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93]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에 대한 시
1895년 4월 24일 새벽 2시,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이 그의 동지들이었던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한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다. 그 전날 권설재판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다음날이었다. 전광석화는 이럴 때 쓰는 말이리라. 당시 장군의 나이는 마흔이었다. 그가 남긴, 의미심장한 절명시를 보자.
時來天地皆同力 시래천지개동력
때를 만나서는 천지가 모두 힘을 합치더니
雲去英雄不自謀 운거영웅불자모
운이 다하매 영웅도 스스로 도모할 길이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 애민정의아무실
백성을 사랑하고 의를 세움에 나 또한 잘못이 없건마는
爲國丹心誰有知 위국단심수유지
나를 위한 붉은 마음을 그 누가 알까
최근 노동시인 송경동의 <영풍문고 앞 전봉준씨에게>라는 장시를 읽으며, 새삼스레 2018년 4월 24일(공교롭게, 아니 일부러 그날 세운 것이겠지만, 장군이 처형돼 순국한지 123년이었다) 그가 갇혀 있던 전옥서典獄署 자리에 동상을 세웠다. ‘사단법인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 명목이지만, 국민들의 성금으로 가능했던 일이다. 이 경우, 만시지탄이란 말은 맞지 않는다. 늦어도 너무 늦었던 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이 크게 애썼다고 들었다. 당시 참요讖謠처럼 불렸다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노래는 민심民心의 방증이었을 터. 동상이 비록 왜소하고 초라한 듯해도,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처럼 거창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장군이 사랑했던 민중들 속에서 그 모습 그대로 함께하는 것같고, 민중들이 장군의 고귀한 뜻만을 헤아릴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순창 피로리에서 동지의 밀고로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국사교과서에도 실렸었으니) 대부분 기억하시리라. 몽둥이에 다리가 부러져 서지 못하고 앉아 있으면서도 장군의 형형炯炯한 눈빛을 보라. 일세를 풍미한 영웅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눈빛만 빼놓고 처연하다. 그 사진을 보고 시인 안도현이 쓴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돼, 문단에 등단했다.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안도현 시인은 장군의 형형한 눈빛을 '타는 눈빛'이라고, 동진강 어귀의 물결소리를 '척왜척화 척왜척화'라고 썼다. 80년대 후반이던가, 대하소설 <녹두장군>을 쓴 송기숙 작가가 자신의 작품 이야기를 4000여자로 썼는데, 당시 편집기자였던 나는 제목을 어떻게 달고 어떻게 편집할까 고심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일본말로 ‘뻬다시로’이다)의 컷에 글자수가 10-13자를 넘으면 안된다. 그분의 삶과 문학을 한마디로 압축해야 하는 쉽지 않은 일. 나는 “동학농민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라고 정한 후 데스크에게 제발 그대로 나가게 해달라(데스크가 고치면 그만이다)고 신신당부, 그대로 나갔다. 막 인쇄된 신문을 받아든 나는 기분이 날아갈 것같았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어느 독자가 마침 내가 제목을 단 문화면을 읽고 있는데, ‘그 제목 제가 달았는데요’말하고 싶어 혼이 났었다. 하하.
영풍문고 앞에서 “전봉준씨”라고 부르며, 혼자 주저앉아 씨부렁거리는 어느 노동시인의 마음이 감정이입되어 좋았다. 장군은 현 대통령 취임 전부터 토요일마다 서울시청 앞에서 열리고 있는 촛불집회를 과연 어떻게 보고 계실까? 그것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