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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주는 이유
겨울이 깊어지며 추위도 깊어지고
지구촌의 온 인류가 오랜 질병으로 시름도 깊어지는 계절이다
앞날이 보이지 않아 <캄캄한 시간>을 지내는 사람들이 많고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도 많다
무언가 보여야 앞으로 갈텐데~
붙잡고 일어설만 한 버팀목이라도 있어야 할텐데~
주님의 날이 저무는 시간에~
복음서에서 '잃은 것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읽으며 <집 떠난 둘째아들>을 보고, 집 떠나 주저앉아 사는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를 보았다
정호승님의 <지푸라기>라는 시가 오버랩(overlap)되었다
"나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 따라 떠도는 게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
내일도 슬퍼하고 오늘도 슬퍼하는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
지푸라기에 길가에 놓여진 이유!
그건 버려진 게 아니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위해서다
그건 떠도는 게 아니라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 붙잡고 다시 일어서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가난한 인자>의 삶으로 지푸라기처럼 되셨다.
골고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누구나 붙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처럼 되셨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신다.
길가에서 지푸라기 되어 우리를 기다리신다.
내 손끝 닿을 만한 그 곳에서 지푸라기 되어 날 기다리신다
지푸라기처럼 되신 하나님!
나를 붙잡아라
그리고 그 바닥에서 다시 일어서라
그 캄캄함에서 눈떠라 말씀하신다
(사도행전 3:6) 나는 동전 한푼 가진 것이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시오
집보다는 맘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수도자가 사는 집은 흙과 나무로만 지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흙과 나무는 기본적인 소재입니다. 집을 흙과 나무로만 짓게 되면 자연히 검소한 집이 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지은 수도원도 그들이 소유하지 말고 그 속에서 순례자나 여행자처럼 살자고 했습니다. 수도자에게 있어서 우선할 일은 집이 아닌 마음임을 일깨워 줍니다.
함석헌선생은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라는 글에서 믿는 이들의
<맘의 성소>를 말했습니다. 그 글의 부분 내용입니다.
"그대는 님이 좋아하시는 골방 어디다 차리려나?
깊은 산엔가 거친 들엔가?
껌껌한 지붕 밑엔가?
또 그렇지 않으면 지하실엔가?
님이 좋아하시는 골방
깊은 산도 아니요 거친 들도 아니요,
지붕 밑도 지하실도 아니요,
오직 그대 맘 은밀한 속에 있네.
그대 맘의 네 문 밀밀히 닫고
세상 소리와 냄새 다 끊어버린 후
맑은 등잔 하나 가만히 밝혀만 놓면
극진하신 님의 꿀 같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네."
님이 좋아하시는 골방 어디다 차리시려나?
깊은 산, 거친 들, 지붕 밑, 지하실 아닌
<그대 맘 은밀한 속>에 골방을 차리라 제안합니다.
그 골방에~
세상 소리, 세상 냄새 다 끊어버리고, 맑은 등잔 하나 밝히면
꿀같은 님의 소리 들을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어려운 시절입니다.
언제 이 괴로운 시절이 지나갈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리라" 하시던 예수님 말씀
이 생각납니다. 우리 눈에 안보여~ 우리 생각 못미치지만~
주님은 오늘도 교회를 세워가십니다.
예배당에서~한 몸인 성도들 만날 수 있는 그날까지.
작은 촛불 하나 밝혀놓고 내 맘의 은밀한 성소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오십시오 주 예수님" Kumbaya My Lord, Kumbaya!
지구촌에 사는 모든 이들이 길을 몰라 어려운 시절이다
영국 교회의 사제였던 John. C. Ryle의 <바른 길><곧은 길>
<선한 길>을 독서하며 '길'에 대한 생각을 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길을 가는 사람이다.
떠나온 곳이 있고 마침내 가야할 곳이 있기에
사람은 끊임없이 길을 걸어가야 하는 사람이다.
사람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라고 부른다.
사람은 오늘도 내일도' '길 위의 사람'이다
길이란 공간의 이동을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과정에도 길이 있고
탄생에서 죽음에까지 이르는 생의 여정에도 길이 있다.
'지금 여기에' 머물 수없는 것이 인생이다.
삶은 흐르는 것이기에 길을 걸어야 한다.
길을 걸어가며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고
길을 걸어가며 <최고의 높은 가치>를 찾아야 한다.
길을 걸어가며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가야 한다.
작가 문정희님은 '비망록'이란 그의 시에서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며
지난 삶에 대한 悔恨(회한)을 말하고 있다.
생이 종착되는 날에,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바른 길> <곧은 길> <선한 길>을 찾아 그 길을 걸어야 한다
멈추면 늙는 것이고
멈추면 병든 것이고
멈추면 죽은 것이다.
우리는
'물 냄새 맡고 달리는 사막의 약대처럼
스며든 빛 잡으려 허우적이는 흙 속의 새싹처럼'
길, 진리,생명을 향해 길을 나서야 하고 걸어야 한다.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선택하는 것이 삶이다
(요14:6) 나는 길이다...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갈 사람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시1:1 메시지) 그대 , 하나님이 좋아하신다. 죄의 소굴에 들락거리질 않으니, 망할 길에 얼씬거리지 않으니, 배웠다고 입만 살아있는 것 아니니...
#믿음에 대한 생각
동양의 전통적인 생각 속에서는
산도 하나의 생명체로 여겼다.
그래서 등산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생명체는 밟으며 오르는 것이 아니기에
입산! 산에 들어간다고 했다.
산에 가며 든 생각
아하. 내가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구나!
생각하니 산이 더 좋아졌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오르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한국 교회 안에는 들어가려는 사람보다는
오르려는 사람이 많다.
믿음은?
십자가 안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속으로
가르쳐 주신 말씀과 행하신 삶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깊게 들어가는 것이다
깊게 믿고 깊게 들어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날동안 깊게 들어가다가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큰 주님을 향하여 작은 내가 들어가는 것!
깊은 주님을 향하여 옅은 내가 들어가는 것!
참이신 주님을 향하여 거짓인 내가 들어가는 것!
그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길 속에, 진리 속에, 생명 속에 들어가
'오직 하나 되는 것(at-one-ment)'이다
(요15:4) 내 안에 살아라. 내가 너희 안에 살듯이, 너희도 내 안에 살아라
*감리교 연수원 동산의 십자가
충분하다 충분하다.
이 몇 마디 단어들로 충분하다.
이 몇 마디 단어들로 충분하지 않다면
이 호흡만으로 충분하다.
이 호흡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이렇게 여기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윗 글은 아일랜드의 자연주의자 데이비드 화이트의 글입니다.
<충분하다>가 글의 제목입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제 나는 나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정말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적은 것을 가지고도 많은 것을 가진 것처럼 행복하고, 많은 것을 가지고도 적은 것을 가진 것처럼 행복합니다...내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어 주신 분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습니다.(빌4: 12-13)
21세기초 한국땅에 살면서도 편리함을 등지고
전기와 수도가 없는 깊은 산골
말그대로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곳'에서 살며
그래도 <충분하다> 말하며 살았던 법정 스님을 생각합니다.
바울과 데이비드 화이트에 기대어 연습합니다. 충분하다!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연습합니다. 충분하다!
욕심, 미련 많은 나의 속사람에게 외칩니다. 충분하다!
평생 고국어를 사용하며 살아왔지만 아직도 낯선 단어들이 많다
그래도 몇 마디 단어들로 글을 쓰며 읽으며 말을 하며 살아갈 수 있으니 충분하다. 충분하다!
오늘 호흡할 수 있으니 충분하다
지난 밤 호흡하며 무사하게 지냈으니 이 호흡으로 충분하다
이순간 나의 호흡으로 들숨과 날숨 이어갈 수 있으니 충분하다
이 호흡만으로도 충분하다. 충분하다!
내가 앉은 자리~ 세상 사는 이들이 부러워하는 자리 아니지만
오늘 무덤에 있지 않고, 병들어 누워 있지 않고
앉아 있으니 충분하다.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충분하다!
*물 속의 물고기가 목말라 한다는 말을 듣고
물고기 말이 내 말같아 나는 웃는다
*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보다는 풍성하게 존재하는 삶이 귀하다
늦은 가을에 송추계곡을 오르다 만난 꽃입니다.
#생각 하나
키의 머리 끝까지
내 몸무게의 소수점 끝자리까지
가득가득 차서
출렁거리는
내안의 너(정채봉)
시인 속에 출렁거리는 '너'는 누구일까?
키의 머리 끝까지, 몸무게의 소수점 끝자리까지
가득가득 차서 출렁거리는 '너'는 누구일까?
나도 내 속에 가득차서 출렁거릴 '그 이'를 기다린다
#생각 둘
미술 시간에 어머니 얼굴을 그린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제야 우리는 그 친구에게 어머니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림은 '그리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뿐입니다.
그림을 그려야 할텐데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림을 그려야 할텐데 내가 그리워하는 이는 누구인가?
#생각 셋
멀리 사패산을 바라보며 말씀을 새긴다
눈을 들어 산을 보네
산이 내게 힘이 되어 줄까?
아니, 내 힘은 오직 하나님.
하늘과 땅과 산을 만드신 그분.(시121:1-2)
양희은님이 노래하는 '주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찬양을 듣고 있습니다. 멀리 눈덮힌 사패산을 바라보며 함께 노래합니다. "내 영혼이 찬양하네~" 오늘 따라 이 찬송이 간절한 마음의 찬송이 됩니다.
정호승님의 글을 읽다가 '눈부처'란 말을 보았습니다. 60여년 한국어를 사용하며 살아왔지만 친근하지 단어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눈동자에 비치어 나타난 사람의 형상>이라는 뜻입니다. 사전을 찾기 전에는 전혀 다른 뜻으로 오해했는데 그 뜻을 알고보니 참 아름답고 의미깊은 말입니다.
내 앞에 있는 나 아닌 당신의 눈에 비추어진 나의 모습! 그것이 나의
<눈부처>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의 눈>에 새겨진 나의 <눈부처>를 그립니다. 너무 부끄러워 빠져 나오고 싶지만 하나님은 그런 나의 마음까지도 다 아시며 "괜찮다 다 알고있다" 말씀하십니다.
가만히 눈감고 십자가에 달려계신 <예수님의 눈>에 있는 나의 <눈부처>를 그립니다. 의심과 두려움에 가득차 그 자리에서 도망하고 싶지만 그 마음까지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살며시 눈감고 <미움과 원망쌓인 사람들> 속에 있는 나의 <눈부처>를 그립니다. "네가 가룟유다가 아니냐?"는 내면의 음성을 듣습니다.
당신 눈 속에 비추어지는 <눈부처>가 조심스러워 먼저 거울앞에 서서 나의 눈동자 속에 비추어지는 <나의 마음><나의 삶>을 살핍니다.
(잠4:23. 현대어성경) 세상에는 지켜야 할 것도 많지. 하나 그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키거라. 네 마음을 지키는 것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사람을 살리는 길이다
(4:26)무엇을 할 것인지 곰곰히 생각하여라. 그런 다음 행동하여라. 무슨 일을 하든지 올마르게만 하여라
*경포 바닷가에서 만난 조각상입니다
폭설이 내리는 밤입니다. 한파주의보도 발령되어 전국이 꽁꽁 얼어붙은 밤입니다. TV 뉴스는 눈내린 거리를 환하게 웃음으로 걸어가는 젊은이들을 보여줍니다. 페친의 게시판에는 아파트촌의 이웃들이 마당에 모여 즐겁게 눈놀이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밤 깊은 시간이지만 마냥 즐거운 모습들입니다. 눈내리는 겨울밤의 낭만을 즐김은 좋은 일입니다.
이렇게 춥고 눈내리는 밤에 <가난한 마을>에 사는 추운 이들이 생각납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잠못드는 이들>을 기억합니다. 꽁꽁 얼어붙은 세상이라 <마음 붙이기>와 <마음나눔>이 어려운 세상입니다. 살갑게 다가가 통하기가 어려운 세상입니다.
안도현님의 <우리가 눈발이라면>을 찾아 읽으며 낮은 마을에서
<잠못드는 이>들과 마음을 나누어 가집니다.
"허공에다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
시인은 우리가 눈발이라면 <따듯한 함박눈>이 되자고 제안합니다.
가장 낮은 곳에 내리는 따듯한 함박눈이 되어 <잠 못드는 이>에게 편지가 되고,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고 제안합니다.
시인과 함께 외로운 이에게는 편지가 되고 상처 만난 이에게는 생명이 되는 삶을 그립니다
어느 작가가 '첫 눈은 첫 사랑과 같다'고 표현한 걸 보았습니다. 이 밤에 내리는 눈이 첫 눈은 아니지만, 첫사랑이면좋겠습니다 내리는 눈이 노숙인의 언 발길위에, 종일 앉아있었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노점상의 빈가슴에 첫사랑으로 내리길 바랍니다.
*특별히 내리는 눈이 안데르센묘원에 잠자고 있는 정인이를 따듯하게 덮어주면 좋겠습니다.
(요일 3:14)형제자매를 사랑하면, 그것으로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이탈리아의 라 베르나 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곳곳에 남겨진 성 프란치스코의 흔적이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특히 '오상경당'에서 받은 감동은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이 장소는 천사가 프란치스코에게 나타나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기를 청하면서 그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 5개의 성흔>을 박아준 특별한 장소입니다. 그 순간 놀라움과 감동에 사로잡혔을 프란치스코를 그려보았습니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하나님과 교회와 사람들, 모든 피조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고가는 역사 가운데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큰 바위 얼굴>로 남아있습니다. 아쉽게도 오상을 받은 지 2년후 그는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성당에는 그가 오상을 받던 당시에 입고 있었던 <다 낡아버린 너덜너덜한 빛바랜 수도복>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청빈><겸손><기도><묵상>으로 산 성인의 삶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임종시 마지막에 그가 남긴 말이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제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인이 남긴 말을 새깁니다. "우리는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마도 <못다 한 일>에 대한 아쉬움 일 것입니다. <못다 한 사랑>에 대한 아쉬움 일 것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입니다.
뉴욕 출신의 작가인 마거릿 생스터의 시를 읽었습니다.
"당신이 하는 일이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하지 않고 남겨 두는 일이 문제다
...
잊어버린 부드러운 말
쓰지 않은 편지
보내지 않은 꽃
...
당신이 치워줄 수 있었던 형제의 길에 놓인 돌
너무 바빠서 해 주지 못한 힘을 복돋아 주는 몇 마디 조언
당신 자신의 문제를 걱정하느라 시간이 없었거나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사랑이 담긴 손길
마음을 어루만지는 다정한 말투
...
인생은 너무나 짧고
슬픔은 모두 너무 크다
너무 늦게까지 미루는
우리의 느린 연민을 눈감아 주기에는~ "
힘을 복돋아 주는 몇 마디 조언! 사랑이 담긴 손길!
다정한 말투!~남겨두지 말아야 할 일들 입니다.
2021년! 새로운 시간을 출발했습니다. 새출발의 도상에서 확인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시간은 빨리 흐른다><생은 짧다>.
허락되는 시간들 속에서 손! 발! 가슴!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 않고 남겨 두는 일이 문제입니다.
<남겨둔 일>이 있습니까? 이제 새로 시작하면 됩니다.
(요1 4:20-21)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떠벌리고는, 곧 바로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여러분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를 사랑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수도원의 수도사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