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주일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얕은 개울물에서 내 마음대로 첨벙대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흐르는 깊은 강물에서 유영하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
청년들에게 전한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닿아
주께로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15.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본문 주해)
12~14절 :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기도에 전념한다.
그들이 모인 다락방은 마가의 다락방으로 알려진다.
특별한 것은 예수님의 가족들이 그들과 함께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기도한 것은 주님의 약속인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한 것이다. 기도하였기에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니라, 약속 때문에 성령이 임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기도를 하라고 한 것일까?
기도란 노력이 아니라 자기 부인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기도 자체가 자기의 공로와 자기의 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기도를 제대로 하면 할수록 자신이 더욱 없어져야 마땅한 것이다.
15~26절 : 가룟 유다의 빈 자리를 채울 사도로 맛디아를 뽑은 내용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성령의 기다리고 있는 제자들에게는 마음의 짐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가룟 유다로 인한 마음의 상처였다.
열한 사도를 포함한 120명의 사람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를 할 때 베드로는 상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가룟 유다의 죽음이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확고하게 천명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시편을 인용한다.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시69:25)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시109:8)
그리고 가룟 유다를 대신할 한 명을 세울 것을 말한다.
가룟 유다가 없어졌다고 왜 한 사람을 더 추가하여 꼭 열둘을 채우는 것일까?
그것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열두 지파는 기존 구약의 혈족 열두 지파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이스라엘을 나타낸다.
사도의 요건으로, 예수님과 3년을 동행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 그분의 부활의 증인이어야 할 것으로 정한다.
그리고 두 사람을 추천받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제비뽑기 방식을 통해 맛디아가 뽑히고,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하는 사도의 수에 들게 된다.
제비를 뽑는 것은 히브리적 사고방식에 따른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관례이다.
구약시대에 제비뽑기 방식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 많이 사용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사도들도 당시까지 사용되던 제비뽑기 방식에 따라 결손 된 한 명의 사도를 충원한 것이다.
하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성경에는 그러한 방식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나의 묵상)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 다락방에 모인 자들은 무엇을 기도하였을까?
그들은 과거에 이스라엘의 독립과 번영 그리고 개인의 영달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그런데 그것을 이루실 줄 알았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셨다. 이제 제자들은 마치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4~5절)는 말씀을 주셨다.
예수께서 세상의 번영을 이루실 것이라 믿고 따르던 제자들에게 꿈꾸던 미래는 이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제자들이 꿈꿀 수 있는 것은 미래의 번영이나 성공이 아닌, 예수께서 보내주실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뿐이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13)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최고의 기도 응답은 성령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모인 자들의 기도는 성령을 간절히 기다리는 기도였으리라.
어제 청년부 설교 때, 주일 성수하고, 헌금하고, 봉사 좀 하는 것으로 심판을 면하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는 아예 하지 말라고 했다. 그것들은 죄인인 나에게 영생을 주신 주님께 감격해서 할 수 있는 감사의 행위이지, 그런 것들로 ‘혹시 천국?’ 하는 보험들 듯이 하는 생각 따위는 아예 버리라고 말했다.
또 ‘공부 잘하게 해 주세요,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좋은 곳에 취직하게 해 주세요, 좋은 배우자 만나 결혼하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는 하지 말라고 단언을 했다.
아마 몇몇 청년은 그 마음에 반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 중에 우리 아들이 있다.)
물론 ‘그런 기도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기도의 시작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올바로 배우지 않고 헛된 기도를 하며 그것이 옳은 양 세월을 보내다가 느닷없이 주님 오시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에 내 마음이 조급해졌다.
성령으로 살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성령 충만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성령충만 하면, 무턱대고 ‘공부 잘하게 해 주세요,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좋은 곳에 취직하게 해 주세요, 좋은 배우자 만나 결혼하게 해 주세요’ 라고 우상에게나 비는 그런 기도를 하지 않게 된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보면서 이스라엘의 독립과 번영과 개인의 영달을 꿈꾸었던 자신들을 직시하며 ‘이게 아니구나!’하고 그들이 깨닫듯이, 성령이 임하시면 공부와 돈과 취직과 결혼 등이 삶의 목적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런데 우리들은 몸을 가진 존재로써 이 땅에서 먹고 입고 결혼도 하고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땅에서 공부하고 돈 벌고 결혼해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목적이 아니다.
창세 전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도 주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을 믿는 것이다.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리 삶의 이유요 목적이요 전부이다.
그런데 죄인 된 우리는 늘 땅에 붙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기도 응답은 성령의 임하심이다.
성령이 임하실 때 이 세상의 문제에 매달려 기도하던 우리들의 기도가 달라진다.
이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살았던 세월을 회개하게 되고, 내 힘으로 이 세상을 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철저히 십자가에 연합되어 자신을 부인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을 부인하며 낮아지는 것이 기분 나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할 때 볼 수 있는 성령의 역사로 오히려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는 성령의 임하심을 간구하는 기도여야 함을 알게 된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13)
내일, 오순절 날 다락방에 휘몰아치는 성령의 바람이 너무도 기대가 된다.
(묵상 기도)
주님,
저는 언제나 잘 먹고 잘 살기를 원합니다.
나와 내 자녀들이 이 땅에서 행복하기만을 바랍니다.
죄인의 본성은 이러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니
제 생각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세상에 붙은 마음을 떼어내는 것은 본성적으로는 아프지만
성령께서 모든 것을 두르시니 아픔보다 기쁨을 더 누리는 자 됩니다.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운 저주의 십자가가
어느 새 저의 보배가 되었으니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성령님을 구하고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