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일 / 송은숙
식당 창가에서 장대한 노을을 보았을 때 저기 노을 좀 봐, 시인 친구한테 말했더니 밥 먹을 때 일 얘기 좀 하지 말라고 하더라나 이런 농담 너무 좋다고 다른 친구는 깔깔 웃었다나 노을을 보고 시인이 하는 일 노을을 캐내고 맛보고 냄새 맡고 감정하고 평하고 달아 보고 쥐어짜고 꿰매고 다림질하고 전송하고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노을을 보며 발을 구르고 붉게 부풀어 오른 노을의 발가락을 만년필로 콕콕 찔러 보며 몇 개의 문장이 능선으로 지평선으로 내려앉을 때 깃털 같은 그것을 주워 점을 쳐 보기 내일 비가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 산등성이로 배를 띄워도 되는지 그래, 이건 일이 맞지 그대 입에 넣어 줄 고기를 굽는 것도 일이지 벌겋게 숯불이 피어오를 때 잠깐잠깐 노을을 생각하고 붉은 노을을 보며 잠깐잠깐 바닥에 소복이 쌓인 능소화를 생각하고 나는 지금 노을의 무게를 재고 있어 저울이 오른쪽으로 기울면 오른쪽의 노을을 힘껏 왼쪽으로 밀며 둥글게 둥글게 노을이 번지도록 해 어둠 속에서 오래 불의 기억을 간직하라고 그러니 우리가 후식으로 자몽주스를 마실 때 다정히 말해 줘 저기, 노을 좀 봐 나는 천천히 감탄할 준비를 하며,
- 시집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걷는사람, 2024.11) -----------------------------------
* 송은숙 시인 대전 출생, 충남대 사학과 졸업, 울산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 2004년 [시사사] 시 등단, 2017년 [시에] 수필 등단 시집 『돌 속의 물고기』, 『얼음의 역사』 산문집 『골목은 둥글다』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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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으로서 저는 보통 사람들과 (행동 등과 관련하여)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 삶이 시인으로서의 삶보다 보통의 직장인,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의 삶에 더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 삶이 시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면,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벌이 겹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세상을 시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 세계에서 생경한 무엇인가를 발견하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더 괜찮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고요.
오늘은 제 삶은 싸인 곡선처럼 시와의 거리가 일정한 패턴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몸속에 내제된 시인으로서의 감각은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렇게 느끼는 증거는 필요할 때 쉽게 빠져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초보 연기자들은 어떤 감정에 몰입하기 위해 도움닫기와 같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프로는 다르죠. 필요한 때에 갑자기 눈물을 터트린다거나 또는 웃음을 터뜨립니다. “이 사람 왜 그러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저도 제가 필요할 때 시 속으로 깊이 빠져들 수 있습니다. 저는 생활인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시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자세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인으로서 살아가다 보면, 존재감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일단 말을 할 때나 글로써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나도 모르게 생생한 묘사나 낯선 은유를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저는 말투는 이렇게 변합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야, ~처럼 행동하거나 ~처럼 보이는 것이지”라고요. 저의 비유가 듣는 사람에게 생경하게 느껴질 경우, ‘역시 시인이네’라는 반응이 돌아옵니다.
사실 ‘시인처럼 말하기’나 ‘글쓰기’와 같은 것은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보다 말하고 표현하는 것에 익숙한 것이죠.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고민)하고, 더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익숙한 것뿐입니다.
오늘 화자의 얘기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식당 창가에서 장대한 노을을 보았을 때 / 저기 노을 좀 봐, 시인 친구한테 말했더니 / 밥 먹을 때 일 얘기 좀 하지 말라고 하더라나’도 같은 관점에서 접근한 것일 겁니다. 노을을 보면, 그것을 관찰하고, 느끼고, 냄새 맡으려고 하는 등의 행위가 자신도 모르게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인에게 시를 쓰기 위한 제반 행위가 일처럼 느껴질 수 있으니 ‘일 얘기 하지 말라’고 얘기한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런데요, 시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시를 보고 ‘정말 그래?’라고 질문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일 얘기’라고 말한 것은 제가 볼 땐 그 시인이 약간의 진담을 섞은 농담을 한 것일 겁니다. 왜냐하면, 시인들은 일부 습작기때를 제외하면, 위의 얘기처럼 시에만 기대어 세상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에만 기대어 살아가는 것 바람직한 삶도 아닙니다. 삶에선 ‘균형’이 절실하고, 그것은 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시에만 미쳐서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저는 ‘시에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기보다 그냥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생활을 놓아버리고 어느 한 부분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을 보고 누가 좋아해 줄 수 있을까요. 당장 본인은 즐거울지 모르지만,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고 결국엔 자신도 심각한 구렁텅이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시이든 소설이든 운동이든 저는 삶과의 균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삶이 있고 시가 있습니다. 삶이 있고 문학이 있습니다. 저에게 삶과 시, 가족과 시 중 무엇을 먼저 선택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고민하지 않고 삶과 가족을 먼저 선택할 것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시인, 작가가 된다 한들 삶이 망가져 버린다면, 그 삶을 행복한 삶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 시 쓰는 주영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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