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교리(윤리)Ⅰ
-그리스도교 사회론, 가톨릭 사회론,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로 세상이 혼란스럽고 복잡하며 어려운 시기이다. 이러한 세상에 대한 가르침은 이미 사회 교리라는 것을 통해서 1891년에 노동 헌장을 시작으로 가르침이 전달되었다. 유럽 사회는 사회윤리를 중심으로 정당정치뿐만 아이라 사회의 모든 기반에 인프라가 그리스도교 사회론에 의해서 정립되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세상을 사는 데 존엄성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와 그런 이론에 의한 삶들이 살아갈 수 있게 준비되었다.
우리 사회는 그런 장치가 정립되지 못함으로써 정치와 경제, 모든 분야에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의전 갈등으로 의료 대란이 일어나 환자들이 고통받고 있다. 또한 정치는 자기들의 이념과 이득 때문에 국민을 힘들게 하고 있다. 국민은 편파적으로 서로를 공격하고 비난하며 갈등을 빚고 있으니 세상은 전쟁 아닌 전쟁의 현장이다.
20세기에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시스템이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악용되고 있으며 개념 자체도 흔들리고 있다. 포스트모던으로 민주주의 이념이 상실되어 가는 위기에 놓여 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서 선거에 의해서 취해진 것이다. 그래서 좌충우돌 갈등을 겪으며 사람들을 어렵게 하고 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이미 모든 분야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지만, 한국 사회는 사회 교리가 잘 전달되지 못했다. 노동조합도 가톨릭교회에서 산업혁명 이후에 1891년 노동 헌장이 반포되면서 교황께서 노조를 만들라고 하셨으니 노동조합의 원조는 가톨릭인 셈이다. 이는 노동자들의 삶의 권익과 권리를 보존하고 보호해 주기 위해서 직능별 노동조합을 만들고 지도 신부를 임명하셨는데 노조의 시작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과 갈등에서 노동자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노조의 근본적인 이념 없이 사회주의 이론만 밑바탕에 깔고 강성노조가 정착되었다. 진정한 의미가 구현되지 못하는 시대적 아픔을 겪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분야에 대한 올바른 이념이 부족하며, 또 교회가 왜 그러한 것들을 시작했는가에 대한 인식과 전달 부족으로 큰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파업만 하면 무노동 무임금을 외치게 되고 그로 인해서 많은 문제가 생긴다. 노조의 성장 과정에서 빚어진 아픔과 갈등으로 정권과 맞부딪히는 시대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가장 핵심적으로 할 일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소득이 높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반작용으로 사회가 부패하고 있다. 물질적 풍요는 인간성 상실과 마약과 같은 것이 범람하여 사회가 피폐해지고 있다.
같은 시간에 유럽과 우리나라에 태어난 아기는 똑같은 행복일까? 유럽 사회는 한 인간이 태어나서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사회복지 정책으로 자기가 열심히 살려고 하면 인간답게 사는 모든 시스템이 되어 있어 욕심부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경쟁이 하나의 삶의 시스템으로 되어 있어 죽기살기로 노력해야 한다.
무노동 무임금은 그리스도교의 이념에 아니다. 한 달에 20일 정도 일하지만, 월급은 한 달 치를 다 받으니 말이다. 노동은 임금의 대가로 여기면 안 된다. 노동은 인간을 위한 노동이다. 우리 사회의 노동법은 교회가 노동조합을 만들 때 임금 체계, 노동 일수, 휴가 등 모든 것을 사회 법리에서 나온다는 유럽에서 정착된 것을 우리가 여과 없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형태로 모두 교회에서 나온 것이다.
사회 교리는 모든 내용이나 이론이 지금 현실에서 사는 데 부딪히는 그 모든 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것이 사회이다. 독일 민스터에서 사회 교리가 시작되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민스터에서 사회 교리를 전공하셨다. 독일에서 사회론이라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교를 말하며 가톨릭 사회론이라고도 한다.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이며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로 표현한다.
교회는 원칙과 이론과 실질적인 하나의 지침들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교회 안에서 동서로 갈라지고 갈등하고 비난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정치, 경제와 사회를 보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기초적인 지식을 갖춰야 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시대에 걸맞게 교회의 역할이 중대하다. 사회 교리를 신약의 한 분야로 볼 때는 윤리의 분야이며 학문으로는 사회윤리이다. 교회의 가르침으로 논할 때는 사회 교리이다. 이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가정과 사회, 국가 즉 한 인간이 접하는 모든 사회의 문제를 교회의 시각에서 판단하고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를 다룬다.
70년대 민주화운동이 군사 독재 정권에서 민주화를 얻어낼 수 있었던 근본적 이론과 정신적인 지침은 김수환 추기경에게 있다. 김 추기경님은 민스터 출신으로 스승 요셉 회르너와 서신 교환을 하면서 자문을 얻었다. 이런 민주화 시대의 역할은 김수환 추기경이었으며 이는 교회의 사회 교리에서 나온 지혜이다.
세상은 조직과 계급사회에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살다 보면 억울하고 눈물 흘리고 하소연할 데 없는 아픔을 겪으면서 ‘세상 더럽네’ 비난하기도 한다. 그렇게 생존경쟁에서 밀리면 도태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서 3장 17절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를 밝히고 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 심판이 아니라 세상의 악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회에 가면 신부는 세상 따라가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니 혼란스럽다.
복음서에는 세상은 ‘코스모스’라고 한다. 그렇게 다른 해석은 언어의 성경 번역에서 오는 오류이다. 서양의 언어는 다양하게 지시한 세상의 개념을 다양하게 뜻을 표현하고 있지만, 우리의 번역은 ‘세상’ 밖에 없다. 그러니까 잘못 전달될 수 있다. 성경 안에서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80% 긍정적인 표현 ‘코스모스’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 초대한 것으로 세상은 좋은 곳이며, 성경 안의 세상은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오늘날 교회 사목자들이 세상의 뜻을 잘못 인식하고 부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는 조금도 어김없이 움직이고 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 23,5도 기울어진 축, 민물과 썰물 등 자연계의 오묘한 질서 즉 ‘코스모스’이다. 인간의 몸도 순환 사이클이 신비로워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세상은 인간을 위한 창조이며 인간을 위한 세상이다. 해서 우리는 ‘세상이 더럽네’가 아니라 축복의 선물로 여겨야 한다.
그러한 세상인데 인간은 자기중심적 세상을 가지며 욕망이 생겨 질서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처럼 살면 세상은 정말 천국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욕망으로 흐트러진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구원이며 천국임을 보여 주셨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끊임없이 세상을 정화시킨다.
세상은 빛이고 소금이라 했는데 오늘날 우리 시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 그 원인은 원천적으로 그리스도교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증거자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혼란스럽다. 세상은 역동적으로 변화되어가며, 그 역동성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그런데 세상에는 종말론이 대두되고 있다. 이는 성경의 종말은 당시에 임박한 재림 사상에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지 모르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그렇게 기록된 것이지 하느님께서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육신, 세상, 재물>의 책은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억울하고 눈물 나는 세상을 살았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의료 분쟁, 재물에 대한 소유가 육신의 존재보다 소중히 여기는 세상이다. 이런 모든 언밸런스를 어떻게 올바로 잡아줘야 할 것인가? 종교가 그런 역할을 해줘야 한다.
세상에 대해서 성경은 세 가지로 이야기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에렉스(코스모스)이다. 아주 질서 정연하게 신비롭게 조화가 되도록 만드셨다. 그런데 인간이 망쳐 놓았기에 예수께서 오셔서 다시 코스모스의 세상으로 돌려놓으셨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주도의 논리로 흩트려 놓았다. 세상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처럼 세상을 나쁜 질서로 만들기도 했으니 이를 테벡(오이코메)이라고 한다.
이 세상은 시간적으로 지나가는 세상이다. 어떻게 보면 허무하고 마음대로 안 되고 영원한 것도 아니고 진화하고 있다.(올람) 바오로는 아이온이라며 영원한 삶이 주어지는 그 세상을 향해서 나가라며 세상을 허무와 비관적인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나가는 세상에 너무 집착하지마라는 것이다.
사회 교리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코스모스의 순환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욕심에 의해서 만들어진 무질서한 혼란과 혼동을 다시 바로 잡아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세상으로 만들어가자는 게 사회 교리이다. 여기서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모든 가르침이 나온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 탐욕, 권력, 욕망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지구의 전쟁, 온난화 현상, 분열과 갈등도 존재보다 소유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멸망으로 이끄는 것으로 인식하지만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가 우리 인간에게 주어져 있고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
2024. 09. 21. 유스티노회 김정우 신부 강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