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생
1. 스님께서는 1926년 1월 2일에 태어나셨다. 당시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한민족 말살 작업이
극에 달하였던 시기라서 민족 전체가 압제와 질곡,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2. 스님의 부친께서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할 당시에 한 영문을 지휘하는
장교이셨다. 조부께서도 구한말 훈련대장을 지내셨으므로 대대로 무관의 집안이었다.
3. 스님의 부친께서는 전형적인 무골풍이셨다. 신장은 보통키였어도 골격이 굵고 남을 이끄는
힘이 있었으며 책임 의식이 투철하셨다. 특히 남을 돕는 일에는 매우 적극적이셨다.
4. 반면 모친께서는 전통적인 유교 가풍 속에서 외동딸로 곱게 자리신 분이었다. 부친과의 연
령 차이가 많았던 관계로 더욱이나 지아비 섬김에 거의 무조건적이셨다.
5. 스님께서는 부친 노백천 공과 모친 백씨 사이의 삼남 이녀 중 장녀로 태어나셨다. 스님의
속명은 노점순이다. 태어나셨을 때에 오른쪽 발목 부위에 크기 한 치 가량의 붉은 반점이 찍어
놓은 듯 선명하여 점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그 반점의 모양이 흡사 한반도 지도를 그려
놓은 것 같았다.
6. 스님께서 태어나셨을 때만 해도 가세는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다. 지금의 서울 용산구 이태
원에서 한남동 쪽으로 넘어가는 산마루와 들녘 일대가 한때 모두 부친의 소유지였었다. 부친
께서는 당시 물감 만드는 회사도 경영하셨다.
* 가세의 몰락
7. 그러나 스님의 부친께서는 망국의 퇴역 무관으로서 일제의 폭거에 감연히 항거하였다. 그일
로 부친께서는 늘 쫓기는 몸이 되었고 몇 차레 투옥당하기까지 하셨다.
8. 부친께서는 일제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더니 스님께서 일곱 살이 되시던 해에 이르러
급기야는 토지 전답은 물론 살던 집에서 조차 맨몸으로 쫓겨나는 처지가 되었다.
9. 그때 스님 일가 일곱 식구에게 남은 재산이라고는 일곱 벌의 옷과 일곱 켤레의 신발뿐이었다.
이태원 저택에서 거리로 내쫓긴 스님 일가는 그로부터 지금의 서울 동작구 흑석동 산마루턱에
움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10. 스님께서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하셨다. "부친께서는 구한말에 한 영문의 대장을 지내
셨고 할아버님께서도 그러하셨는데 일본 사람들에게 모든 걸 빼앗기고 거리로 내쫓겼다. 그때
까지만 해도 지금 이태원에서 한남동 고개에 이르는 일대의 땅이 모두 부친의 소유였지만 숟가
락 하나 없이 빼앗겼다. 그로부터 겪게 된 삶의 고초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먹을
게 없어서 시레기를 삶아 먹는 날이 많았고 추수가 끝난 고구마 밭을 뒤져 밤톨만한 찌끄러기
를 주워 모아다 끼니를 때우곤 했다. 그러나 그때 그 고생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공부할 생각
조차 못했을 것이다."
11. 일순간에 거리로 나앉게 된 스님일가는 오라는 곳도 없고 갈 곳도 없는 처지에서 한끼의
식량에 온 가족이 목숨을 거는 처참한 굶주림의 생활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2. 스님 일가는 초근 목피로 연명하는 나날들이 계속되는 중에 하루 한끼의 식사나마 거르는
날이 적지 않았다. 시래기 나 호박 잎, 고구마 줄기가 주식이 되는 때도 많았다. 그나마 부황
을 면키 위해 몇 알의 콩을 섞을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13. 당시 스님의 하루 일과는 밭걷이가 끝난 곳을 찾아다니며 캐다 남은 구근을 주워 모으거
나 숲 속을 뒤져 나물, 열매 따위를 얻고 산에 가서 솔방울을 주워 오는 일이 전부였다.
14.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움막을 짓고 사는데 비가 오면 이건 한데였다. 더욱이 밤에 폭우
가 쏟아질 때면 아예 사생 결단을 내야만 했다. 그러니 한겨울의 고생이야 더 말할 게 있었겠
는가. 어린 마음에도 '이게 무슨 조화인가? 삽시간에 이렇게 알거지가 되는 일도 있는가'하
는 생각에 골몰하곤 했다."
* 가중되는 시련
15. 스님의 어린 영혼은 그 당시 또 다른 시련을 감당해야 했으니 그것은 부친의 학대였다.
뼈아픈 좌절 속에서 심신을 추스리기 어려웠던 부친께서는 마치 어린 스님을 한풀이의 대상
으로 작정이나 하신 듯이 무척이나 심하게 다루셨다. 그리고 그 일은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
가 되어 스님을 엄습하게 되었다.
16.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부친께서는 다른 사람의 어려운 사정은 잘 살피셨고 이웃을 위
해서도 노고를 아끼지 않는 분이었다. 그런데 유독 내게만은 혹독하셨다. 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못마땅해 하셨다. 예를 들어 걸레질하는 걸 보시면 무릎으로 긴다고 야단을 치
셨다. 나로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는데 어머님께서 나를 두둔할라치면 더욱 심하게
다루셨다. 그러는 중에도 밤중에 담배 심부름을 시키시는 게 정말 고역이었다."
17. 그 당시 스님께서 가장 견뎌내기 어려웠하셨던 일중의 하나는 부친의 담배 심부름이었
다. 스님의 부친께서는 별이 총총히 빛날 때쯤이면 으레 스님께 담배를 사오도록 명하셨는
데 움막이 있는 산 중턱에서 가게가 있는 아랫마을까지는 인가하나 없는 십 리 가까운 거리
였다. 어린 스님에겐 그 밤 길이 더할 수 없는 공포를 자아냈다. 특히 달빛조차 잠든 그믐
밤이면 더욱 그러했다.
18. 스님께서 이렇게 회고하셨다. "다만 나 때문에 두 분께서 다투시는 게 무섭고 싫었다.
그래서 정히 겁이 날 때면 그냥 나가서 밤을 새웠는데 그러다가 한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
다. 무섭기는 마친가지이고 이러나 저러나 짐승에게 먹히기는 매일반이니 어머님을 위해
심부름을 하기로 한 것이다. 나를 두둔하시느라 아버님에 맞서는 어머님이 너무나 애처롭
고 불쌍하게 느꺼졌던 것이다. 어린 마음에도 차라리 내가 아버님 눈에 띄지 않는 게 어머
님을 돕는 일이디 싶어서 점차로 밖에서 새는 날이 늘어갔다. 그때 나는 밖에서 그냥 쓰러
져 잠들곤 했는데 어는 때는 그런 내가 너무 불쌍하다고 여겨졌던지 인근의 할머니 한 분이
가끔 나를 안아다가 재워주곤 하셨다. 아무튼 한 달이면 20일쯤은 내쫓기다시피 하여 밖에
서 보내야 했었다."
* 숲 속의 일과와 상상 보시
19. 숲 속에서의 밤생이 계속될수록 스님의 어린 영혼은 삶의 차디찬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와 대자연의 부드러움 사이에서 어렴풋이 생의 의미를 깨달아 가고 있었다. 낮 동안
의 생활이 가혹하면 할수록 스님께서는 점차 밤의 포근한 위안에 젖어 들며 자연의 밀어에
귀를 기울이셨다. 그러는 동안 자연히 숲 속의 이름 모를 풀벌레들, 나무와 돌과 풀 포기들
그리고 바람 소리는 어린 스님의 대화 친구가 되어 갔다. 숲속의 밤샘은 어느새 스님의 가
장 소중한 일과로 자리잡게 되었다.
20.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처음엔 무섭고 의지할 곳조차 없었으니까 이름 모를 산새나 풀
벌레, 짐승이나 초목을 친구로 삼게 되었는데 특히 묘지의 망두석과는 늘 많은 대화를 나누
곤 했다. '너도 나처럼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가' 하고 대화를 하다 보니 점차로 하룻밤
가는 줄 몰랐고 그대로 그냥 좋았다. 비록 집에서 자지 못하고 그 추운 나무 숲에 앉아 하늘
을 쳐다보며 밤을 지새워야 했으나 거기엔 언제나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들이 앞에 좍
있었으니 그대로 좋았던 것이다. 또 어쩌다 여우 같은 산짐승들을 만나는 때도 있었는데 그게
무서운 짐승이라는 생각도 없이 그냥 바위에 기대 앉은 채 혼자 말로 한다는 소리가 '너도 아
빠가 없니? 나도 아빠가 없다.'고 말을 걸었다."
21.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너무 야단을 맞고 내쫓기니까 모든 게 다 귀찮아져서 밤이나 낮이
나 아무데고 기대 앉아 무심코 바라보는 게 일과였다. 그러노라면 구름이 뭉게뭉게 흐르는 걸
보아도 눈물이 주르르 흘렀고, 벌레 한 마리 죽은 걸 보아도 눈물지었다. 또 어느 때는 짐승
한 마리가 죽은 걸 보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살을 뜯어 먹는 놈 따로 있고 창자 먹는 게 따로
있고 죄다 따로따로인 것을 보고는 또 슬퍼서 눈물을 주르르 흘렀다. 그렇게 산에 가서도 무심
히 앉았고 들에 가서도 앉아 있기 일쑤였는데 그러다 보면 날이 저물어 퍼뜩 놀라서 솔방을 줍
고 삭정이 꺾어 가지고 들어가면 종일토록 겨우그거 해 오느냐고 야단맞고는 또 내쫓겼다. 그러
니 어떻게 하는가. 가랑잎 주워 모아다가 포대 자루 같은 데 넣고는 비집고 들어가 목만 내놓고
또 바깥 잠을 자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까 가랑잎만 넣을 때 보다 풀을 섞
어 넣으면 좀 더 뜨뜻한 기운이 감도는 걸 알게 되었고 그래서 감사함을 느낀 일도 있었다.
22. 이틀이 멀다 하고 바깥 잠을 자게 된 스님께서는 그러나 자신에게 가해지는 운명의 채찍을
맞으면서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는 않으셨다. 처음엔 밤의 공포를 이겨내야 했고, 점차
그것에 익숙해지면서는 악천후와 싸워 이겨야 했지만 그런 일들이 누구 때문이라거나 혹은 자
신의 비운 탓이라거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스님께서는 그런 일들에 묵연히 대응하실
뿐이었다.
23. 그렇더라도 그 익숙함이란 외부 조건과의 호흡 조절에 그치는 그런 일상적인 것이 아니었
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 절로 빠져나오듯이 스님께선 점차로 앞을 가로막아 선 가난, 공포,슬픔
고독의 의미를 응시하는 가운데 자신만의 삶의 길을 걷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24. 스님께서는 그 당시 숲속 바위에 올라앉아 불빛 반짝이는 민가를 내려다보며 도깨비 감투
를 즐겨 상상하셨다.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내게 도깨비 감투 하나만 있다면 저 가난한 집집
마다에 양식을 나눠줄 수 있다는 생각에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25. 투명 인간이 되어 자재권을 얻는 즐거운 상상 속에서도 스님의 시야에 떠오른 대상은 자신
이나 가족이기에 앞서 가난한 이웃이었다. 도깨비 감투를 쓰고 의적이 되어, 아무리 꺼내도 줄
지 않는 창고에 가서 무한으로 꺼내다가 두루두루 도와주는 상상 속의 보시를 한 것이었다. 스
님께서는 훗날 상상 보시를 무척이나 즐거워했다고 회고하셨다.
26. 스님께서 또 회고하셨다. "내가 도깨비 감투를 쓰고 남을 돕는 상상에 골몰하게 된 데는 어
머님의 영향도 컸던 것 같다. 어머님께서는 우거지 죽을 먹는 형편중에도 거지가 찾아오면 당
신 몫을 내어주고는 아예 굶으셨는가 하면, 자주 말씀 하시기를, '사람이 나서 한 번 죽는 것인
데 못되게 굴고 남의 것을 가로챌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고 하셨다. 어머님께서는 내내 그렇
게 하신 분이셨다. 나중에 삯바느질로 살림을 꾸리실 때도 없는 사람을 만나면 도와주기를 좋
아하셨다."
* 모친의 눈물과 격려
27. 스님의 모친께서는 빈번이 부친의 화풀이 대상이 되곤하는 스님에 대해서는 더욱이나 눈물
겨운 애정을 내보이셨다. 특히 어린 스님에게 가해지는 시련을 보시면서 가혹한 부정에 피눈물
을 흘리시곤 하셨다. 그런 모친의 눈물은 곧 스님의 눈물이 되었다.
28. 스님께서는 "내가 그때 가슴속으로 얼마나 통곡을 했었는지 모른다."고 훗날 여러 차례 말씀
하셨다. "물레방아 돌듯이 얼마나 울고 돌았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셨다. 모친의 자애로운
눈물과 격려를 결코 잊을 수 없노라는 말씀도 자주 들려주시곤 했다.
29.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어머님께서는 그런 나를 위로 하시느라고 가끔 옛이야기를 들려주셨
는데 대체로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자라서 남을 돕는 일을 한 사람들에 관한 것이
었다. 어머님께서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셨겠지만 바깥 잠을 자면서도 내가 잘 견뎌내고 있는
까닭에 일면 체념하시는 것 같았다. 내게 가끔 태몽 이야기를 하셨던 걸로 보아 내게 주어진 환
경을 나름대로 수용하신 모양이었다."
30. 모친께서 스님께 들려주셨다는 태몽은 이러하였다. '모친께서 나막신을 신고 하늘로 들리워
오르던 중에 한쪽 신발을 떨어뜨리고 천상에 오르게 되셨는데 구름 사이로 내려다보니 지상은
가마득하고 집들은 성냥갑 같아 보였다. 그때 홀연히 찬란한 금궤 하나가 나타나면서 굉음을
내며 열리는지라 안을 들여다보니 칼날이 둥그렇게 원으로 말린 칼 하나가 있었다. 모친께서
그것을 집어드는 순간 날이 쭉 펴지며 눈부신 빛을 발하였다."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스님의
모친께서는 이 꿈을 꾸신뒤 장차 크게 될 아들이 태어나는 줄로 아셨다고 한다. 스님께서는
태어나신 직후부터 전혀 울지도 않고 내내 잠만 자는지라 모친께서 일부러 꼬집어 깨워 젖을
물리곤 하셨는데 모친께서는 이런 일들을 예사롭지 않다 여기시어 어린 스님을 대하심이 매우
조심스럽고 각별하셨다고 한다.
31.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노라고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 내가 어렸을 적에 부친과 인연이 있
어 가끔 내왕하시던 한 스님이 어느 날 모친께 이르기를 '이집 식구 중에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전부를 살리게 된다.'고 하였다. 모친께서 무척 놀라워하시자 그 스님 말씀이 '그렇게 죽는 게
아니다.' 하였는데 더 이상의 말씀은 없으셨다. 어린 마음에도 참으로 묘한 말씀이라고 생각했
었다."
** 1편에서는 미륵부처님의 수행법인 용화정법의 체계를 세우신 대행스님의 탄생에 얽인
부분들을 알아 보았읍니다.
** 2편에서는 내면의 소리에 관한 부분을 알아보고 또한 미륵부처님의 수행법은 바로 여기
까지가 스승과 은사의 몫이라면 이 다음부터는 바로 내면의 소리(자성불)이 직접 각자의 은
사나 스승이 되어서 각자의 수행을 지도하게 됩니다.
** 3편에서는 출가수행으로써 본격적으로 불문에 입문해서 여러사람의 인연을 접하면서
공부하는 과정을 열거한 대목입니다.(여기에서 연등부처님의 나툼인 분과 석가모니 부처님의
나툰인 분의 만남등이 열거되어있읍니다.)
** 4편에서는 "이젠 죽어서 보리라"로서 2번째 죽음이후의 과정이 열거되어있는 부분이고요,
** 5편에서는 " 호법 신장"편을 올려드리고요,
** 6편에서는 "하늘 문이 열리다" 순으로 용화정법에 관한 대행스님의 수행담을 올려드리도
록 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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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부처님의 수행법-용화정법(1편-대행스님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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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30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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