은 변형과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사실 왕짜증이다.
몸이 귀하던 시절 몸값 때문인지, 바늘구멍 같은 나의 입 때문인지, 나을 탄생 시킨 사람들이 굶어 죽을 지경이라 난리가 났다. 그때 어떤 약삭빠른 인간이 아예 하마 입같이 나의 입을 개방해 버렸다.
나의 천금 같은 체액이 빨리 소진돼 생명이 단축되는 안타까움보다 짜증내는 인간이 줄어들어 속은 시원했다. 그런데 얄팍한 인간들의 상술 덕분에 너무 일찍 수술대에 올라 배가 갈리는 운명을 맞을 줄이야! 누구를 원망하라, 치약으로 태어난 명운인 것을, 그래도 인류의 건강을 위해 내 몫의 할 일을 다하고 가는 자부심에 여한은 없다. 오늘도 그들의 나에 대한 사랑은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양치질을 한다. 칫솔질에 없어서는 안 되는 치약, 인류는 언제부터 치약을 사용했을까? 궁금증에 자료를 검색해 봤다.
치약의 시작은 기원전 5000년경 고대 이집트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한다.
몰약 이라는 약제와 화산성부석, 소 발굽을 태운 재, 달걀껍질 귤껍질 등을 연마재와 혼합해 만든 가루로 손가락에 묻혀 양치질을 했다고 한다.
1세기경 로마에서는 소변으로 양치질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소변으로 양치질을 하면 미백 효과가 있다고 한다. 소변에 들어있는 암모니아 성분이 산을 중화시켜 생기는 미백 효과인지 알 수는 없다. 또 소변에 들어 있는 나트륨 성분이 각종 염증을 완화하고 세균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소변 중 포르투갈 인들의 소변이 특히 미백 효과가 뛰어나 로마 상류층 여인들이 포르투갈 인들의 소변을 치약으로 비싸게 구입 사용했다고 한다. 낭설인지 정설인지 나로선 알 길이 없지만, 아무튼 신기한 내용이다.
초창기 인류들은 나름의 치약으로 현대 같은 칫솔이 없었기에 손가락으로 이를 닦았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손가락에 소금을 묻혀 이를 닦던 시절이 그리 오래지 않았다. 치약이 귀하던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소금으로 이를 닦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 사용되는 치약은 18세기경 의학과 화학이 발달하면서 처음 가루로 만든 치약을 사용했다. 하지만 쉽게 눅눅해지고 변질되는 문제점이 발생하여 이을 보완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거쳐 지금의 젤 형태의 치약이 탄생했다.
지금은 기능성 치약이니 뭐니 뭐니 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치약이 소비자를 현혹한다. 치약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긴 그 많은 동물 중에 칫솔질을 하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칫솔질을 하지 않아도 호랑이의 이빨은 강하다.
이빨 빠진 호랑이는 더 이상 호랑이가 아니다.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깨끗한 치아는 생명을 영위하는 필수 요소다.
시원하게 양치질을 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욕실을 나온다. 새삼 치약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실감한다. 치약의 독백은 고사하고 치약을 함부로 쓰는 습관을 바꾸어야겠다. 2017. 9. 21
첫댓글 치약 튜브얘기로 시작되는 글..그것도 모르고 첨엔 놀랐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하나의 소재에 대해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눈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생필품 중 치약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 소중함과 고마움을 실감했습니다. 치약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치약의 독백을 선생님의 독창적 표현으로 잘 읽었습니다.
치약을 의인화한 점이 기발합니다. 같은 글재이더라도 쓰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는군요! 치약 사용도 올바르게 하고 절약도 해야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치약의 인생사를 맛깔나게 잘 표현하셨습니다. 치약에는 계면활성제가 들어 있습니다. 적당히 잘 사용하여 치아 건강도 유지하고 환경오염도 방지해야 하겠습니다. 독창적인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치약의 독백을 재미있게 잘 표현되어 실감이 납니다. 치약의 역사와 변천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글 잘 읽었습니다.
발상의 전환입니다. 독창성 있는글 제미있게 읽었습니다. 수필이 한결 다양하고 독창성이 있는 시도 입니다.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하루에도 이사람 저사람 손에 휘말리는 치약의 심정을 그렸네요. 처음에는 누가 수술대 위에서 고통받은 경험을 묘사하는 줄 알고 긴장했는데 알고보니 치약의 하소연이네요. 재치있는 변환과 표현에서 수필의 새로운 기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치약의 발달사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치약의 독백, 누구에게도 다 필요한 치약이 인간에게 오만가지 수모를 당하면서 끝내는 수술대에서 살아나지 못하고 한 생을 마치며 알록달록 매끈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그리워하는 풍자적인 글 치약의 일생이 수필로 태어나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라는 신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