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 박제영
쌀을 안치는 저 오래된 애인이
오늘 처음 만난 이국의 여자였으면 좋겠다
아무도 모르는 저 오랑캐 여자와
아무도 모르는 북쪽 오슬로 숲에서
모르는 북쪽 말과 남쪽 말이 서로를 더듬어
낙엽처럼 뒹굴다가 낙엽처럼 붉어져서
벌거벗은 몸 위에 이국의 언어를 필사하다가
통음과 통정으로 마침내 한통속이 되었으면 좋겠다
속으로 하무뭇하니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쌀을 안치는 애인에게 한다는 말이
그런데 애인아, 오랑캐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이상하지 화를 낼 줄 알았던
오래된 애인은 기꺼이 처음 만난 오랑캐가 되었으니
쌀이 밥이 되든 죽이 되든 무에 상관이랴
오늘 밤은 오랑캐의 말을 반드시 배우리라
캄캄한 오슬로 숲이 크엉 크엉
오랑캐의 울음소리로 저물어가다가
달 하나를 낳으리라
- 『사이펀』 2024년 여름호
-----------------------------
* 박제영 시인
1966년 강원도 춘천 출생. 고려대 기계공학과 졸업
1992년《시문학》 등단.
시집 『소통을 위한, 나와 당신의』, 『뜻밖에』, 『식구』, 『안녕, 오타 벵가』
산문집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등
1990년 고대문화상 시부문 수상
달아실출판사 편집장.