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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서평> <Exile and the Jews(유대인과 추방)>
광야의 발자국, 책이 된 영토: 유대인 4000년 추방사와 문학적 대창조
단 한 순간도 대지에 온전히 발을 붙이지 못하고 바람처럼 떠돌아야 했던 한 민족의 처절하면서도 찬란한 정신적 연대기가 있습니다. 세계적인 유대 문학 및 역사학자인 낸시 E. 버그(Nancy E. Berg) 교수와 마크 사페르스타인(Marc Saperstein) 교수가 평생의 연구를 집대성하여 엮어낸 위대한 저작, <Exile Jews(유대인과 and the 추방)>의 책장을 펼치며, 우리는 문명사에서 가장 독특하고도 기적적인 문화적 생존과 창조의 드라마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 책은 단순히 나라를 잃고 눈물 흘렸던 한 민족의 수난 기록이 아닙니다. 성서 시대의 진흙탕에서부터 중세 유럽의 불타는 화형대, 그리고 현대 아우슈비츠의 잿더미와 뉴욕의 화려한 빌딩 숲에 이르기까지, 율법과 기도문, 철학적 논설과 비장한 시, 소설과 일기를 아우르는 유대인들의 방대한 문학적 창조력을 통해 ‘추방(Exile)’이라는 거대한 우주적 비극이 어떻게 한 민족의 정체성을 영원불멸의 것으로 빚어냈는지를 증명하는 숭고한 보고서입니다.
히브리어로 추방과 유랑을 뜻하는 단어, ‘갈루트(Galut)’와 분산을 뜻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는 듣는 것만으로도 살을 에어내는 차가운 밤바다와 목을 축일 길 없는 메마른 광야의 거친 숨소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것은 권리의 박탈이요, 실존적인 단절이며,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안식처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책이 우리 인류에게 던지는 진정한 충격과 전율은, 유대인들이 그 유랑의 암흑 속에서 단순히 신을 원망하거나 절망의 구렁텅이에 주저앉아 소멸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쫓겨난 그 유랑의 공간, 그 결핍과 상실의 장소를 거대한 ‘문화적 인큐베이터’이자 우주적 사유의 도가니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오늘 이 방대하고 장엄한 책이 담고 있는 유대인 추방의 다차원적인 지도를 함께 걸으며, 그들이 어떻게 절망을 영적 갱신으로, 상실을 위대한 창조로 승화시켰는지 그 서사의 심연을 세밀하고도 깊숙하게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존재론적 선언: 추방,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
이 책의 서두에서 가장 깊은 전율을 주는 부분은, 저자들이 ‘추방’이라는 현상을 단순한 정치적 권력다툼에 밀려난 지리적 이동이나 역사적 우연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책의 첫 장은 놀랍게도 추방을 ‘인간의 근원적 조건(Human Condition)’이자 우주적 법칙으로 선언하며 시작됩니다.
유대 전통의 위대한 주석서인 <미드라쉬 탄후마(Midrash Tanhuma)>는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행위 자체를 하나의 장엄한 ‘추방’으로 묘사합니다.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갈등도 없고 굶주림도 없는 가장 완벽하고 안전한 신성한 안식처로부터, 차갑고 낯설며 고통으로 가득 찬 이 물질 세계로 던져지는 행위, 그것이 바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첫 번째 유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창세기> 3장의 사건을 유대 사상가들은 어떻게 읽었습니까? 12세기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의학자였던 모세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는 그의 불후의 저서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The Guide for the Perplexed)>에서 에덴으로부터의 추방을 지리적 추방이 아닌, ‘신성한 이성과 진리로부터 소외되어 감각적 욕망과 물질의 세계로 떨어져 버린 인간 영혼의 타락’으로 해석했습니다.
또한 15세기 후반, 스페인 축출의 피바람을 직접 맞았던 유대 사상가 돈 이삭 아브라바넬(Don Isaac Abravanel)은 이 첫 번째 추방을 인간이 자연과의 영적 조화를 잃어버리고, 탐욕과 소유욕에 눈이 멀어 문명이라는 또 다른 인공적인 감옥을 건설하며 시작된 근원적 방랑의 계기로 보았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추방은 역사 속에서 어쩌다 마주친 불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을 떠난 인간, 중심을 잃어버린 피조물이라면 누구나 마주해야 하는 존재론적 고독이자 영원한 방황이었습니다. 현대 시인 아모스 뉴펠드(Amos Neufeld)가 그의 아름다운 시 <추방>에서 "우리는 모두 어딘가로부터 떠나왔고, 본질적으로 ‘집을 그리워하는 존재’들이다"라고 고백했듯,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수난을 이 거대한 우주적, 인간적 조건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눈앞의 고통에 압도당해 민족의 맥이 끊기는 비극을 면하고, 오히려 고통을 인간 실존에 대한 가장 깊은 철학적 사유의 도구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 역사의 세 가지 거대한 그림자: 이집트, 바빌론, 그리고 로마
이 책은 유대 민족의 뼈대와 영혼에 깊은 문신을 새긴 고대의 세 가지 거대한 추방 사건을 연대기적이면서도 주제별로 추적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집트의 쇠풀무, 바빌로니아의 강가, 그리고 로마 제국의 칼날 입니다.
이집트의 종살이: 민족의 살과 뼈를 깎아낸 원형적 고난
첫 번째는 이집트, 히브리어로 ‘미쯔라임(Mitzrayim)’입니다. 이 단어는 ‘좁은 장소’, 즉 사방이 꽉 막혀 숨을 쉴 수 없는 절망의 공간을 뜻합니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이집트의 무자비한 노예 생활과 유아 학살은 앞으로 유대인들이 역사 속에서 겪게 될 모든 추방의 ‘원형(Prototype)’이 되었습니다.
1782년, 유럽의 위대한 현자 에제키엘 란다우(Ezekiel Landau) 랍비는 이집트에서의 추방과 훗날 페르시아 제국에서 겪은 추방을 정밀하게 비교하며 놀라운 통찰을 던집니다. 이집트의 박해는 육체적 노동과 물질적 억압이라는 물리적 폭력이었던 반면, 페르시아의 박해는 영혼과 유대적 정체성 자체를 말살하려 한 영적 폭력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집트라는 거대한 고난의 ‘용광로’를 거치며 비로소 일가족의 집합체에서 하나의 거대한 ‘민족’으로 제련되었습니다. 토라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명령하는 구절,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였음을 기억하라"는 이 준엄한 도덕적 명령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겪은 추방의 피눈물을 타인을 향한 무한한 자비와 인권, 그리고 연민의 윤리로 승화시키게 만든 인류 문명사의 첫 번째 이정표였습니다.
바빌론의 강가에서: 눈물을 종이 위에 잉크로 바꾸다
두 번째는 기원전 6세기, 난공불락이라 여겨졌던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이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되고, 유대민족의 엘리트들이 사슬에 묶인 채 끌려간 ‘바빌론 유수’입니다. 우리는 <시편 137편>의 눈물겨운 구절을 기억합니다.
"바빌론의 여러 강가, 거기에 앉아 우리는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노라. 우리를 사로잡은 자들이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되... 우리가 어찌 이방 땅에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이 순간은 유대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패러다임의 시프트(Paradigm Shift)가 일어난 분수령이었습니다. 신이 거하는 단 하나의 지상 공간인 성전이 사라진 곳, 신앙의 중심지를 통째로 잃어버린 이방의 더러운 땅에서 과연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가? 신은 예루살렘을 버리셨는가?
<페시크타 랍바티(Pesikta Rabbati)>를 비롯한 고대 미드라쉬 문헌들은 놀라운 신학적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파괴를 누구보다 슬퍼하셨으며, 독수리처럼 날개를 펴고 백성들이 끌려가는 바빌론의 먼지 나는 포로 길을 함께 걸어가셨다는 묘사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이라는 고정된 건축물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고통받는 백성의 비참한 유랑 길에 눈물 흘리며 동행하는 분, 즉 ‘쉐키나(Shekhinah, 신의 임재)’의 개념이 찬란하게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나아가 유대인들은 바빌론의 강가에서 통곡을 멈추고 붓을 들었습니다. 성전과 제사 중심의 종교를 ‘책과 텍스트’의 종교로 완전히 전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구전되던 성서의 율법, 예언자들의 선포, 민족의 기억들이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수집되고, 대대적으로 편집되었습니다.
훗날 이 유랑의 땅에서 탄생한 <바빌로니아 탈무드(Babylonian Talmud)>는 예루살렘 본토에서 만들어진 탈무드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정교하며, 치밀한 학문적·법적 성취를 이루어냅니다. 지상의 영토를 잃은 유대인들이 ‘텍스트’라는 거대한 영적·지적 영토를 우주 공간에 건설한 것입니다.
1953년 아미르 길보아(Amir Gilboa), 1955년 레아 골드버그(Lea Goldberg), 1968년 예후다 아미하이(Yehuda Amichai) 등 현대 이스라엘의 거장 시인들이 바빌론 강가의 통곡을 끊임없이 자신들의 시 속에서 변주하고 재해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빌론은 상실이 어떻게 위대한 문화적 창조와 잉태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문명사 최고의 상징입니다.
로마 제국의 칼날과 2000년의 긴 겨울
세 번째는 기원후 70년, 로마 제국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두 번째 성전마저 불타 없어지고,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쫓겨난 ‘길고 긴 추방(The Long Exile)’입니다. <에이카 랍바(Eikhah Rabbah)>를 비롯한 초기 랍비 문헌들은 예루살렘 거리가 유대인들의 피로 물들고, 위대한 율법 학자들이 로마의 노예 시장에 짐승처럼 팔려 가던 처참한 광경을 피를 토하듯 고발합니다.
이 시점부터 유대인들에게는 국경도, 군대도, 영토도, 법원도 없는 2000년 동안의 잔혹하고 긴 겨울이 시작되었습니다. 1393년 프로피아트 두란(Profiat Duran)이 쓴 <애통과 위로의 서한>, 15세기 후반 돈 이삭 아브라바넬의 저작들, 그리고 1500년경 스페인에서 쫓겨난 아브라함 사바(Abraham Saba)의 피 묻은 문헌들은 기독교 유럽이라는 거대한 철권 밑에서 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사회적 매장과 종교적 박해를 처절하게 전합니다.
유럽의 중세 십자군 학살, 페스트의 원흉으로 몰려 당한 집단 학살(Pogrom), 그리고 1492년 스페인 가톨릭 왕정에 의한 대추방 등 역사의 잔혹한 굽이마다 유대인들은 "도대체 왜 우리에게 이런 끝없는 갈루트가 지속되는가? 신의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피맺힌 신학적 질문을 던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서질지언정 녹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1855년 아브라함 P. 멘데스(Abraham P. Mendes) 랍비가 ‘샤밧 나하무(위로의 안식일)’ 대설교에서 목놓아 선포했듯, 그들은 황폐해진 지상의 영토를 보며 역설적으로 ‘인간의 제국은 무너질지언정 하나님과 맺은 계약은 우주적 천체보다 견고하다’는 정신적 확신을 키워나갔습니다.
절기와 축제: 영토를 빼앗긴 민족이 ‘시간 속에 세운 성전’
지상의 모든 영토를 빼앗기고 국경 밖으로 내몰린 민족이 어떻게 정체성을 잃지 않고 수천 년 동안 단일한 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이 책의 가장 독창적이고 탁월한 통찰은 유대인들이 공간을 빼앗기자 ‘시간 속에 성전(Sanctuary in Time)’을 짓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밝혀낸 장에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유대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날인 ‘티샤 베아브(Tisha b'Av, 아브월 9일)’ 단식일입니다. 이 날은 첫 번째 성전과 두 번째 성전이 무너진 날이자, 스페인에서 추방령이 내려진 날입니다. 유대인들은 일 년 중 가장 뜨거운 여름의 이 날, 사방의 불을 끄고 맨바닥에 앉아 신발을 벗은 채 <예레미야 애가>를 낭독하며 수천 년 전 무너진 예루살렘의 돌무더기와 불길을 바로 지금 자신의 거실 한복판으로 불러냅니다.
1900년, 근대 유대 문학의 개척자 모르데카이 제에브 파이어베르크(Mordecai Ze'ev Feierberg)의 고전 소설 <어디로?(Whither?)>에 묘사된 격정적인 장면을 보십시오. 티샤 베아브의 밤, 촛불 하나에 의지해 우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빛을 통해, 이 절차가 단순한 과거의 기념식이 아니라 매년 찾아오는 영적 통과의례임을 보여줍니다. 세대를 불문하고 모든 유대인 청소년이 자신이 ‘유랑하는 민족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자 딸’임을 뼈저리게 각인하는 정체성의 용광로였던 것입니다.
반대로 ‘푸림(Purim)’ 축제를 보십시오. <에스더서>에 기원을 둔 이 축제는 페르시아라는 이방 왕국, 즉 추방지의 한복판에서 유대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악인 하만의 음모를 지혜와 용기로 극복해낸 대역전의 축제입니다.
1936년, 나치의 광풍이 유럽 전역을 집어삼키고 유대인들의 목을 조여 오던 일촉즉발의 시기, 미국의 유대인 지도자 압바 힐렐 실버(Abba Hillel Silver) 랍비가 행한 역사적인 설교 <그러나 모르도개는 무릎 꿇지 않았다>를 이 책은 인용합니다. 그는 전 세계 유대인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추방지의 군주들과 독재자들 밑에서 살아남았으며, 나치의 총칼 앞에서도 유대인의 자존감과 영혼은 절대 무릎 꿇릴 수 없다는 선언이었습니다. 푸림 축제는 추방지에서의 삶이 비록 위태로울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강력한 정치적·영적 저항의 축제였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축제와 절기를 통해 일 년 365일이라는 시간의 순환 속에 추방의 고통과 구원의 희망을 촘촘히, 그리고 완벽하게 배치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공간적으로는 시베리아의 동토에 있든, 모로코의 사막 게토에 있든, 뉴욕의 세련된 아파트에 있든 상관없이, 동일한 날에 동일한 쓴 나물을 먹고, 동일한 눈물을 흘리며, 동일한 타악기를 치고 기뻐했습니다. 공간적 한계를 완전히 초월하여 ‘시간’이라는 거대한 영토 안에서 하나의 유기적인 초국적 공동체로 호흡했던 것입니다.
언어와 신비주의: 영혼의 내면화된 유랑과 ‘티쿤 올람’
이 책이 도달하는 학문적 깊이의 정점은 바로 ‘언어의 추방과 내면의 유랑’을 다룬 장입니다.
고향 땅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에게 조국의 언어였던 히브리어는 더 이상 시장에서 빵을 사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언어가 될 수 없었습니다. 히브리어는 오직 골방에서의 기도와 거룩한 경전 연구 속에서만 살아 숨 쉬는 ‘성스러운 언어(Lashon ha-Kodesh)’가 되었고, 그들의 일상어는 거주하는 지역의 언어와 융합되어 분열되었습니다. 유럽에서는 독일어와 섞인 이디시어(Yiddish)가, 지중해 연안에서는 스페인어와 섞인 라디노어(Ladino)가, 중동에서는 유대-아랍어가 쓰였습니다. 민족의 입술과 언어 자체가 사방으로 찢기고 추방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 정신문화의 위대함은 이 언어적 유랑과 분열 속에서 인류 철학사상 가장 심오한 신비주의 체계인 ‘카발라(Kabbalah)’를 꽃피웠다는 점에 있습니다.
16세기, 스페인에서 쫓겨난 난민들이 모여들었던 팔레스타인 갈릴리의 작은 산악 마을 사페드(Safed)에서, 불세출의 신비주의 천재 이쯔학 루리아(Isaac Luria) 랍비가 등장합니다. 그는 우주의 창조 메커니즘 자체에 ‘추방’과 ‘부서짐’이 각인되어 있다는 경이로운 우주론을 펼쳤습니다.
무한한 신(Ein Sof)이 우주를 창조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자신을 축소하고 뒤로 후퇴시켰을 때(찜쭘, Tzimtzum), 그 신성한 빛을 담기 위해 준비된 우주적 그릇들이 신의 압도적인 에너지를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 버렸다는 ‘쉐비랏 하켈림(Shevirat ha-Kelim, 그릇의 깨어짐)’ 이론입니다.
그 깨어진 그릇의 파편들은 우주의 가장 어두운 심연과 물질 세계로 떨어졌고, 거룩하고 신성한 빛의 불꽃(Nitzotzot)들은 그 어둠과 악의 껍데기(Klipot) 속에 갇혀 영원한 ‘추방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장엄하면서도 가슴 아픈 영적 우주관입니까! 루리아의 카발라에 따르면, 지금 고통받고 유랑하는 것은 유대인뿐만이 아닙니다. 우주를 가득 채워야 할 신성한 빛 자체, 아니 신의 본질 자체가 지금 이 물질 세계의 어둠 속에 유배당하고 추방당해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 민족이 겪는 지상의 갈루트는, 우주적 규모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영적 추방 드라마의 지상적 발현일 뿐입니다.
여기서 끝났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리아는 인류에게 가장 위대한 실천적 소명을 부여합니다. 유대인들이 고난 속에서도 율법을 행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진심 어린 기도를 바칠 때, 어둠의 껍데기 속에 갇혀 유랑하던 신성한 빛의 불꽃들이 하나씩 해방되어 원래의 하늘 고향으로 귀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주를 구원하고 깨어진 세계를 다시 수선하는 거룩한 행위, ‘티쿤 올람(Tikkun Olam, 세상의 수선)’의 진짜 유래입니다.
이 사상은 박해와 축출로 소망이 끊어졌던 중세와 근세의 유대인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위로와 실존적 파워를 제공했습니다. "내가 지금 폴란드의 진흙탕 게토에서, 혹은 스페인의 차가운 길바닥에서 겪고 있는 이 비참한 고난이 무의미한 부랑자의 발걸음이 아니다. 내가 여기서 신앙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 매 순간, 나는 우주의 깨어진 파편을 맞추고 신을 유배지에서 해방시키는 우주적 구원 투수다!"라는 영적 자각을 준 것입니다.
마침내 추방은 지리적 경계선을 넘어 유대인의 ‘심리적 내면’으로 깊숙이 파고들었습니다. 현대의 수많은 디아스포라 작가들은 육체는 비록 자유롭고 안전한 땅에 살고 있을지라도, 영혼은 여전히 실존적 소외와 고독이라는 영원한 경계선 위에 서 있는 현대인의 분열된 자아를 유대인의 추방 정체성을 통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근현대의 폭풍: 시오니즘의 귀환, 홀로코스트의 심연, 그리고 새로운 디아스포라
이제 우리는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근현대의 거대한 폭풍의 역사 속으로 도달합니다. 이 책의 후반부는 19세기 말 이후 유대인들의 삶을 문자 그대로 송두리째 뒤흔든 세 가지 거대한 역사적 사태를 다룹니다.
시오니즘: 갈루트의 완전한 부정과 지상 영토의 회복
첫 번째 대답은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의 정치적 선언과 하임 나흐만 비알리크(Hayim Nahman Bialik)의 격정적인 시로 대변되는 ‘시오니즘(Zionism)’의 발흥이었습니다. 19세기 말, 러시아의 포그롬과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을 목격한 유대 지식인들은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2000년 동안 지속된 유랑과 학살의 잔혹한 사슬을 끊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더 이상 책 속이나 기도문 속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실제 지상의 영토를 회복하고 우리 손으로 국경과 군대를 가진 주권 국가를 건설하는 것뿐이라는 결론이었습니다.
시오니즘 사상가들에게 ‘갈루트(추방)’는 반드시 종식되어야 할 약소민족의 굴욕이었으며, 영혼을 좀먹는 나약함의 역사였습니다. 그들은 "유랑하는 유대인(Wandering Jew)"이라는 해묵은 이미지를 내던지고, 자신의 땅을 개간하는 "새로운 히브리인"을 창조하고자 했습니다. 마침내 1948년, 이스라엘 국가의 건국은 서사적으로 유대인 2000년 유랑사의 위대한 마침표처럼 보였습니다.
홀로코스트: 추방이 도달한 인류사 절대 어둠
그러나 그 위대한 귀환의 빛이 지평선에 떠오르기 직전, 인류 역사가 마주한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심연인 ‘홀로코스트(Shoah)’가 문명사의 한복판을 강타했습니다. 나치 독일의 고도화된 관료제와 기계적 살상 공장은 유대인들에게 ‘추방’이라는 단어조차 사치스러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친숙한 집으로부터의 추방이었고, 시민권과 법적 보호로부터의 추방이었으며, 마침내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범주 자체로부터 추방되어 아우슈비츠와 트레블린카의 가스실과 잿더미로 향했던 절대 어둠의 길이었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생존자 정서와 사상가들의 고뇌는 우리에게 피눈물 나는 질문을 던집니다. "신은 이 절대 어둠의 유랑 속에서 어디에 계셨는가? 바빌론으로 함께 가셨던 그 쉐키나는 아우슈비츠의 굴뚝 연기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타들어 가셨는가?" 이 시기의 유대 문학은 언어의 파산을 선언하면서도, 그 무덤 같은 침묵 속에서 인간성의 마지막 보이지 않는 실을 지켜내려는 처절한 정신적 몸부림이었습니다.
현대 디아스포라: 풍요와 자유 속에서 마주하는 ‘소외의 영토’
그리고 오늘날, 21세기의 현실은 우리에게 또 다른 패러독스를 던집니다. 현재 전 세계 유대인의 절반가량은 약속의 땅 이스라엘이 아닌 미국, 유럽, 중남미 등 ‘디아스포라’의 땅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과거의 조상들처럼 게토에 갇혀 박해받는 부랑자가 아닙니다. 미국 사회의 가장 강력한 주류로서 풍요와 성공,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자유를 마음껏 누립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갈루트는 완전히 끝난 것입니까? 이 책에 담긴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 미국의 유대인 신학자들과 문화 비평가들의 고백은 매우 예리하고 묵직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물리적으로 가장 안전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뉴욕이나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을지라도, 유대적인 영적 고향과 영토 밖에 살고 있다는 본질적인 한계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추방’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외적인 박해가 사라진 풍요 속에서 정체성이 소리 없이 녹아내리는 새로운 형태의 ‘보이지 않는 유랑’, ‘문화적 동화라는 조용한 추방’을 겪고 있다는 처절한 자기반성입니다.
우리 모두가 걸어가는 유랑의 길 위에서, 인류를 향한 윤리적 이정표
이제 이 방대하고 위대한 유대인의 대서사시를 마무리하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그리고 지구촌 곳곳에서 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시간입니다. 이 책이 펼쳐 보인 유대인의 4000년 유랑의 역사가 왜 유대인들만의 닫힌 이야기가 아니며, 왜 오늘 우리 모두의 심장을 이토록 세차게 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의 현대 세계 역시, 형태만 다를 뿐 수많은 ‘추방’과 ‘유랑’의 눈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의 포화와 정치적 탄압, 종교적 박해를 피해 정든 고향집을 등지고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지는 난민들의 처절한 행렬을 보십시오. 기후 변화와 사막화로 인해 더 이상 생존할 수 없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수천만의 기후 이주민들의 거친 숨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물리적인 망명과 지리적 쫓겨남뿐만이 아닙니다.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과 고도화된 기술 문명의 거대 기계 속에서, 자신이 나고 자란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수많은 스마트폰 화면 속 군중 속에서 극심한 고독을 느끼며, 나의 영혼이 안식할 진정한 정신적 고향을 찾지 못해 밤마다 방황하는 우리 현대인들이야말로, 이 거대한 우주 속의 새로운 ‘길 잃은 유랑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인류 역사 앞에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정신적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집을 잃었을 때 원망 대신 책을 폈습니다. 지상의 영토를 빼앗겼을 때 시간 속에 무너지지 않는 성전을 지었습니다. 공동체가 사방으로 찢어졌을 때 언어와 기억, 그리고 역사라는 끈을 더욱 단단히 동여맸습니다. 그들에게 추방은 죽음과 소멸로 가는 단두대가 아니라,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되물으며 민족의 영혼을 제련하고 완성해 나가는 거룩한 영적 정련(Refining)의 과정이었습니다.
"너희는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의 심정을 헤아려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이 책이 인류 문명사 전체를 향해 던지는 최종적이고도 가장 고결한 윤리적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스스로 추방자가 되어본 민족만이, 스스로 밤바다의 차가움과 나그네의 설움을 뼈저리게 알아본 영혼만이, 세상의 모든 외롭고 소외당하고 부서진 자들을 향해 아무런 조건 없이 가슴을 열고 손을 내밀 수 있다는 엄숙한 진리입니다. 유대인들의 갈루트 문학과 사상이 도달한 위대함은, 나 자신의 고통에 침잠하는 것을 넘어 그 고통을 인류 전체의 취약성과 아픔에 대한 거대한 공감과 연대의 동력으로 확장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 역시 각자의 인생이라는 광야 위에서 크고 작은 추방을 경험합니다. 사업의 실패라는 고독,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의 슬픔, 사회적 소외라는 아픔의 벌판을 홀로 걸을 때, 이 책이 전하는 수천 년 전 바빌론 강가의 시인들과, 중세 사페드의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아우슈비츠의 게토 속에서 시를 썼던 이들의 목소리를 기억합시다.
어둠은 영혼의 가장 깊은 빛을 기르는 잉태의 시간이며, 내 발 밑의 유랑의 길이야말로 진정한 내면의 고향,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원한 영혼의 영토를 창조해 나가는 거룩하고 숭고한 여정임을 말입니다.
길고 지난한 유랑의 역사 끝에 마침내 문학적 대창조의 꽃을 피워낸 유대인들의 위대한 정신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방황하는 발걸음 위에도 따스하고 찬란한 이정표가 되어주기를 소망합니다.
By Torah & Judaism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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