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포도 / 이만식
1 포도가 있다. 식탁 위에 포도가 있다.
2 개가 포도를 본다. 식탁 위에 포도가 있다. 개는 포도를 먹는다.
3 개의 주인, 내가 본다. 식탁 위의 포도를 본다. 개가 포도를 먹는다. 포도가 맛있게 보인다. 포도를 먹는다.
식탁 위에 있는 포도와 개와 내가 먹는 포도를 본다.
식탁 위에 포도가 있다.
- 시집 『문학혁명의 조건』 (시산맥, 2024.11) ----------------------------------
* 이만식 시인 1953년 서울 출생. 1992년『작가세계』 등단 시집 『시론』 『아내의 문학』 『거꾸로 보는 한국문학사』 『너라는 즐거운 지옥』 『문학혁명의 조건』 등 문학평론집 『해체론의 시대』, 가천대 영문과 명예교수
****************************************************************************** "세 개의 포도"는 세 개의 시선과 연결된다. 첫 번째 포도는 무응시無凝視의 시선, 즉 아무도 바라본 자가 없는 포도, 두 번째 포도는 개가 바라본 포도, 세 번째 포도는 '내'가 바라본 포도이다. 개와 '나'의 시선에 포착된 포도는 그것을 바라본 시선들에 의해 해석된 포도이다. 그것은 닫힌 의미의 세계이며, 이념의 세계이고, 결정된 가치의 세계이다. 그것은 '맛있다'는 판단에 구속된 세계이며, 그리하여 타자에 의해 먹히는 세계이다. 진짜 포도는 개와 '나'의 시선 바깥에 있다. 그것은 해석되지 않은 포도이며, 중성성의 포도이고, 미결정성의 포도이다. 그리하여 개와 '나'의 시선을 거친 후에 모든 것을 드러내는 포도이다. 그리하여 개와 '나'의 시선을 거친 후에 시인은 다시 원래의 포도, 즉 "식탁 위의 포도" 자체로 돌아온다. 그것은 존재의 근원이며, 출발이고,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이다.
-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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