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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9:11,12)
1 장차 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이 되시다
땅에 있는 첫장막은 현재를 말한다면 하늘에 있한 장막은 장차 올 좋은 일들을 의미한다. 그 장막은 더 크고 완벽하며 사람이 짓지 않은 장막이다. 예슈아께서 그곳의 대제사장이 되셨다. 이 땅에 속한 성소는 대제사장이 매해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일년에 단 한번 여호와께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하늘 성소는 완벽한 제물이 필요하다. 이 땅에서 드린 동물의 희생 제물은 완전한 성소에서 사용할 수 없다. 예슈아께서는 동물의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신의 의로운 피를 여호와께 드림으로 나아가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번에 영원한 속죄가 가능할까? 염소나 송아지의 피는 육체의 예법으로서 육체를 거룩하게 하지만, 흠 없는 예슈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씻기 때문에 영원히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즉 예슈아의 피는 염소나 송아지의 피와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한 가치로서 우리를 영원히 거룩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늘 성소에서 완벽한 제물인 흠과 티가 없는 예슈아의 피는 단 한번의 속죄로 영원히 성소에 들어가실 수 있는 것이다. 즉 땅에서는 매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속죄해야 하지만, 우리가 부활한 후 하늘 성소에서는 예슈아의 피로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속죄가 필요 없게 된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땅에서는 희생 제물로 일년에 단 한번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다면, 하늘에서는 단 한번의 제물로 영원히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하늘 성소 시대는 아니다. 땅의 성소가 현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땅이 사라지고 새하늘과 새 땅에서 온전히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이 열릴 것이다. 그때 우린 마침내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예슈아께서 통치하시는 천년 왕국에서는 하늘과 땅이 공존할 것이다. 하늘 성소가 땅에 내려와 땅의 성소와 하늘 성소가 공존한다. 그래서 하늘 성소에서 예슈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희생 제물이 되셨지만 아직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슥14:16). 그것은 새하늘과 새땅이 아닌 감람산에 재림하셔서 이스라엘에 왕으로서 통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에는 부활한 성도와 살아남은 자들이 함께 공존하게 된다(슥14:4,5). 그러나 그때에도 하늘 성소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아무도 아버지께 나아가 그분을 볼 수 없다. 개혁이 성취되는 때에 모든 사람이 육체를 벗고 부활할 때 예슈아께서 통치권을 아버지께 드릴 것이고 그 길이 온전히 열려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고전15:24). 백보좌 심판 후에는 사망이 멸망하고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져 마침내 영생을 유업으로 얻게 될 것이다(고전15:26).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슥14:4,5,16,21)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전15:22-26)
#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9:13,14)
2 칼봐호메르의 논증법 (점증법)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저것은 얼마나 더 사실이겠느냐'라는 점증법을 사용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슈아께서 흠(죄) 없는 자신을 속죄 제물로 여호와께 드리셨으므로 우리의 양심을 씻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도 부정한 자에게 뿌려 육체를 정결하고 거룩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동물의 피와 재도 육체를 거룩하게 하는데 예슈아의 피는 얼마나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겠는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저것은 얼마나 더 사실이겠는가!라는 점증법을 사용하고 있다. 성소가 사실이라면 지성소는 얼마나 더 사실이겠는가! 옛언약이 사실이라면 새언약은 얼마나 더 사실이겠는가! 이땅이 사실이라면 새하늘과 새땅은 얼마나 더 사실이겠는가! 결코 전자와 후자가 서로 대립하거나 서로 헛되게 할 수 없다. 점증 될 뿐이다. 후자는 반드시 전자를 내포해야 한다. 전자가 없이 후자는 있을 수 없다. 성소가 없이 지성소가 있을 수 없다. 육체가 없이 부활체가 있을 수 없다. 유대 랍비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는 세상에서의 모든 삶보다 현 세상에서의 회개와 선행의 한 시간이 더욱 아름답다" 왜 냐하면 현 세상이 있기에 오는 세상이 있고 현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야 오는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땅에서의 회개와 선행이 오는 세상에서 놀라운 열매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점증될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결과를 바꾸는 키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세상인 것이다.
3 죽은 행실이란 무엇인가?
죽은 행실로 살아있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섬기는 것은 믿음으로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은 행실이란 무엇일까? 야고보서는 죽은 믿음이 행실(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말했다(약2:17). 그렇다면 죽은 행실은 반대로 믿음이 없는 행실일 것이다. 야고보 사도가 죽은 믿음을 가르친 이유는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믿지 않는 사람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실도 마찬가지이다. 스스로 순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즉 가짜 믿음과 가짜 순종에 스스로 속는 사람들이다. 가짜 믿음이 믿는다고 하면서 순종이 없는 것이라면, 가짜 순종은 순종한다고 하면서 사실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믿음이 곧 순종이이다. 반쪽으로는 결코 온전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사도바울이 거절한 율법의 행위는 이처럼 죽은 행실이지 율법을 거절한 것이 아니다. 당시 죽은 행실이 유대인의 모습이었다면, 죽은 믿음은 이방인의 모습이다. 우리는 온전함을 취해야 한다. 율법의 행위는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 행실이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율법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믿음이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신6:25). 예슈아께서 외식하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십일조는 하지만 율법의 더 중요한 부분인 믿음과 사랑과 공의가 없다고 책망하셨다(마23:23). 즉 죽은 행실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율법(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행위만 있는 외식하는 신앙을 말한다. 믿음이 없다면 결코 행위도 온전할 수 없다. 이들은 믿음을 만나지 못한 미성숙한 신앙, 죄에 종된 자로써 유업을 받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다(갈3:23, 4:7). 반대로 믿음만 있고 행실(행함)이 없다면 죽은 믿음이고 귀신의 믿음이다. 귀신도 예슈아를 믿고 떨었다. 즉 마귀에게 속한 가짜 믿음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린 살아있는 믿음, 살아있는 행실을 가져야 한다. 온전한 믿음(행실)으로 온전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예슈아의 피는 이런 사람들의 양심을 씻고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행실로 살아있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약2:22).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2:17,19)
4 예슈아의 피의 용도는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기도할 때 예슈아의 피를 뿌리고 마신다. 그리고 정결케 되었음을 선포한다. 그러면 우리의 영이 정결하게 될까? 만약 영이 정결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예슈아께서는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알기 위해 열매를 보라고 말씀하셨다(마12:33). 그처럼 우리의 영이 씻겨졌는지 아닌지는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예슈아의 피가 우리 안에서 하는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슈아의 피는 양심을 씻는 용도라고 말하고 있다. 즉 양심을 씻어 죽은 행실에서 살아있는 행실로 바꾸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양심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면 당연히 하나님의 법도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이 더럽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서도 그분을 믿고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고 있다고 속는 것이다. 그러나 예슈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씻어 거룩하게 하고 진정한 믿음과 진정한 순종으로 살아계신 여호와를 섬기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토록 자주 뿌리고 바르고 마시는 예슈아의 피는 우리로 여호와의 율례와 계명에 순종하게 하고 그로 인해 복을 받게 하는 용도인 것이다. 즉 예슈아의 피는 여호와에 대한 믿음과 그분을 향한 전적인 순종(복종)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사는 자의 모습이 아닌가!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2:24)
#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히9:15)
5 첫언약때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셨다
첫언약은 땅의 성소에 속한 언약이며 육체의 예법이며 내세에 대한 약속이다. 그에 반해 새언약은 양심을 씻고 마음에 법도를 새겨 영생하게 하는 하늘 성소에 속한 언약이다. 첫언약의 대제사장이 사람이라면 새언약의 대제사장은 예슈아시다. 그런데 첫언약때 범한 죄에서 속량하기 위해 예슈아께서 죽으셨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첫 언약 때 지은 죄를 속량한다면 구약 백성이 예슈아의 속량에 포함될까? 물론이다. 모든 구약 성도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또한 신약 백성들도 포함된다. 만약 이들이 첫 언약에 속한 자들이라면 말이다. 만약 언약에 속해 있지 않다면 스스로 언약에서 멀어진 자라면 예슈아의 피와 상관없는 자가 되고 속량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예슈아께서 세상 끝에 나타나셔서 세상 죄를 속량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슈아의 피의 그림자는 희생 제물의 피므로 속죄제물에 대해 생각해보자. 구약 백성은 어떻게 속량을 얻었을까? 구약 성도들도 죄를 짓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희생 제물이었다. 즉 속죄의 피가 있어야 사함을 얻는 것이 토라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희생 제물로 속죄가 이루어졌을까? 그렇지 않다. 먼저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런 자들이 드리는 희생 제물을 여호와께서 기뻐 받으시고 용서하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슈아께서 첫언약때 지는 죄를 사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율법대로 진정한 회개를 하고 순종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지었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다.
구약 성도들은 예슈아의 희생의 피가 필요할까? 필요하다. 희생 제물의 그림자가 있다고 해서 실체가 필요없지 않다. 그렇다면 신약 백성에게 희생 제물이 필요할까? 필요하다. 왜냐하면 실체가 하늘에 있다고 해서 그림자가 필요없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제사장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제사를 드리거나 성전에 마음대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이 땅에서 허용되는 법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죽고 부활하여 하늘 성소에 속할 때 동물의 희생제물은 더 이상 필요없다. 이젠 예슈아의 피로 양심이 온전케 되어 죄가 없는 완벽한 사람이 되어 완벽하게 여호와를 섬기게 되기 때문이다.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율법을 거절하였음이니라 시바에서 유향과 먼 곳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찌함이냐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제물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렘6:19,20)
6 속량은 구원이고 죄에서 벗어남이다.
예슈아께서는 첫언약 때에 지은 죄에서 속량(원어의 뜻:구원,벗어남)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드림으로써 새언약의 중보자가 되셨다. 여기서 속량은 구원과 같은 단어이다(엡4:30).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슈아께서 죽으신 것이다. 여기서 언약에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첫 언약에서 구원하신다고 생각하면 첫언약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죄에서 구원한다고 생각하면 죄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이므로 죄와 싸울 수 있다. 자칫 오해하면 언약에서 벗어나 유업과 상관없게 만들 수 있으므로 예슈아의 피가 언약이 아닌 죄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면 구원의 개념을 한번 살펴 보자. 우린 흔히 구원 받았으므로 행함과 상관없이 예슈아를 믿고 천국에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서 구원의 개념이 속량과 같고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만약 불법을 행한다면 구원받은 것이 아닌 것이다(히5:9).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야 그것이 구원이고 속량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때는 끝까지 승리하여 죽고 부활했을 때이다. 그래서 바울이 구원을 연습하고 구원을 이루라고 경고한 것이다(빌2:12). 우린 구원을 죄에서 벗어남과 동일시해야 한다. 죄는 불법이고 불순종이다. 죄에서 벗어난 자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요일3:4,8,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5:9)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요일3:4,8-9)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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