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06
5월30일[연중제8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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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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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fr1IAM2Sy2E
(이경수 프란치스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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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 안에 살면서도 버릴 것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수도회 입회하면서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썼습니다. 그간 정들었던 집도 떠났습니다. 부모님과 가족, 친지, 친구들에게도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극단적 청빈 생활, 엄격한 규율 생활만이 남았다 여기며, 비장한 각오로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들어와 보니 상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입회 전 살던 코딱지 만한 집과는 비교가 안 될 널찍한 저택에, 운동장에, 정원에...뿐만 아닙니다. 전 세계 방방곡곡 가는 곳 마다 ‘살레시오회’란 이름으로 ‘완전 공짜’로 머물 집이 수두룩했습니다.
수도원에 몸담고 살아가면서 예수님 말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음을 실감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실상 제가 버린 것은 너무나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 대가로 주신 선물은 너무나 큰 것이어서 그저 과분하고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백 번 천 번 지당한 말씀임이 틀림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코 복음 10장 29-31절)
우리를 가장 기분 좋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작은 버림을 통해 현세에서도 헤아릴 수 없는 축복과 은총, 그리고 충만한 자유로움을 선물로 받게 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큰 덤으로 내세에서의 영원한 생명까지 보장해주시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이토록 좋은 복음적 길에 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따라나섰으면 좋겠습니다. 이토록 행복한 예수님 추종의 길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따라나섰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결혼까지 했고, 가족도 있으니, ‘버린다.’는 것은 해당되지 않으려니 하는 생각도 버리시기 바랍니다. 세상 안에 살면서도 버릴 것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집착을 버리고, 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극단적인 이기심을 버리고, 물질만능주의의 유혹을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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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TZ8qVLo8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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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에서 무엇이든 100배로 불리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과 복음 때문에 집과 부모, 형제와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그 모든 것의 100배를 받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이런 것들의 100배를 누리는 사람이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사람이란 뜻입니다.
저는 분명 돈 걱정도 없고 가족도 수천, 수만 명이 된 것 같고 잘 집도 많아서 이 말대로라면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처럼 기뻐 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 그렇냐는 게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보면 악한 사람들이 더 부유하게 살고 선한 사람들은 더 가난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대로라면 부자들만 구원받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 오히려 부자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주님과 복음을 위해 내어놓은 만큼 복을 받는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냥 상징적인 의미일까요?
저는 현세에서도 분명 그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가난해도 부유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위 친구와 가족들이 많아도 외롭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고 혼자 살더라도 진짜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이 가족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땅이 아무리 많아도 가시방석에서 자는 것과 같은 사람이 있고 아무 곳에서도 집처럼 잘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본인만이 알 수 있는 구원받은 표징입니다. 하느님은 분명 약속을 지키십니다. 가난해도 부족함 없이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구원받은 표징이고 부유하더라도 외롭고 불만족하게 살면 구원받지 못한 표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구약성경의 룻기에서 발견됩니다. 룻은 모압 땅에서 온 타국인 여인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룻의 남편, 처남, 시아버지가 모두 죽고 룻과 동서와 시어머니 나오미도 과부가 되었습니다.
나오미가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했을 때 처음에는 며느리들에게 새 남편을 찾고 안락한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 더 큰 모압에 머물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와 함께 살기 위해 고국에서 재혼할 기회를 포기했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한 룻은 나오미의 죽은 남편의 부유한 친척인 보아스의 밭에서 보리를 줍기 시작했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친족 구속자, 즉 곤경에 처하거나 위험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친척을 대신하여 행동할 특권이나 책임이 있는 친척임을 인식했습니다.
나오미는 룻을 인도하여 보아스에게 접근하여 그녀와 결혼하고 가계를 이어감으로써 이 임무를 수행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위험했습니다. 룻은 그녀의 미래를 보아스의 손에 맡기고 있었고, 그는 그녀를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거부할 권리가 있는 더 가까운 친척과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당시의 법률 내에서 그렇게 했음을 먼저 확인하면서 영광스럽고 동의했습니다.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여 오벳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오벳은 다윗 왕의 할아버지가 되어 룻을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에 두었습니다(마태복음 1:5).
사랑은 신기하게도 받으면 주어야 한다는 양심을 발동시킵니다. 나오미는 잠시 자기 가족이 되었던 이방 며느리가 자신에게 그렇게 충실한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은 보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보다 훨씬 부유한 집안에 시집을 보낼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것을 도로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사람은 받은 것은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양심 안에 넣어진 정의의 저울입니다.
사랑은 이 양심을 작동하는데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사랑을 보상받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사랑은 반드시 보답받습니다. 사랑의 본성이 보답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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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박2일 사제모임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온 지 3개월 된 신부님부터 저처럼 4년이 넘은 신부님들이 함께하였습니다. 이제 막 미국에 온 신부님을 보니 4년 전 저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성격이 급한 편이라서 마음이 불안했었는데 신부님은 워낙 성격이 느긋한 편이라서 편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말처럼 어차피 이루어질 것은 다 이루어지게 돼 있는데 저만 애가 달았다는 생각입니다. 처음에는 공사가 늦게 끝나는 것도, 절차가 늦게 진행되는 것도 ‘짜증’이었는데 지금은 그러려니 하고 지냅니다. 교구도 다르고, 미국에 온 순서도 다르지만 ‘사제’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즐겁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번 모임에 감사할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제들의 모임에 기꺼이 후원해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이름을 알면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겠다 싶었는데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작은 성과도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드러내지 않고 후원하신 분의 마음을 하느님께서는 더 따뜻하게 받아 주시리라 믿습니다.
신문사에 있기에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주어집니다. 지난 4월에는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어제부터는 ‘그리스 터키’로 성지순례를 시작하였습니다. 2004년에 다녀왔으니 20년 만에 다시 가는 ‘그리스 터키’ 성지순례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교회의 공동체는 바오로 사도의 선교로 ‘그리스와 터키’에도 전해집니다. 우리는 그 여정을 사도행전과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지순례의 가이드가 ‘0, 300, 600, 1100, 1200’이라는 숫자를 자주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사도들에 의해서 전해지지만 많은 시련과 박해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와 성령의 이끄심으로 교회는 박해의 시대를 끝내고 로마의 국교가 되는 시대를 맞이합니다. 그것이 300년대입니다. 헬레나 성녀의 후원으로 이스라엘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베들레헴 주님 탄생 성전, 예루살렘 주님 무덤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성지순례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모하메드가 세운 이슬람이 시작되는데 그것이 600년대입니다. 이스라엘로 가는 성지순례의 길도 막히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성지순례를 하러 가기 위해서 십자군을 파견합니다. 그것이 1100년대입니다. 십자군과 이슬람의 대립으로 십자군이 예루살렘에서 철수하는 것이 1200년대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선교하였던 곳들은 이슬람의 지역이 되었습니다. 이번 순례를 통해서 바오로 사도의 열정을 다시금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순례가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무사히 잘 끝날 수 있도록 기도를 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기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은 역시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을 함께 나누면서 성지순례를 감사의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네가 나의 꽃인 것은/ 이 세상 다른 꽃 보다/ 아름다워 서가 아니다./ 네가 나의 꽃인 것은/ 이 세상 다른 꽃보다/ 향기로워 서가 아니다./ 네가 나의 꽃인 것은/ 내 가슴속에 이미/ 피어 있기 때문이다.” 분명 삶의 길에, 장애물, 고통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듯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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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0,28-31: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어제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청년은 재산에 대한 집착 때문에 슬픈 표정으로 예수님을 떠나갔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가지고 영생을 준비할 줄 모르고 재물에다 자신의 삶을 의지하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시면서 슬픈 얼굴로 돌아가는 청년을 안타깝게 바라보셨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재산의 번영, 부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 축복의 표지라고 믿고 있었고 어떤 사람이 재물이 많고, 번영하면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그를 축복해 주신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던 제자들은 그 말씀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부자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믿었는데 놀랐다.
여기서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28절) 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무엇을 버리는 것일까? 그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나의 능력, 나의 재물 이 모든 것을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 자신만의 안위와 쾌락을 위하여 사용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모습으로 살려고 하는 나의 인간적인 모습을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나를 버리는 것이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을 견디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이에 대한 보상은 세상에서도 갚아주시고 또한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현세의 보상을 많이 체험하였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박해도 많이 받았지만, 자신이 쉴 수 있는 집들과 교우 형제자매들과 어머니 같은 여교우들, 자녀들을 대신하여 대자 대녀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을 만나게 되었다. 토지를 버린 사람은 교우들의 토지에서 필요한 것을 얻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재물이란 ‘사용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지, ‘주인이 되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재물이란 자기의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고,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 주어진 것으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보다는 그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 재산이 그를 불행하게 한다고 하셨다.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 살게 해 주시고,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며, 나의 재능과 내가 지금 잠깐 관리하는 것들 모두가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맡겨주신 것임을 알고 그것들을 맡겨주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집착 때문에 나의 관념이나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기도 한다. 인간은 재물이나 사상이나 관념의 노예가 되면 자신의 주변을 올바로 보지도 못하고, 이웃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게 된다.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그래서 주님 안에 복된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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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버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29-31) “누구든지”라는 말은, 지금 하시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버림’과 ‘따름’이 중요하긴 한데, 그 목적과 이유가 더 중요합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버리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왜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아닌 ‘다른 이유’로, 즉 어떤 세속적인 이유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녀, 토지”는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심과 집착을 상징합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한다면,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심과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영원한 것을 얻으려면 영원한 것만 찾아야 하고, 허무하고 세속적인 것들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이 말씀을 가족에 관한 가르침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족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버려야만 하는 쓸모없는 대상이 아니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끝까지 함께 가야 하는 영적 동반자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라는 가르침은 부부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에도 해당되는 가르침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가족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얻으려고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버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된 일입니다. 또 ‘버린다.’ 라는 말을 ‘봉헌한다.’로 생각하고서, ‘가족을 봉헌한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가족은 ‘내가’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봉헌하는 것입니다. 가족의 동의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가족을 봉헌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족을 자기 소유물로 생각하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버린다.’라는 말은, ‘봉헌한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전에 대한민국을 하느님께 봉헌한다, 또는 서울시를 하느님께 봉헌한다고 말한 정치인이 있었는데, 그것도 역시 대한민국과 서울시를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한, 아주 잘못된 태도입니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이라는 말씀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현세의 부귀영화 같은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신앙인이 박해를 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입니다.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라는 말씀은, ‘영적인 은혜’를 풍성하게 받을 것이라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백 배’라는 말은 완전함과 풍성함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목록에서 ‘아버지’가 빠져 있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을 보면, 보상 목록 자체가 없습니다.(마태 19,29; 루카 18,30)>
여기서 “내세”는 ‘저승’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버림’과 ‘따름’의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내세에서는’이라는 말을, ‘받겠지만’이라는 말과 ‘집과 형제와’ 라는 말 사이로 옮겨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내세에서는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로 바꿔서 읽으면, 뜻이 바뀌지는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지상에서의 처지와 하느님 나라에서의 처지가 역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힘 있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회개하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이 되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많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하지 않으면 처음부터 안 한 사람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가 좋은 예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던 신앙인 부부였는데, 명예욕과 재물욕을 버리지 못했고, 불행한 모습으로 인생이 끝나버렸습니다.(사도 5,1-11)
바오로 사도의 편지를 보면,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라는 말이 있습니다.(2티모 4,10) ‘데마스’라는 사람은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로서 바오로 사도를 따라다녔던 것 같은데, 너무 힘들어서 떠났는지, 아니면 신앙을 잃어버려서 떠났는지, 어떻든 ‘현세를 사랑해서’ 바오로 사도를 떠났습니다. 처음에 희망하고 추구했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포기하고 현세로 되돌아가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버려야 할 것은 버리지 않고, 버리면 안 되는 것을 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우리의 ‘권리’가 아니고, 하느님의 ‘의무’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총이고 자비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서, 하느님께 간청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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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부자 청년이 재산을 포기하지 못하여 주님을 떠나가자, 베드로가 주님께 말합니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상을 약속하시며, 현세에서는 그들이 버린 집과 가족과 토지의 “백 배”를,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실 “백 배”라는 수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서의 병행 구절은 “여러 곱절”(루카 18,30)을, 오늘 제1독서는 “일곱 배”의 보상을 말합니다. 백 배(완전 수 10의 제곱수)든 일곱 배(완전 수 7)든 주님의 보상은 선하고 완전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백 배”라는 표현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맺는 “백 배”의 열매(마태 13,8.23; 마르 4,8.20; 루카 8,8 참조)와, 주님을 위하여 가족과 재산을 포기한 이에게 주시는 “백 배”의 보상(마태 19,29; 마르 10,30 참조)을 말할 때만 쓰입니다. “백 배”는 하느님 나라와 관련된 종말론적 개념으로, 현세의 모든 것을 넘어서는 기쁨, 곧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의 생명과 축복을 누리는 충만함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보상 목록에서 “아버지”가 빠진 것은, 주님을 따르고자 세상 것을 희생하는 사람은 이미 “아버지”의 충만한 은총 속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는 “제물”, “제사”, “바치다” 같은 낱말이 두드러지게 많이 나옵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무엇을 ‘버린다’는 것은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끊어 버림으로써 그치지 않고, 부모 형제와 재화를 하느님께 기쁘게 봉헌하며 따르는 주님의 제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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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10, 28-31)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했다. 베드로가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였는가? 그리고 그 동기가 무엇인가?
아직까지도 제자들은 구원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이다. 다만 구원받는다는 것이 출세하는 것이라는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을 하시니 자기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씀이다.
자기들이 생각했던 구원 또는 하느님 나라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런 가능성이 거의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급해졌고 앞으로 자기들의 운명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물으면서 스승님의 의도를 알고 싶었던 것 같다. 이 말은 주님을 따르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말해준 훌륭한 말이다. 주님을 따르려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라야 한다.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자세이다. 그러나 내용이 문제이다.
즉 모든 것을 버린 그 동기가 무엇인가? 가 중요하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자기들이 출세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버린 것이지 정말로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버리다"라는 단어를 베드로도 사용하였고 예수님도 사용하셨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다. 베드로는"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버린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를 위하여" 버린 것이다.
그런 모습은 앞에서 예수님이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로 예고하셨을 때에 바로 그 뒤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한 것에서도 드러났고 또 세 번째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하셨을 때에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 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도록 해 주십시오."하고 청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서 버려야 하는지를 분명히 밝히셨다.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버려야 한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버려야 할 것들은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녀, 토지 등 어느 것 하나 쉽게 버려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그들의 삶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어쩌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은 바로 예수님이 버리라고 말씀하신 것들을 더 많이 갖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애지중지하는 그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니 그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자기가 더 잘 되기 위해서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어도 자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분과 그분의 것을 위해서 자기가 가장 소중한 것들을 그리고 그것들이 없으면 당장 내가 불편하고 살아가기 힘든데 그 모든 것들을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신 이상자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들은 우리의 생각이고, 계산이고, 이해타산적이지만 분명한 것은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니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순수한 지향으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까?
그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또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우리가 수도생활을 하든 신앙생활을 하든 처음의 동기는 누구나 베드로처럼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시작하게 된다. 처음부터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것들을 모두 버리고 신앙생활이나 수도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다 자기가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이러 저러한 면에서 더 좋아질 것이다.’라는 의도로 신앙을 갖는 것이고 또 수도생활이나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 수도원이나 신학교에 들어가는 이들도 나름대로 자기를 위해서 시작하게 된다.
즉 수도자 또는 신부가 되면 "이러저러한 면에서 자기에게 더 좋을 것이다."라는 계산이 서기 때문에 시작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수도생활이나 성직자가 되고자하는 聖人은 없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의 이익 또는 욕망에서 시작은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작은 베드로처럼 자기의 욕심으로 모든 것을 버리지만 그 동기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또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순수해져야 한다,
정말로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활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정말로 버린 사람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동안 우리 나름대로 소중하다고 지니고 있던 모든 것들과 사람까지도 버릴 수 있는 가치와 의미를 예수님 안에서 또 복음 안에서 찾아야 한다.
즉 무엇을 버리기 위해서는 버리는 것보다 더 큰 것이 발견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손해보면서 버리는 사람은 바보이다. 아니 예수님도 원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작은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럴려면 매일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면서 내가 가진 것보다 더 큰 가치를 복음 안에서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복음 안에서 큰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매일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면서 그 가치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복음의 큰 가치는 매일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통해서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한 사람만이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맛볼 수 있게 된다. 이런 사람만이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고 진정 자유롭게 생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만이 바오로 사도가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같이 고난을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필립3,8-10)라는 말을 알아 들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일 매일 예수님과 복음의 가치를 새롭게 깨달아 감으로써 예수님과 복음 이외의 모든 것들을 조금씩 버리는 생활이어야 한다. 그것이 신앙의 성숙이요, 발전이다. 이런 사람들은 현세에서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 동안 자기가 가장 귀중하게 생각했던 것들과 사람들을 버리는데 박해를 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른 사람한테보다도 우선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박해를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버림이 자기와 다른 이들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기쁘게 박해를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다. "버림"의 가치와 의미를 숙고하는 하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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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주님께서는 당신 통교의 수단이며 활동의 장인 역사 안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스승이시요 주님이시며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코 복음 10장 25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주님의 보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는 듯이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하고 말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또 특히 마르코 복음서에만 서술되어 있는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은 현세에서 어려움도 있겠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부를 누리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현대 사회에서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즘 세상의 논리로 보자면 현실의 보상이 내세의 보상보다 훨씬 중요하며, 어떤 때는 현실의 보상이 전부인 양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또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판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과 그분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한 첫째가 될 수 있고,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보여 준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과 세상의 완성 기준을 그리스도에 두고 이 세상을 완성하고자 희망하며 일하되, 언제나 예수님의 방식을 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께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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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의 ‘부자청년 이야기’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 하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버린다는 것’의 의미가 단지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버리는가에 있음을 깨우쳐주십니다.
우리는 왜 그 소중한 것들을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버려야만 하는가? 그 대답은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 ‘복음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예수님과 복음’이 그 모든 것들을 버릴만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를 비록 잘 모른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채 알지 모르면서도 매료당할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는 끊임없이 복음과 예수님을 더 사랑하려고 애쓰면서, 그 의미와 가치를 깨달아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을 넘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을 넘어, 진정 복음인 복음을 알아가며 진정 예수님이신 예수님을 알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차차 예수님과 복음을 깨달아가면서, 우리는 예수님 이외의 것들을 조금씩 버려가게 되게 될 것입니다. 곧 아무리 값지고 좋은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들이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갑니다. 또한 나에게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버리는 일은, 진정으로 사랑할 때만이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사랑이 작아서일지 모를 일입니다.
사실, 사랑이야말로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버릴 수 있고, 진정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버릴 수 있게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중심이요 궁극적인 것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도 아빌라의 데레사처럼 이렇게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고 아무 것도 너를 두렵게 하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갈 뿐,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소유한 이는 부족함이 없으니(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예수님과 복음을 사랑한다면,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대변혁이 생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구하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 자신을 위한 다른 것을 구하는 데서는 꼴찌가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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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 사람들은 소위, 출세하려고 애를 씁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며 권력을 누리려고 합니다. 부정과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한 자리 차지하려고 애를 쓰고 더 많이 소유하려고 불법을 자행하기도 합니다. 공정과 정의, 평등, 상식을 말하지만 불리하면 칼을 대고, 유리하면 줄을 대는 세상은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성공할 수 있어도 하느님 앞에서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랐습니다”(마르10,28).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구원받는 것을 출세하는 정도로 생각하였나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고 자랑삼아 말한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버렸으니 한자리 주십시오.’ 하는 마음이 엿보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 예고하셨을 때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가에서 논쟁한 것에서 드러났고, 세 번째 예고하셨을 때에도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도록 해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린 이유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버려야지, 자신을 위해서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을 위해서 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고, 자신을 위해서 살려면 예수님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가진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권력의 힘을 지닌 것을 첫째로 여기지만, 하늘에서는 많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를 봅니다. 무엇을 위해 썼느냐가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내가 잘 먹고 잘 입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사랑을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영원한 생명, 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룰 수는 없지만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버려야 할 것을 하나씩 기쁘게 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재물이든, 권력이나 명예든 취미생활이든 지금 첫째라고 생각하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주님 마음에 드는 꼴찌의 자리를 차지하여 마침내 천상에서 첫째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모든 것에서 마음을 비우고 주님만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비우는 만큼 그분께서는 채워주실 것입니다.” 1베드1,13-15의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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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을 읽다가, ‘1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았습니다.
1. 생각보다 사람들은 네게 관심이 없어. 그러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좋아하는 걸 선택해.
2. 네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너에게서 떠나갈 거야. 네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꼭 먼저 연락해.
3.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게 아니라, 결국 내가 다 이겨내는 거더라. 너무 시간을 믿지마.
4. 마음껏 표현해. 네가 혼자 생각하는 걸 상대도 알고 있을거라 착각하지마.
5. 어른스러워지는 거, 단단해지는 거 그거 어렵더라. 그러니 건강 꼭 챙겨. 마음도, 몸도.
여러분은 이 다섯 가지 중에서, 1년 뒤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습니까? 사실 모두 필요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간단한 진리이고 또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긴 주님 말씀만으로도 우리는 세상을 충분히 잘 살 수 있지만, 이 말씀도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올바른 삶을 사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모두 하느님 자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을 따르면서 후회를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뜻에 맡기기보다, 계속해서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만 하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일을 해야 하기에 하느님 뜻을 따를 수 없다면서 뒤돌아 떠나기도 합니다. 큰 후회를 남길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부자 청년이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장면이 나옵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의 심성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5)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께서는 재물 때문에 하느님 나라로 가지 못하는 사람을 향한 안타까움을 표시하신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저희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따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포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면 당연히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주저하게 될까요? 아직도 멀었나 봅니다.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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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때문에>
마르코 10,28-31 (따름과 보상)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때문에>
믿음 때문에
오직 믿음 때문에
그저 믿으렵니다
희망 때문에
오직 희망 때문에
그저 희망하렵니다
사랑 때문에
오직 사랑 때문에
그저 사랑하렵니다
진실 때문에
오직 진실 때문에
그저 진실하렵니다
의로움 때문에
오직 의로움 때문에
그저 의로우렵니다
살림 때문에
오직 살림 때문에
그저 살리렵니다
당신 때문에
오직 당신 때문에
그저 당신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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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버리면 얻는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진정 주님 말씀이 맞을까요? 주님께서 진정 현세에서 백 배의 보상을 약속하셨을까요?
현세에서 박해받고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보상받을 거라는 말씀은 맞는 말이지만 현세에서 백 배 보상은 약속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진정 그렇게 약속하셨다면 그 뜻은 어떤 것일까요?
모 유명한 목사님께서 삼박자 축복, 곧 하느님을 믿으면 부와 건강과 명예 세 가지를 이 세상에서 주실 거라고 한 말과 같은 뜻일까요?
이런 뜻의 말씀을 주님께서 하셨을 리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걸까요?
버리면 얻는다는 말씀, 버리는 자가 얻는다는 말씀, 그것을 말씀하신 것일 겁니다.
제가 한 여자와 결혼하지 않으니 제가 여기 국밥집을 하는 데 많은 봉사자가 있고, 제가 한 어머니를 포기하니 많은 분이 제 어머니 되어주시고, 제가 세상의 많은 분을 어머니로 모실 수 있으며 제가 제 소유를 포기하고 주님 사업을 하니 많은 분이 많은 성금을 보내주시는 것과 같은 뜻일 겁니다.
버리면 얻는다는 말씀은 버리면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오늘 주님 말씀대로 당신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버려야지 하느님께서 주십니다.
진작에 믿지 못했다면 오늘부터 이것을 믿고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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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전 정화>
- 은총의 강, 생명수의 강 -
오늘은 저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2006년에 봉헌했으니 벌써 17년이 지났습니다.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개인은 물론 공동체 삶의 중심을 상징하는 성전입니다. 아마 자랑은 1987년 3월19일 성 요셉 대축일에 설립된 수도원 시작부터 지금까지 늘 열려 있는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온돌방 성전부터 시작하여 여러번 그 자리에서 이동하여 보수 개축하여 지내다가 마침내 2005년 9월부터 시작하여 2006년에 완공하여 5월30일 바로 이날 성전 봉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날 성전 봉헌 축일 미사때는 300명 이상, 수도원 설립이래 가장 많은 분들이 참석했습니다. 수도원이 이런저런 사연으로 우여곡절 어려움을 겪다 기사회생(起死回生)한 느낌이라 이날의 감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요셉수도원으로는 새 성전 봉헌은 결정적 전환점이 됐습니다. 전례부터 새로워졌습니다. 커다란 밥상같은 입석 제대에 독서대, 그리고 미사 복사가 시작되어 공동전례도 제대로 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옛날의 돌집 성전을 그리워하는 분들도 많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런 변화였습니다.
오늘은 요셉 수도원 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아니 오늘뿐 아니라 매일매일이 성전봉헌 축일입니다. 봉헌이란 말마디가 참 아름답고 위로가 됩니다. 봉헌의 기쁨, 봉헌의 찬미, 봉헌의 감사, 봉헌의 사랑, 봉헌의 축복, 봉헌의 행복, 봉헌의 정화, 봉헌의 성화, 봉헌의 새로움등 끝이 없습니다.
보이는 가시적 성전의 봉헌과 더불어 동시에 비가시적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성전, 그리고 각자 성전인 자신을 봉헌하면서 끊임없이 정화되고 성화되어 새로워지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명실공히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로 믿는 이들 삶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성전의 존재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성전에서 거행되는 공동전례를 사랑합니다. 성전에서 공동전례를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거행하면서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신 주님을 확인하기에 결코 뿌리없이 방황하는 일도 없고 삶의 무지와 허무의 늪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그리워하는 시편도 참 많고 오늘 화답송 후렴도 이에 속합니다.
“강물이 줄기줄기 하느님의 도성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거처를 즐겁게 하네. 하느님이 그 안에 계시니 흔들리지 않네. 하느님이 동틀 녘에 구해 주시네”(시편46,5-6)
성전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의 성령이 부단히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며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속화되거나 동화됨이 없이 세상을 끊임없이 성화하면서 성전의 역할을 다하게 됩니다. 사실 세상을 성화해야할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성전이 속화되어 부패 변질되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상실한다면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의 성전 타락에 대한 열화와 같은 분노와 성전정화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지당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채찍을 휘두르며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이들과 환전상들을 내쫓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의 집인 성전 사랑으로 그대로 표현됨을 봅니다. 제자들은 즉시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는 성경 말씀을 연상합니다. 이때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되는 표징을 보여달라는 말씀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우리에게는 평생 명심해야 할 화두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믿는 이들의 중심일뿐 아니라 광야 세상의 오아시스 중심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성전에서 끊임없이 거행되는 미사은총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물론 우리 각자의 성전을 거룩하게 함은 물론 세상을 거룩하게 함으로 명실공히 세상을 살리는 세상의 중심이 됩니다. 오늘 미사전례중 아름다운 감사송의 고백이 이를 잘 표현합니다.
“주님께서는 저희에게 눈에 보이는 이 집을 짓게 하시어, 주님께 나아가도록 끊임없이 도와주시며, 주님과 저희의 신비로운 결합을, 이곳에서 오묘히 드러내시고 굳게 하시나이다. 또한 여기에서 저희를 주님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게 하시어,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라게 하시고, 마침내 천상 도읍 예루살렘에서 평화의 나라로 완성하시나이다.”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성전인지요! 천상 예루살렘을 향해 끊임없이 성장, 성숙중인, 순례여정중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에제키엘서의 말씀은 그대로 세상을 살리고 정화하고 성화하는 성전은총을, 미사전례 은총을 상징합니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 나기 때문에, 고기도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말그대로 은총의 강, 생명수의 강은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이 은총의 강가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으니,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되니 영혼의 양식과 약이 되는 성체성사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마침내 에제키엘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을 통해 그대로 실현됩니다.
새로운 성전(요한2,21)인 예수그리스도의 몸, 곧 그분의 옆구리(요한19,34)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물이 흐릅니다. 그리고 희생된 어린양의 천상 어좌에서는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묵시22,1.2). 바로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 순례 여정중의 최종 목적지인 천상 도읍 예루살렘 성전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끊임없이 당신 성전인 우리를 정화하시고 성화하시어 우리 모두 주님의 은총의 강, 생명수의 강이 되어 세상을 살리며 흐르게 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이 너희 안에 계신다. 너희가 바로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다.”(1코린3,1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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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10,28)
<따름과 보상!>
오늘 복음(마르10,28-31)은 '따름과 보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앞선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에 대한 말씀'인데,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4-2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자신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말합니다. 그런 제자들을 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10,30) 그리고 아주 중요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10,31)
늘 깨어 있어야 첫째가 될 수 있다는 말씀, 그래야 이제와 영원히 하느님 나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부터 전례력으로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전례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자 본질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는 시기를 보내고, 오늘부터 다시 연중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연중시기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땀과 열정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모두의 구원을 위해 땀과 열정을 드러내는 시기입니다.
오늘 독서(집회35,1-15)에서 집회서 저자는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지 마라."(35,6)
늘 나를 기다리고 있는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는 꼴찌가 되지 말고,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주님 마음에 드는 첫째가 됩시다!
이제와 영원히 하느님 나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오늘도 땀과 열정을 드러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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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j-ih3W4ZZ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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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 30)
버리지 못해
불행한 우리들
삶입니다.
버려야
얻게되는
행복입니다.
버리지 못하고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제자신임을
깨닫습니다.
버리지 않기에
자아에 갇혀있는
모습입니다.
제대로 버려야
주님을 제대로
모실 수 있습니다.
버리는 것은
비우는 입니다.
다 버리고 갈
우리들
인생입니다.
버리지 않고서는
하느님께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들의
처음과 끝에는
버리는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버려야
되찾게 되는
믿음입니다.
버리는 것은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맡겨야
끝까지
따를 수 있는
부르심의
시간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니
뜨거워질 수 있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에게는
버림이 있고
주님께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버려야 보게되고
버려야 얻게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삶과 죽음과
내세 사이에는
버리고 비우고
맡기는 따름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버림을
반성하는
우리의 일상
생활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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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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