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주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게 하옵시고,
성도의 귀한 교제가 있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오니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사도행전 묵상을 시작합니다.
진리를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본문 주해)
1~5절 : 사도행전의 수신자는 누가복음의 수신자와 동일한 ‘데오빌로’이다.
데오빌로는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자’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모든 자들이 사도행전의 수신자인 것이다.
누가는 먼저 쓴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과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내셨는데, 40일 간을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약속하신 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세례를 받는 이유는 무슨 개인의 엄청난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능력을 얻기 위함이다. 이것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는 것을 주님은 원하시는 것이다.
6~8절 : 제자들이 바라고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다윗 왕국같이 힘이 있는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의 회복은 너희의 알 바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성령이 임하게 되면 너희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무엇을 증거하는 증인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즉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를 주님 오실 때까지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증인은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할 때 되어지는 것이다.
9~11절 :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 가셨다.
본문의 구름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비를 머금은 구름이 아니라, 시내산의 빽빽한 구름과 같이 초자연적인 영광의 모습을 가리킨다.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도 이와 같은 모습으로 오실 것을 천사들이 말한다.
이는 ‘지금 무엇을 하느냐?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 증인의 삶을 살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묵상)
오늘 본문은 ‘전도를 많이 하여 교회를 부흥시키자’는 주제에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초점은 ‘전도’와 ‘교회부흥’(숫자 불리기)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는 것에 있다.
무엇을 증거 하는 증인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를 증거 하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복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복은커녕 도리어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하는 것을 말하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
참된 복음을 전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뻔하다.
‘복 받는다, 잘 된다’ 해도 믿어 줄까 말까 한데, ‘당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당신을 위해 주님이 죽으셨습니다......그러니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기 확장의 마음을 부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 그 누가 ‘아유, 그렇습니까? 제가 예수 믿겠습니다.’ 하겠는가? ‘너나 잘 믿어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순전한 증인이 되지 못하고 자꾸만 밑밥을 깔고, 미끼를 던진다. 그리고는 일단은 교회로 데리고 와서 제대로 잘 가르치면 되지 않겠냐고 우리 스스로를 합리화시킨다.
그런데 사실 교회 데리고 와서도 잘 가르치지 못한다.
자신이 증인의 삶을 살지 못하는데 어떻게 증인이 되게 가르치겠는가?
사람을 불러모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물론 기왕이면 우리 교회를 오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지라도 그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은 죄인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주님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하심과 나타나심의 사건 즉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증인이 삶은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증인은 성령이 임할 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남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며,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전도에 매진하는 열정은 자아확장, 자기 자랑의 밑마음이 가득하니 그것은 이미 증인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신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 주님의 재림을 말해준다.
이 또한 주님의 재림이라는 사건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증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증인의 삶을 살지 않으면, 주님의 재림이 기다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좋아 죽겠는데.....이 세상에 미련이 가득한데....주님 다시 오심이 기다려지겠는가?
주님이 기다려지진 않지만 주일성수를 하고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는 것은 ‘혹시 모르니 보험이라도...’ 하는 심정과 같다. 그러나 그 따위 것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증인의 삶은 입으로 하는 증거에만 그쳐서는 안된다.
그 삶은 주님께 연합되는 삶이다.
그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하심과 나타나심의 사건이 내 삶에도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다.
나를 부인함으로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되고, 삶의 고난을 만날 때 잠잠히 주님 계신 무덤에 내려감으로 그의 장사되심에 연합되고, 이 땅에서 종말적 삶을 살므로 그의 부활하심에 연합되고, 전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하므로 그의 나타나심에 연합되는 삶이다.
나는 지금 당장 죽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완벽한 증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불완전한 중에도 전적으로 십자가를 의지하고, 전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일과 증인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매일 말씀 앞으로 나아가 주님과 교제한다.
나의 증인 됨은, 내가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여 주심과 같이 주님께서 이루실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무 두려움 없이, 주님 다시 오심을 간절히 기다린다.
(묵상 기도)
주님,
참으로 자격 없고 보잘것없는 자가
이런 담대한 고백을 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현재 제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을 누리고 있는 중입니다.
장차도 더 크고 깊은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성령충만한 주님의 증인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증인의 삶을 사는 동안 주님 오시면 참 좋겠습니다.
하지만 살아있으나 죽어있으나 영광의 주님을 뵈올 수 있음이 기쁨임을 압니다.
성령님, 저를 주관하여 주옵소서.
마라나 아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